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문화 - 낮과 다른 새로운 밤 서울로의 산책 서울문화예술총서 1
김중식.김명환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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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밤문화는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구한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밤문화의 역사와 종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술과 춤, 사창가 문화에서 새로운 복지로서의 밤문화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밤문화의 변화가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구한말부터 박정희정권에 이르기까지 밤문화는, 술과 여자, 노래와 춤으로 대변되는 향락의 문화였습니다. 구한말부터 1930년대까지는 기생문화로, 당시 사회에서 기생들의 역할과 의미 등을 알수 있습니다. 기생들이 조합을 결성해 사회 일원으로서 당당히 활동하고,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과의 사랑이야기와 은신처 제공 등을 제공한 반면 밤과 낮이 엄격히 구분되는 사회였기도 합니다. 1930년대부터 광복전후까지는 청계천 남쪽의 명동,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식 카페문화와 한국식 선술집 문화로 나뉩니다. 당시 젊은이들은 일본인 주류의 카페거리로 나가 촬스톤이란 댄스를 추며 밤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광복이후 밤문화는 문화인들이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술인 맥주, 양주가 보급되며 맥주바 등의 고급술집이 선보였고, 곡식주 금령을 통해 막걸리 주류의 문화에서 소주 문화로 변화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춤과 노래를 중심으로 즐겼는데, 당시 유행했던 카바레와 고고클럽은 젊은이들과 여성(주로 유부녀)의 해방구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카바레에 빠진 여성들로 인해 사회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으며 제비족이란 단어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밤문화의 주류는 여전히 상류 권력층, 부유층이 주를 이루었으며 군사독재시절 요정정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통금으로 인해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까지 마시는 통금형 상품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종로3가, 청량리588 등이 번성합니다.

 박정희정권이 물러나고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며 통금이 해제됩니다. 이는 전두환정권의 민심책이였으며 시민들은 통금으로 인해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야간 포장마차가 등장했고, 야간 관광코스도 등장했으며 야간 결혼식마저 등장합니다. 이는 국민들이 얼마나 통금 해제를 목말라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후 서민의 밤문화라 불리우는 라디오 드라마와 TV가 보급되기 시작하며 시민들은 점차 생활속에서 밤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밤문화는 소수의 향락문화에서 대중의 여가문화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울은 그야말로 방의 도시다. - 백승만, 서울시정개발연구원 

경제위기 이후 밤문화는 10%(일급 도우미를 확보한 마담들이 전체 술값의 10%를 가져가는것) 룸살롱과 상류층 점유화 현상, 여성의 몸을 사는 주색문화에서 보는 주색문화로 변모합니다. 현대에 들어 PC방, 노래방, DVD방.. 수많은 방문화가 한국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가장 최근의 방문화중 하나인 찜질방은 이러한 방문화의 총집결이라 부를 만하며 찜질방은 그 특징으로 인해 부와 지위, 세대와 남녀구분을 탈피하는 민주주의적 요소를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은밀스러운 행위인 수면마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찜질방의 공간은 새로운 변화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밤문화는 대중의 술문화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술에 대한 관념이 많이 누그러지는 것이 특징인데, 술이 덜 깬채 출근하는 것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남자의 49%, 여자의 41.9%가 문제없다고 답변했으며 직속상관의 경우 30%이상이 이러한 경우를 모른체 넘어가는 것으로 조사됬습니다. 이는 비정상적인 생활, 노동강도에 대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청산해야 할 음주문화 때문에 병들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주도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생활문화 전체가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박재환, 《술의 사회학

현대에 들어 서울은 24시간 활동하는 도시, 낮과 밤이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더욱 다양한 밤문화를 원합니다. 술집, 극장, 대형마트, 찜질방 뿐만 아니라 지속적이고 여유로운 휴식의 밤문화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인사동, 청계천, 대학로 등이 문화지구로 지정되는 등의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문화지구로 지정된 이후 오히려 문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부작용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문화지구 지정 이후 부동산값이 폭등했고, 2003년 문화지구 지정 당시만 해도 인사동에는 172개의 골동품점, 87개의 표구사, 108개의 화랑이 있었지만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높아진 임대료를 내지 못한 대부분의 전통가게들은 문을 닫고, 카페와 중국제 기념품가게 등이 들어섰습니다.

 현대의 밤은 문화 복지, 문화 민주주의를 앞세운 새로운 밤의 가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자정 이후에도 계속되는 야경, 문화시설물은 전체의 18.8%에 달합니다. 서울은 바쁘고, 복잡하며, 고유의 이미지를 빠르게 뒤엎고, 변화하는 고정되지 않은 곳이 되었기 때문에, 서울에선 다양한 문화가 생겨나기 쉽고, 마찬가지로 소멸하기 쉽습니다. 600년 도읍의 역사를 지닌 서울은 이것이 한국의 문화다 라고 대변할 수 있는 많은 밤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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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상인 - 전설의 무기상 바실 자하로프의 생애와 시대
도널드 맥코믹 지음, 이충섭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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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가 무기상이라는 직업을 알게 된 것은 아마도 2005년에 나온 미국영화 '로드 오브 워' 가 아닐까 합니다. 전세계 인구의 12명당 1명 꼴로 소형화기로 무장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나머지 11명을 어떻게 무장시킬까 고민하던 주인공. 이런 비인간적인 고민을 하는 영화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합니다. 계속 번성중인 개인 무기밀매상, 죽음의 상인들. 그러한 죽음의 상인중에서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보어전쟁, 러일전쟁, 발칸전쟁, 1차 세계대전에 개입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군사정책결정권까지 지녔던 사람. 무기 사업은 물론이고 은행, 철도, 호텔, 석유 및 광산채굴권, 공장, 조선소 등을 보유했으며 정점에 있었을 당시 300개의 이사직을 가졌던 사람. 31개 국가에서 298개의 훈장을 받은 남자. 무기상 바실 자하로프입니다.

자하로프의 이력은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출생부터 청년기까지 그의 정보는 많은 부분이 일치하지 않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가 죽었을때 그리스인이라 말한 신문도 있는 반면, 러시아인, 터키인, 알바니아인, 유대인 등 많은 주장이 제기됩니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자신의 출생과 어린시절에 대한 증거를 인멸하는데 그만큼 애를 썼음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기록이 화재로 소실되고, 전쟁성 문서보관소에 그와 관련된 서류는 서류철만 존재할 뿐, 안의 문서는 사라졌습니다. 온갖 절차를 거쳐서 법정 소송 서류를 열람할수 있는 허가를 얻고 서류를 신청하면 사무실에 있는 누구도 그걸 찾지 못합니다. 이러한 정보의 분실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출생을 비롯한 정보를 제공함에 있어서 헷갈리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의 출생과는 다르게 소년시절 콘스탄티노플의 타타블라 지구에서 살았다는 증거는 풍부합니다. 그는 사춘기시절 창녀촌에서 관광객을 안내하는 안내인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환전상, 대금업자도 경험해 봅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타타블라의 빈민굴 출신이나 창녀촌 호객꾼이라는 불명예를 넘어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거짓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러시아 왕자라고 소개하며 부유한 건축가의 딸과 결혼하지만 곧 헤어지게 됩니다. 1877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의 전쟁이 시작되자 자하로프가 살았던 그리스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하로프는 지인의 소개로 공석이 된 노르덴펠트 사의 아테네 대표로 임명됩니다.

자하로프는 콘크탄티노플의 소매치기 소년들이 파이프로 숨을 쉬며 물속에 잠수해 도망치던 기술에 매료됬던 경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현대전에서 잠수함은 가공할 역할을 하리라 확신하고 당시 전쟁으로 군비확장을 시작하던 그리스에 잠수함 판매를 제의합니다. 그의 판매전략은 적당한 아첨, 애국심과 위세에 대한 강조, 그리고 관계자에게 주는 약소한 선물이였습니다. 그는 노르덴펠트의 새 에이전트로서 잠수함을 판매하는데 성공했고, 바로 그리스의 가상적국 터키로 날아갑니다. 그리스의 새 전력에 대한 안보위협을 주장하며 터키에 잠수함 두척을 팝니다. 터키와 그리스가 서로 적대하도록 수작을 부린 자하로프는 이어 러시아에 날아가 터키와 러시아를 적대시킴으로서 러시아에 잠수함 네대를 팝니다. 자하로프는 노르덴펠트의 총과 경쟁상대였던 맥심 총을 견제하는데도 수완을 발휘했지만, 맥심측에서 용서하고 두 회사가 합병함으로서 맥심 노르덴펠트사로 새 인생을 시작합니다. 맥심과 노르덴펠트는 사실상 기술자였기에 자하로프가 회사의 진짜 권력의 원천이 됩니다.

자하로프는 그야말로 뛰어난 통찰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현대전에서 잠수함 뿐만 아니라, 비행기의 중요성 또한 누구보다 먼저 파악했습니다. 국제정세를 판단하는 능력도 뛰어나 그는 그가 관여했던 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무수한 뒷공작과 뇌물공세를 이용합니다. 그의 재능은 맥심&노르덴펠트사와 비커스 사를 거치며 누구보다 뛰어난 무기상으로 꽃피우게 됩니다. 언론을 이용해 각국의 적개심을 이용했고, 각국의 군비증강을 부추깁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양측 모두에 무기를 팔았고, 최대한 전쟁이 오래 가도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도록 공작을 폅니다. 그의 영향력은 엄청나서, 군대의 폭격지점까지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대전 당시 브리지역이 공격을 받지 않았다는 점은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수 있는 일화입니다.

독일 국경에 가까운 브리(프랑스 북동부 지방)는 전쟁 전에 프랑스 철광협회가 용광로 단지를 세운 곳으로 연합국과 적국의 상업 및 산업 세력의 상호의존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전쟁기간을 통틀어 그 어떤 연합국에 의해서도 브리나 티옹빌에 대한 공격적인 행동은 없었으며, 이 두 곳은 광물 보급을 위해서 독일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27개월동안 독일인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무기공장에서 사용할 수천 톤의 철광석을 추출할 수 있었다. 전쟁을 단축시킬 방법이 있었는데, 그 방법은 2년 이상 무시되었던 것이다. 보수트로라는 프랑스 조종사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자신이 브리 상공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곳에 있는 적국 시설에 폭탄을 투하했다. 자하로프는 전쟁 전야에 프랑스 대통령이 수여할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을 받았지만, 보수트로가 이 사건으로 받은 유일한 상은 참모본부의 명령에 따라 받은 처벌뿐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전쟁 중에 독일 언론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다. 1917년 10월10일자 라이프치히 노이에스테 나흐리흐텐은 이렇게 보도했다. "전쟁 초기에 프랑스가 로렌 지방으로 12킬로미터만 침투해 들어왔더라면 전쟁은 6개월만에 독일의 패배로 끝났을 것이다." - pp.184~185 

바실로프의 생애는 국제적 무기 카르텔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하로프 노년기는 전쟁이 끝남으로 인해서 개인무기상들의 힘이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그를 포함한 당시의 무기상들은 국가정책을 주도하고, 전쟁을 주도했고, 국제정세의 판을 짤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실로프는 특유의 뛰어난 통찰력으로 전쟁의 판도 뿐만 아니라 그의 사후 벌어질 2차세계대전도 예측했고, 그후의 석유를 둘러싼 국제적 대립구도 또한 미리 예측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무기는 국가주도로 관리되게 됩니다. 무기상의 악몽은 이제 사라진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자하로프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습은 무기상에서 강대국의 기술관료, 과학자들, 정치인, 언론인의 모습으로 변해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국가간의 적대감을 고조시키고, 끊임없이 무기를 생산, 판매하도록 유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죽은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개인 무기밀매상은 성업중입니다. 영화 '로드 오브 워'에서 정의로운 인터폴 요원에게 설교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풀려나는 무기밀매상은 현실의 모습을 잔혹하리만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풀려나는 이유는 당신이 날 기소하려는 이유와 같아. 나는 현재 최고로 더럽고 잔학한 지도자들의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기 때문이지. 그 중에는, 당신의 적들의 적들도 있어. 그리고 당신 대장은 세계 최대의 무기상이지. 합중국 대통령 말이야. 하루에 내 1년 선적량보다 많이 팔아 치워. 가끔은 자기 지문이 찍힌 총은 못 팔 때가 있지. 가끔은 나같은 프리랜서들이, 자기가 대놓고 팔지 못하는 곳에다 팔아 줘야 해. 그러니, 나보고 악이라고? 당신에겐 안됐지만 나는 필요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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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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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브컬처인 오타쿠 문화를 어떻게 보고 이해할 것인지, 그리고 그 오타쿠 문화가 다른 문화들과 얼마나 유사성을 지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타쿠계 문화의 구조에 1970년대 이후의 포스트모던의 본질이 잘 나타나 있으며, 이 동등한 관계성은 양자 모두를 이해하고 결론적으로 60년대 또는 70년대 이후의 문화적 세계를 폭넓게 파악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오타쿠계 문화의 기원은 2차대전 후 5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미국에서 수입된 서브컬처로 시작됩니다. 오타쿠계 문화의 역사란 미국 문화를 어떻게 국산화하느냐 하는 환골탈태의 역사였는데, 이는 일본의 전통이 메이지유신 이후, 2차세계대전 이후 소멸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오타쿠계 문화의 일본에 대한 집착은 전통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통이 소멸한 뒤에 성립한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오타쿠계 문화의 배후에는 패전이라는 심적 외상, 즉 일본이 전통적인 주체성을 결정적으로 잃어버렸다는 잔혹한 사실이 감춰져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미국적인 현실과 잃어버린 일본의 전통은 오타쿠계 문화에서 기묘하게 왜곡된 일본의 이미지, 중학생의 교복을 입고 점성술을 외치며 마법의 지팡이를 든 무녀와 같은 하이브리드적인 상상력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미국산 재료로 만들어진 의사 일본이라는 개념으로 생긴 왜곡된 상상력, 이런 하이브리드적 문화를 일본적인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으면 오타쿠계 작품을 수용할 수 있고 그 조건에 과도하게 동일시하면 오타쿠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오타쿠계의 작품은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며 오타쿠 혐오가 됩니다. 작중 '세이버 마리오네트J'라는 SF코미디에서 나오는 '진짜로 보이는 가짜와 본적 없는 진짜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오타쿠들의 세계관을 아주 잘 우화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가짜(미국화된 일본)를 받아들일 것인가, 또는 본 적 없는 진짜(개항 이전의 일본)을 받아들일 것인가?

오타쿠계 문화의 포스트모던적 특징으로 두가지 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하나는 2차창작의 존재입니다. 이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예견한 문화산업의 미래, 오리지널과 복제의 중간형태인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문화의 작품은 한 사람의 작가에 의해서가 아닌 무수한 모방이나 표절의 연쇄, 그것이 다시 오리지널에 영향을 끼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화의 변화는 오타쿠계 문화에서도 나타나는데 초기 오타쿠 문화인 건담의 경우 건담팬들은 건담의 세계를 정밀조사하고, 연표의 정합성이나 메카닉의 리얼리티를 고집하는 이른바 건담에서의 세계 전체, 데이터베이스를 바라보는 관점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90년대의 에반게리온의 경우 더 작은 이야기들에 주목합니다. 에반게리온 이후는 더욱 작은 요소들로 나뉜 것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요소들끼리 영향을 끼치고 새롭게 조립됩니다. 이른바 모에 요소라는, 데이터베이스의 여러 요소들이 하나의 관점을 결정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오타쿠들의 행동을 특징짓는 허구 중시의 태도입니다. 이런 행동은 오타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라토리엄이나 퇴행으로 여겨지게 되고 논란거리가 되곤 하는데, 실제론 오타쿠가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기보다는 사회적 현실이 부여하는 가치규범과 허구가 부여하는 가치규범 중 어느 쪽이 인간관계에 유효한가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결과입니다. 이 특징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지적한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에 대응하는데, 근대국가의 발달시에 생겨난 '커다란 이야기'란 시스템이 현대에 들어 붕괴했다는 점에서 비롯됩니다. 국가의 전통, 이데올로기, 이성의 이념이라는 큰 이야기의 실추는 오타쿠 문화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오타쿠적인 이야기소비, 허구중시는 소비사회적 냉소주의가 철저화된 형태로서 발달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코제브의 헤겔독해입문에서 전후 미국에서 대두한 소비자의 모습을 동물이라고 부르는데, 이와 같은 강한 표현이 쓰인 것은 헤겔철학의 독특한 인간 규정과 관계가 있습니다. 헤겔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는, 자연과 투쟁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에 반해 동물은 항상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고 있으며, 따라서 소비자의 필요를 그대로 충족시키는 상품에 둘러쌓여 있고 미디어가 요구하는 대로 바뀌어가는 전후 미국의 소비사회는 그의 용어대로라면 인간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동물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굶주림도 투쟁도 없는 대신 철학도 없다고 코제브는 말합니다.

책의 제목처럼, 오타쿠 문화는 동물화하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동물화합니다. 이는 미국식의 소비주의에 대한 답변이기도 합니다. 오타쿠 문화에서 케릭터가 수많은 요소로 분해되고 자신이 원하는 요소만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현대의 사회 또한 그런 요소를 찾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특징만을 골라 아이를 입양할 수도 있고, 집창촌에서 자신이 원하는 부류의 이성을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원한다면 하루만 데이트를 할 수도, 언제든지 원하는 음식만을 골라 먹을수도 있습니다. 소비자의 요구는 세밀히 분화되어 기계적으로 충족되도록 날마다 개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개구리나 매미처럼 콘서트를 열고 새끼동물이 노는 것처럼 놀며 다 자란 짐승이 하는 것처럼 성욕을 발산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 코제브 

포스트모던 이전의 인간은 이야기적 동물입니다. 그들은 인간 고유의 삶의 의미에 대한 갈망을 인간 고유의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있었지만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의미에 대한 갈망을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동물적인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고독하게 채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작은 이야기와 큰 이야기 사이에 연계도 없고, 전체적으로 누구의 삶에도 의미를 주지 않는채 표류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체제 정비나 이성, 생산의 우위로 나타난 커다란 이야기들은 현대에 이르러 커다란 사회규범이 약화되고 사회 전체의 결속이 약해집니다. 이 책은 오타쿠 문화를 통해 우리 문화 전체를, 혹은 우리 문화 전체를 통해 오타쿠 문화를 비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독한 폐쇄성의 사회에도 간혹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문화와 사상이 있고, 오타쿠 문화에서도 작중에 등장하는 YU-NO라는 작품처럼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자유롭게 분석하고 비평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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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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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 공무원 국사 수험서의 첫 장에서 다루는것은 선사시대가 아닌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이런 역사를 보는 관점은 과거의 사실을 강조하는 랑케, 액턴의 관점과 역사가의 입장을 강조하는 크로체, 콜링우드의 입장, 그 두가지를 절충하는 카의 입장 이렇게 3가지가 제시되지만, 그중 중간적인 입장에 있는 이 책의 저자 에드워드 H. 카가 가장 비중있게 다뤄집니다. 20세기 중반에 나온 이 책이 아직도 주목받고 있는것은, 그의 역사인식론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책을 낼 당시 저자가 반론하고자 했던 논리 또한 아직도 존재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사실만을 확인한다는 실증주의, 역사는 특수한 것만 다룬다는 개념, 사람은 역사에서 뭔가를 배울 수 없다는 주장,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공적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 문제, 역사에서 우연적 사건이 의미하는 것, 역사의 객관성, 역사가는 어디까지가 단일한 개인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와 시대의 산물인지에 대한 문제, 역사는 문학인가 혹은 과학인가에 대한 문제와 같은 당시에도 지목되었고, 지금도 지목되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카는 자신의 역사인식론을 펼칩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관계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카의 가장 유명한 문구중 하나인 이 말은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계에 대한 그의 주장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이 주장했던 틀림없는 사실 이라는 마법의 문구는 실증주의자들로 하여금 사실 숭배를 조장합니다. 로크나 러셀의 경험론적 철학이 이런 역사관과 조화를 이루는데, 이런 경험주의의 인식론은 주관과 객관의 완벽한 분리를 전제로 합니다. 역사란 확인된 사실의 집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이 주장은 20세기 초에 들어 반대에 직면하는데,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나 미국의 역사가 칼 베커 등은 역사는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런 두 주장은 역사가 과거에 있느냐, 현재에 있느냐에 대한 논의인데, 카는 한쪽을 다른쪽 위에 올려놓는 것은 불가능하며, 두 논의는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의 없이 산업혁명을 위대하고 진보적인 업적으로서 다룰 것이다. 혁명 도중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은 초기 단계에서 공업화에 따르는 대가로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한 대가를 보고 진보를 중단하고 공업화를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고 주장하는 역사가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농민집단화 문제에 있어서 잔혹성과 무자비를 공업화의 정책에 따른 희생의 불가피한 부분으로서 논한다면, 나쁜 일에 관대하고 냉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 pp.122~123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판단할때는 어느 정도의 해석을 전제로 하며, 역사적 해석은 언제나 도덕적 판단, 가치판단을 포함합니다. 역사서에도 그런 가치판단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역사를 쓰는 역사가 또한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역사가의 지식은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닌,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축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의 저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가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과거의 사건, 제도, 정책에 대해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이런 해석이 중요한 것은 역사가의 판단 자체가 현재의 가치규범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규범 속에서 역사가들은 자신들이 품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인지하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 포이어바흐 

과거의 수많은 사실 가운데서 어떠한 것이 역사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하느냐에 대해 카는 현재의 상황에 교훈을 주고, 미래를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역사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가들은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현재 사회에서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역사적 발견과 주장이 사회의 관심사를 대변할 뿐 아니라 사회의 지적 영향력과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역사는 문학적 탐구가 아닌 과학적 탐구 영역이 되어야 하며 역사 흐름은 다양한 사회 이론과 계량화, 과학 법칙을 통해 현재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지식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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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츠지 -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오오이시 스스무 외 지음, 임희경 옮김 / 지식여행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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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건국훈장 애족장.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한 자,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함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인 이 훈장을 2004년 노무현 정부는 한 일본인에게 수여합니다. 그의 이름은 후세 다츠지. 훈장을 수여하며 나종일 대사는 후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다른 나라 국민을 사랑하는 자야말로 자국민을 사랑할 수 있다. 후세야말로 일본의 애국자다. 이 훈장 수여는 한일 발전을 기원하는 한국민의 맹세다."

1880년에 태어난 후세 다츠지는 법률대학을 거쳐 법관에 등용됩니다. 그는 톨스토이의 휴머니즘에 깊이 심취했고, 일본 내의 노동운동, 무산정당 운동, 수평운동에 관심을 보입니다. 법관이란 자리가 자신의 사상적 토대와 양심의 잣대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달은 후세는 '자기혁명의 고백' 이라는 연설과 함께 법관의 자리에서 물러나 변호사로 직업을 바꿉니다.

후세는 조선청년독립단의 2.8 독립선언과 3.1운동 이후 조선문제에도 관심을 표명했는데, 이는 자신의 소신에 따른 것이였습니다. 3.1운동 이후 후세는 조선으로 건너가 김시열을 필두로 한 의열단원의 변호하고, 김해에서 열린 백정 철폐 운동인 형평사 창립기념 행사에 참여하고, 조선인 유학생 사상단체인 북성회가 개최한 하계 순회강연의 변사를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그런 후세의 활동에 조선에서는 그가 조선에 올때마다 열렬한 환대로 그를 맞이합니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침략을 비난해 당국의 감시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광복 이후엔 독립투사 박열과 함께 조선독립헌법초안을 작성했고, 일본에서 재일조선인과 관련된 사건의 변호는 거의 후세가 담당할 정도로 철저한 약자를 위한 변호사가 됩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정직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이것은 양심의 목소리다. 나는 그 목소리에 따라 엄숙하게 자기혁명을 선언한다. 이제부터는 사회 운동의 일개 병사로서의 변호사로서 살아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 중요한 활동의 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 

후세는 조선에서의 활동 뿐만 아니라 대만, 일본에서도 여러 활동을 합니다. 대만의 농민운동에 자극을 준 니링 사건 변호하기 위해 대만에 머무르기도 했고, 3.15라고 불리우는 일본의 치안유지법 사건 변호합니다. 검찰청은 3.15 사건 오사카 법정에서의 변호활동을 이유로 후세를 징계하고, 제명 처분합니다. 1933년엔 신문지법 위반으로 3개월 실형을 받고 옥중생활 경험하기도 했으며 일본노농변호사단 치안유지법 사건에서 체포,기소되기도 합니다. 치안유지법은 거의 조선인 단속법으로, 일본인으로서 실형판결을 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변호사 활동 재개해 조선인들의 아키타 주세법 위반 사건을 변호하는 등 수많은 활약을 합니다.

나는 프랑스를 배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식민주의를 무찌르기 위해 싸웠고 앞으로도 계속 싸울 것이다. 나는 여느 알제리 사람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졌다. 알제리인들에게 나는 동맹자가 아니라 형제, 다른 이들과 같은 단순한 형제였다. -《알제리 혁명5년》

민족주의의 광기가 몰아치던 2차대전 시기에도 국적을 초월해 자신의 신념을 지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른 이들이 애써 외면한 길, 거칠고 힘든 길을 택했고 많은 경우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후세도 그 중 한명이였습니다. 조선인 지원활동으로 변호사 자격을 세번이나 박탈당하고 두차례 투옥됬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념을 지키는 모습은 현대에 하나의 귀감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빛나는 투쟁은 잔인한 전쟁사 속에서 작지만 하나의 희망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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