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리스 그리폰 북스 7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6년 6월
평점 :
절판


이 영화 시나리오는 내게 불쾌한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긴 프롤로그에서, 영화는 크리스의 가족을 소개하고 그의 노모에게 과도한 비중을 둔다. 노모는 가족의 유대를 상징할 뿐 아니라 조국, 대지를 상징하고, 이것은 러시아의 민속 문화에서 강력한 함의를 지닌다. 나로 말하자면, 크리스의 가족 관계는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영화에서도 문제시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랜 논의 끝에 나는 어렵사리 크리스의 가족 이야기를 대부분 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내 소설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고향, 달콤한 지구'와 '차가운 우주'의 이미지가 대비되는 '인식의 드라마'가 형상화되길 기대하고 있었다. 우주 정거장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솔라리스의 바다에서 만들어져, 행성의 광활하고 열린 공간과 작고 폐쇄된 우주 정거장 간의 적대감을 상징하는 드라마 말이다. 안타깝게도 타르코프스키는 한쪽 편을 들어 '차가운 우주'에 대비해 '따뜻한 고향 지구'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지구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인간의 마인드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해한 문제와 씨름하는 인식의 드라마 대신 타르코프스키는 인식의 문제와 그 한계와는 무관한, '대단히 탁월한' 도덕극을 만들어 냈다. - 나리만 스카코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3장 솔라리스의 환상, 125쪽, 1979년 'The Profession of Science Fiction'지 스타니스와프 렘 인터뷰 인용 -

 

 

솔라리스 행성에 파견된 심리학자 크리스와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에 의해 그의 과거 기억에서 복제된 죽은 아내 하리의 모사체. 솔라리스 행성 표면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스스로 사고하며 대기권의 생물체 뇌파로부터 잠재의식을 받아들여 그 기억 속 존재를 물질화하는 하나의 유기체라 할 수 있다. 하리는 점차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토로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뇌하는 실체로 묘사된다.

 

 

공상과학소설 [솔라리스(1961)]의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렘이 자기 작품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 각색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솔라리스(1972)]에 진저리를 쳤다는 사건은 영화광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일화다. 원작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관점은 왜곡과 일탈, 예술적 변형, 창조적 파괴라 할 만큼 소설의 의미론적 방향성을 완전히 틀어 버렸다. 원작소설의 정신은 세간에 회자되는 '이해할 수도 친해질 수도 없는 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니, 다만 인간이 보이는 모든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 뿐.'이라는 '솔라리스 잠언'에 드러나 있다. 스타니스와프 렘 자신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작품 취지로 들었다. 소설 속에서 솔라리스의 우주정류장에 유배된 학자들은 전혀 지구를 고향으로 여기지 않는다.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에서 자신을 잃어 버린 채 헤매고 다니는 개인에게 지구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낯설고 황량한 곳이며 솔라리스라는 행성, 그 미지의 적대적인 공간이 되려 지향, 도약으로까지 비춰진다. 허나 행성을 관찰하며 환원하고 과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던 솔라리스트들의 시도는 헛된 노력이 되며 냉철하고 이지적인 인간의 정신은 끝내 외계 행성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와의 접촉에 성공하지 못한다.

 

반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이 명대사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은 부질없다. 우리에게 우주 정복의 야망 따윈 없다. 지구의 영역을 우주로 확대할 뿐이다. 더 이상의 세계는 필요 없다.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에겐 인간이 필요할 뿐이다.' 소설이 지구와 행성 솔라리스를 분리한 선형적인 세계라면 영화는 지구와 솔라리스 사이에 상호 침투, 합성이 반복되는 비선형의 세계다. 타르코프스키는 우주와 외계행성이 주요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반에 지구의 중력, 인간 존재의 무게를 싣는다. 지구는 인간에게 아늑한 고향이며 미지의 행성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음에도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지구를 향한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솔라리스트들의 괴로운 기억을 복제하길 멈추고 마침내 지구를 복제하기 시작한다. 크리스는 솔라리스의 바다가 보내온, 아니 실은 스스로의 기억과 자의식의 투영이자 죄책감과 양심의 일부인, 자신 때문에 자살했던 아내 하리 앞에 참회하고 화해에 이르며 솔라리스가 복제한 지구의 고향집에서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그 품에 안긴다.

 

결코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자신이 인간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 사실을 수긍하면서 오히려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는 기억과 환상을 매개로 주인공 크리스 내면의 영역으로 옮겨진다. 영화 속 솔라리스의 바다가 지구의 대륙과 섬을 복제하기 시작하는 장면은 외형적인 접촉 불가능성이 내면적인 접촉의 실현 가능성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환원적인 이성에 국한될 때 타자와의 접촉 및 이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던 인간의 인간중심적인 입장과 사고가 사랑의 가치를 긍정하고 휴머니티의 한계를 자성하면서 타자를 끌어 안을 수 있는 일말의 여지를 남긴다. 그 가부, 시시비비와 별도로 타르코프스키는 영화 [솔라리스]를 통해서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공상과학영화라는 장르마저 인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솔라리스]가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사회주의의 대답 내지 대응이라고 회자되던 시절이 있었고 실제 작품을 본 식자들은 보란 듯이 그 평을 폐기 처분했었다. 허나 돌이켜 보건대 그게 사실 전혀 근거없는 평가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친구 그의 아내 - 아웃 케이스 없음
박희순 외, 신동일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세 인물의 욕망과 관계를 살피면서 우리 사회를 유비한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도식적인 만큼 통렬한 영화다. 임신 중인 아내를 둔 신혼 친구에게 아들을 낳으면 민혁(민중혁명 약자)으로, 딸을 낳으면 예니(맑스의 아내)로 이름을 지으라는 사내가 있다. 군대에서 동갑내기 고참과 후임으로 철학 에세이 책을 주고 받던 예준(장현성 扮)과 재문(박희순 扮)은 사회에 나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고졸 출신 요리사 재문은 예준을 동경하며 그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 운동권 출신으로 고도자본의 첨병 역할을 자처, 남들 보기에 버젓한 외환딜러로 살아가는 예준에겐 노동 계급의 재문과 친구라는 사실이 삼팔육 세대 지식인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동시에 속된 우월감과 허영심을 채워주기도 한다.


물론 두 친구 간에 인간적으로 순수한 감정 교류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구조 속에서 계급 차이는 늘 정신적 유대를 압박하고 구축한다. 예컨대, 자신을 쉐프(chef)라고 하는 재문에게 예준이 분명히 못박는 장면이 있다. 넌 쿡(cook)이라고. 영화 내내 유물론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카메라는 극중 인물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무의식 중 관계 깊숙히 도사리고 있는 계급적 균열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는다.


두 친구 사이에 재문의 아내 지숙(홍소희 扮)이 있다.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으나 말 그대로 '결혼'은 '생활'이었고, 남편 친구 예준의 경제적 도움이 싫진 않지만 늘 그에게 맹목적일 만큼 예속적인 남편이 마뜩잖다. 남편은 쉐프가 되기 위해 미국 이민을 알아보던 중 사기를 당하고, 미용실 운영에 출산과 육아까지 전담하다시피 하면서 그녀는 점점 지쳐 간다. 자기계발 겸 기분 전환 삼아 파리 미용박람회에 다녀오기 위해 지숙이 집을 비운 사이, 재문과 예준이 간만에 만나 회포를 풀던 중 너무도 끔찍한 비운의 사고가 터진다. 그 우발적인 사건은 이미 세 사람 관계 속에 내재해 있던 위선과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그들 모두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파국으로 내몬다.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역학으로 우리 일상 속에 스민 자본과 계급,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과 죄의식까지 파고드는 영화의 통찰이 무겁고도 예리하다.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는 사상누각처럼 보이는 사람들 관계망이지만 자본으로 엉켜 그 밑바닥을 이루는 구조의 지반은 강성하고 견고하여 좀체로 깨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 지옥 같은 몇 년을 뒤로 하고 다시 가정을 이뤄 외진 곳에서 새출발한 재문과 지숙에게 편지 한 통이 날아든다. '수신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자본은, 구조는, 그렇게 망각 속에서도 끊임없이 개인을 소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 시간과 공간의 미로
나리만 스카코브 지음, 이시은 옮김 / B612 / 2012년 11월
평점 :
일시품절


지금껏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 세계를 연구한 책들은 역사상 지명도 높은 사상가들의 이론과 타르코프스키 영화 간의 연결고리 찾기에 급급했다. 즉, 기존의 타르코프스키 해설서들이 플라톤주의와 러시아 정교,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하이데거의 양심과 프루스트의 회상, 라캉과 데리다의 사유를 끌어다 놓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단정적인 끼워 맞추기 진술을 일삼았다면, 나리만 스카코브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시간과 공간의 미로]는 어디까지나 그러한 사상들을 인식의 프레임, 필터 내지 매개 이상으로 삼지 않고 투명하게 작품 자체에 천착한 이해가능성과 직접적인 체험성 측면의 논의를 펼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영화' 관련 서적으로서 당연히 갖췄어야 할, 허나 지금껏 보기 드물었던 미덕이고 강점이란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자이너 문화사 - 교양과 문화로 읽는 여성 성기의 모든 것
옐토 드렌스 지음, 김명남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일 년에 한두 번 술잔 기울이는 정도지만 대학 때부터 그나마 마음 터놓고 지내는 절친 넷이 있다. 그들과의 신년 술자리 모임에서 오간 얘기다. 학생 때부터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고 저마다 다른 교감이 오갔다는 회계사 A는 여기서 자기만큼 여자에 대해 잘 아는 남자는 없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와이프가 산부인과 의사라서 본인도 거의 준의사 급으로 생리학적 측면에도 훤하다며. 졸업하고 취업하자마자 고교 때부터의 여친과 결혼, 누구보다 빨리 가정을 이룬 B는 늘상 A를 비웃는다. 니 방위 나왔재. 현역과 방위의 차이가 기간 차가 아닌기라. 내무반 생활을 해봤느냐 안 해봤느냐 그기라. 여자도 마찬가진기라. 떡 많이 쳐봤다고 여잘 알아? 실제 생활 속에서 오래 부대끼며 알아 가는기라...

졸업장에만 경제학 전공이라 적혀있지 거의 인문·사회 타과 수업을 전공 삼았던 C가 끼어든다. 이런 무식한 형이하학 종자들이. 니들이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인류 지적 유산들 탐독하며 시계열로 횡단면으로 여성성에 대해 누벼 봤어? 옆에서 잠자코 안주만 축내던 우리 학번 홍일점 D여사가 그간 오가던 대화를 일축한다. 이것들이 진짜. 개한민국 수컷 문화에 찌든 아색히들이 여성을 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야? C가 살짝 뒤집기를 시도한다. 세상사는 되려 외부자에게 더 선명하게 보이는 부분들이 많지. 그에 D의 굳히기 한판. 학교 다닐 때 나보다 분개(分介)도 못했던 것들이. 다 찌그러졋! (재밌는 게, C와 D는 CC였고 지금은 부부다.)

글쎄. 어느 쪽이 진실일까. 아니, 누가 그나마 덜한 구라일까. 이 책을 읽어 보면 막연히나마 판이 짜일지도. 중반까지 생물학 내지 해부학 기조에 가까워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그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부터는 쓱쓱 잘 읽히니 궁금하실 분들껜 일독을 권할만 한 책이다.

 

P.S.1. 원제는 'The Origin of the World'인데 굳이 '교양과 문화로 읽는 여성 성기의 모든 것'이란 선정적인 부제까지 필요했을까. 부당하게 금시시되어 온 여성의 기관과 욕망에 대한 백과사전식·문화인류적 기록이고 논의라는 측면에서 전혀 없는 얘긴 아니다만 '이타적 유전자' 이후 가장 의뭉스런 작명. (여성의 질을 공공연히 입에 올리는 것에 대하여 여전히 꺼려하는 내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생각일지도)

 

P.S.2. '어떤 남성들, 특히 동성애자들은 두 종류의 절정을 안다고 한다. 음경 자극을 통한 일반적인 것 외에 항문을 통해 전립선을 마사지해서 오르가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음경 자극과는 아주 다른 감각이라고 한다. ([버자이너 문화사], '또 다른 오르가슴', 87쪽)' 인간의 동성애,라는 것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측면이다.

 

P.S.3. 페미니스트들 경우 기존의 성과학은 오르가슴이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다고 지적한다. 달리 말해 성 체험에 자연스런 하나의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미리 깔고 있다는 비판이다. 실제로는 엄청난 다양성·파상성이 존재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11-2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성 섹스 경우 전립선을 통한 오르가슴이 최고라고 합니다. 여기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고 하네요.

풀무 2014-11-27 15:38   좋아요 0 | URL
악! 역시 곰발님은 이미 알고 계셨구나요!
참.. 그러니까 이게 성정체성과는 또 관련없이 오직 그 자극을 얻기 위해 동성애를 벌이는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네요.
그나저나 어떡하죠! 이 아주 다른 감각이란 거 너무 궁금해졌음요! (읭???????)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8 18:38   좋아요 0 | URL
궁금하면 해결책은 하나입니다. 직접 경험을.. ㅋㅋㅋㅋㅋㅋㅋ

풀무 2014-12-28 23:48   좋아요 0 | URL
음. 그냥 손가락이나 기구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당.. (하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 (2disc)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알렉산드르 카이다노프스키 외 출연 / 영화인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미지의 운석이 떨어진 이후 방문하는 사람의 소원을 이뤄준다고 알려져 있는 금지구역 내 비밀의 방. 국가에서는 그곳을 폐쇄하고, 소원을 성취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대가를 받고 그 금단의 장소로 안내해 주는 자를 '스토커'라고 일컫는다. 스토커와 시인, 과학자는 나름의 소명과 목적의식으로 비밀의 방에 접근하는데, 서로 가치관의 충돌로 갈등하는 과정에서 자신 내부의 심연과 대면하는 사색의 여정을 거치게 된다.


주인공들의 대화를 통해서 이전에 잠입자 역할을 하던 선대 스토커의 일화가 소개된다. 그는 금지구역 비밀의 방에서 죽은 형제를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었으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간절했다고 하나 자신의 내면 깊숙히 자리한 욕망은 사실 동생이 살아나기를 진정으로 바라지 않았다는 것. 혹은 금지구역 비밀의 방이라는 실체가 꾸며진 허구이며 사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 결국 그 스토커는 자살했다고 한다.


기나긴 우회와 심리적 방황 뒤에 그들은 비밀의 방에 도달한다. 교수는 누군가에 의해 악용될 수 있는 그 방을 파괴하는 목적을 드러내나 이내 조립하던 폭탄을 물에 던져 버린다. 무엇을 그토록 추구했는지, 무엇을 진정으로 갈망하는지 모른 채 혼란 속에서 그들은 금단의 방에 들어서기를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솔라리스>와 마찬가지로 원작이 따로 있으며 표면적으로 SF적인 설정을 빌리지만, 타르코프스키 영화답게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심오하고 다의적인 성찰로 확장된 작품이다. 삶의 본질은 무엇이며 인생에 있어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한다. 금지구역 내 비밀의 방으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은 인간이 헤쳐나가야 할 실존적 삶의 과정이다. 비밀의 방 자체는 궁극적인 진리 혹은 구원일 수도 있고 구전으로 진화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부재(不在)하는 신(神)에 대한 메타포일 수도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관념적 영화일 수도 있고 구체적으로 인류 보편적 주제들을 탐구하는 영화일 수도 있다.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신비주의적 분위기에 매료되어 피상적인 사변으로 그칠지, 가변적인 삼라만상 속에서 치열하게 요동치는 인간 내면과 마주하게 될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영화의 마지막, 진실을 외면하고 존엄성을 상실한 채 구원받지 못하는 타인들에 대해 괴로워하며 스토커는 가족의 품에서 미완의 안식을 얻는다. 아내는 카메라를 직시하며 스토커와 결혼하기 전에 그의 원죄와 불행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하는 삶이 좋았기에 내린 선택이었노라고 독백한다. 딸은 표도르 츄세프의 욕망에 관련된 시를 읊으며 탁자 위의 컵과 접시들을 응시하고 물건들은 염력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실존의 원형 속에 인생유전은 면면히 이어져 갈 것이다.  (2006년 가을에 남긴 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