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 여름날
멀리까지 가서 자두를 한 상자 사왔다
자두 사러 나선 길은 아니었지만
겸해 돌아오는 길에
자두 한 상자를 손에 넣고 두둑해진 날

수줍은 듯 시설도 하얗게 낀 붉은 자두를
오천원 만원 하면서 골라 담지 않고 상자째 사서 왔다
제 주먹만한 자두를 보고 침은 이미 한 컵씩 삼킨 아이들이
당장이라도 먹고 싶어 매달려 찔러보는 걸
집에 가서 먹자고 매운 말로 다그치며 돌아왔는데

다음날 씻어 먹이려 열어 본 자두는
반 이상은 썩고 그나마도 다 물러있었다

살면서 누구든 이런 날이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썩은 과일을 정성스레 모셔오는 날이
죽은 사람을 산사람인양 업고 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썩은 자두의 그 한없는 단내를 맡으며
집은 과일마다 썩은 과일이었는데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타박을 받던 마음 생각이 났다 


- 이현승, [모든 시] 2018년 가을호, '김종삼 생각' -


평과나무 소독이 있어
모기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어느 날이 되었다

며칠 만에 한 번만이라도 어진
말솜씨였던 그인데
오늘은 몇 년째나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는 길을 기어이 가리켜주고야 마는 것이다

아직 이쪽에는 열리지 않은 과수밭
사이인
수무나무 가시 울타리
길줄기를 벗어나
그이가 말한 대로 얼만가를 더 갔다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식물이 풍기어오는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 쪽을 향하여 갔다

안쪽과 주위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무변하였다
안쪽 흙 바닥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깔의 과실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째를 집어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당신 아닌 사람이 잡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 김종삼, [북 치는 소년], '원정'(園丁) - 


낭독회 자리에서 이현승 시인이
김종삼 시인의 '원정'을 읽을 때
그렇게 목이 메었다고 한다.
원정(園丁)은 정원이나 과수원을 관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호(號)이기도 했다.


싱그러운 거목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 김종삼, [북 치는 소년], '풍경' -


몇 그루의 소나무가
얕이한 언덕엔
배가 다니지 않는 바다
구름 바다가 언제나 내다보였다

나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줄여야만 하는 생각들이 다가오는 대낮이 되었다.
어제의 나를 만나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골짜구니 대학 건물은
귀가 먼 늙은 석전은
언제 보아도 말이 없었다

어느 위치엔
누가 그린지 모를
풍경의 배음이 있으므로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 김종삼, [북 치는 소년] '배음'(背音) -


그러고 보면 북 치는 소년이 곧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
김종삼 시인이 참으로 아끼던 시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