사랑에는 말도 필요하다.

처음. 사랑의 시작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는지. '우리 사귈래?' 혹은 '우리 사귀자' 아니면 '지금부터 진지하게 만나보자' 에서 '나 이제 널 남자로 (여자로) 볼께' 등등 사랑의 시작에는 무수히 많은 말들이 있다. 물론 한마디 말도 없이 어쩌다보니 바디 랭귀지부터 먼저 시작해서는 (주로 술먹고 기습 뽀뽀) 주뼛거림서 사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일 평범한건 사귀자 혹은 만나자라는 말로 시작하는 사랑이다.

여기 그 말을 절대로 못하는 인간 두 사람이 있다. 우재(설경구) 와 연수(송윤아). 처음에는 연수가 일방적으로 우재를 짝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를 못해서 연수는 우재와 끝내 연결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서 우재와 연수는 다시 만난다. 이제 우재도 조금씩 연수가 좋아진다. 그러다가 우재 역시 연수에게 사귀자 혹은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연수를 보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꾸 서로를 보낸다. 해리와 셀리처럼 티격태격 하지 않고 좀 애틋하긴 하지만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될듯하면서 되지 않는건 둘이 비슷하다.

사랑에 관한 충고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잡으라는 말이다. 왜냐. 잡지 않으면 놓치니까. 사랑은 시간하고 똑같아서 영원히 그 자리에서 머물며 기다려주지 않는다. 기회가 왔을때, 그리고 때가 도래했을때 고백을 하건 뭘 하건 해서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걸 못하면 계속해서 놓치게 되고 결국에는 그렇게 보내는 수 밖에는 없다. 그러다가 소주 한잔 하면 안주삼아 '예전에 내가 말이야 참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거등' 으로 시작되는 주절거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막판에는 잊게된다. 아주 가끔 그런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떠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지 않는 한. 하다가 끝낸 사랑도 잊는판에 시작도 못한 사랑은 더 빨리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나에게도 첫 사랑이 있었다. 나는 첫 사랑에게 말을 못했다. 나 말고도 그 첫사랑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나와 하루차이로 그를 만나서 고백을 했다. 나는 좋아해요라는 티만 잔뜩 내고 끝내 말은 못했지만 그 여자는 말을 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대학다니는 내내 그 두 커플을 지켜봐야했다. 단지 말을 못해서 그게 전부였다. 그 남자 역시 나 아니면 그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그때 내가 용기를 내서 말을 했더라면 내 첫사랑은 이뤄지진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짝사랑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내가 그렇게 놓쳐버린 첫사랑이 너무 아쉬워서 언제나 내가 먼저 말을 했다. 되건 되지않건 일단 말을 하고 봤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면, 그리고 만나고 싶으면 내 쪽에서 말을 꺼냈다. 부작용이 있다면 남자들이 좀 시건방져진다는 것. 내가 자기를 굉장히 좋아해서 엄청난 용기를 내어 말했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감사하기는 커녕 지가 그만큼 잘나서가 아니겠냐고 생각한다. 그게 좀 안좋은 점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랑을 놓치지는 않는다. 그 장점이면 상대방의 시건방정도야 새발의 피라고 생각하면 도전들 해 보시길.

영화는 큰 스토리의 비약없이 천천히 흐른다. 우재도 연수도 억지스러운 캐릭터가 아니다. 송윤아가 너무 반듯해보여 지루할듯 생각되었던 영화였는데 의외로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영화가 너무 심심할까봐 끼워넣은 조연들이 좀 어색했지만 (그들의 연기는 어색하지 않았다. 다만 영화에서의 그들이 어색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봐주며 넘길 수 있는 부분이었다. 더구나 그 조연들은 막가파로 튀지도 않았으니까. 우재와 연수를 보면 답답하긴 하지만 아이구 저것들 하며 가슴을 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까지 억장을 무너지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건 연출의 힘이다. 스토리로만 보자면 러닝타임 내내 고백도 못하고 사귀지도 못하는 그들이 무척 갑갑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런 느낌이 덜하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그려냈다랄까? 이게 사랑을 놓치다에 해 줄 수 있는 평가인것 같다.

이 영화는 야한 장면도 없고 스토리에서 피튀기는 장면도 없으므로 가족끼리 충분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좋게 이 영활 써먹자면 고백하고 싶은데 못하고 있는 커플들이다. 그러니까 사랑과 우정사이쯤 되는 이들이 보면 쟤네들처럼 시간 세월 다 보내지 않으려면 이 영화관을 나서는 즉시 남은 팝콘과 콜라를 버리면서 사귀자고 말해야지라는 각오를 다질 수 있다. 뭐 물론 효과를 보장할 순 없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얘네들은 과연 계속 서로를 놓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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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1-3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글 잘쓰시네요. ^^

플라시보 2006-01-31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어머 간만의 등장이시군요. 그런데 간만에 등장하셔서 너무 쑥쓰러운 말씀을...하핫^^

마늘빵 2006-01-31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쩜 그렇게 마음에 딱딱 와닿는 말씀만 골라서. 추천.

하루(春) 2006-01-3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 싶잖아(요.)!!

플라시보 2006-01-3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오..사진 바뀌었네요? 히히 포옹하는 후추통과 소금통 (맞나요?)였었는데..^^ 추천 감사합니다. 흐흐.

하루님. 히... 제가 불을 질렀나요? 지송..^^

이리스 2006-01-3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방의 시건방정도야 새발의 피.. 라는 대목에서 한바탕 크게 웃었어요. 으하하핫..

여기저기서 다 이 영화에 대해선 나름대로 호의적이네요. 흠..

2006-02-01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2-01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후추통과 소금통 였는데 오랫만에 바꿔봤어요. ^^
영화 언능 보고 싶다.

비로그인 2006-02-0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이유없이 보고싶지 않은 영화였는데(이유는 저도 정말 모릅니다만) 플라시보 님의 리뷰를 보고나니 정말 보고싶어 졌습니다. 제가 친절한 ㄷ 씨에게 좋아한다는 티는 내면서도 끝끝내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건방짐을 못참을까봐였을 거에요. 아마 친절한 ㄷ 씨가 내게 고백한 것은 그럼 무엇이었을까요. 요즘은 그런 생각을 분홍빛이 아닌 회색빛, 파란색으로 해봅니다.

이쁜하루 2006-02-01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려고 했는데 친구가 영...아니라면서 보지말라 해서 맘 접었는데 글보니까 또..다시 가슴속이 일렁이네용...이런류 너무 좋아하는뎅..^^

2006-02-01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6-02-0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 구두님. 진짜로 상대방이 약간 시건방져져요. 지가 대빵 멋져서 고백한줄 알거든요. 특히 내가 여자고 상대가 남자일경우 심해요.^^

미미달님. 오.. 그런가요? 저도 별거 기사를 읽긴 했는데 그냥 그런가보다 했어요.^^

아프락사스님. 흐흐. 재미나게 보시길..^^

Jude님. 저도 이 영화 되게 땡겨서 봤다기보다 엄마랑 여동생이랑 같이 볼 수 있는 적당한 영화를 고르다가 이걸 선택했어요. (마침 시간도 딱 맞고) 별 기대없이 봐서 그런지 예상외로 괜찮았더랬습니다. 그리고 그 시건방...흐흐. 먼저 고백하면 반드시 남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잘 안하셨어요. 저도 과거만 아니면 안그러고 사는건데..히히.

이쁜하루님. 아... 이런류 좋아하시면 한번 보세요. 물론 사람마다 다 다르게 보겠지만 저는 이런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꽤 괜찮았거든요. ^^

속삭이신분. 히히. 저는 곧 게이샤의 추억 봅니다. 으음... 이 영화 님한테 괜찮을것 같아요. 남자치고 감수성이 좋찮아요? 하하 그리고 더구나 제가 말하는 작전을 수행하신다니 더더욱 권하고 싶습니다. 딱 보고 콜라 팝콘 버릴때 아무렇지 않게 말하라하세요. '저 영화 보고 나니 느낀거 없니?' '뭐가?' '사랑에는 말이 필요해. 나랑 사귀자' 히히... (혼자 상상하며 겁나 즐거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