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포털 사이트에 '하루 5분 연구소'라는 곳에서 선정한 '최고의 소설 도입부 탑 10'이 소개됐었다. 어떤 기준으로 선정된 건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소설 자체가 좋아야 첫 문장도 그만큼 빛을 발하는 것 같다.

 

10위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최고의 시대이며, 최악의 시대였다.
10위 - 호메로스, [일리아드], 분노를 노래하소서, 시의 여신이여.
9위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9위 - 김훈, [칼의 노래],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8위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한 모양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불행의 이유가 다르다.
7위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이다.
6위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5위 - 이상, [날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4위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재산깨나 있는 독신남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
3위 -  알베르 카뮈, [이방인],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2위 - 허먼 멜빌, [모비딕], 나를 이스마엘이라 부르라.
1위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내 경우, 8위에 선정된 톨스토이 작품 중엔 호흡이 다소 길지만 [부활] 첫 문장이 좋다.

 

몇십만이나 되는 인간이 어느 조그마한 장소에 모여 엎치락뒤치락하며 자기네 땅을 보기 흉하게 만들려고 제아무리 애를 써보았자, 또 땅바닥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제아무리 돌을 깔아보았자, 그 틈바구니에서 싹터 나오는 풀을 말끔하게 뽑아보았자, 석탄이나 석유의 연기로 아무리 그을려보았자, 또 나뭇가지를 자르고 새나 짐승을 죄다 쫓아보았자 - 도회지 안에서의 봄도 역시 봄은 봄인 것이다.

 

한국소설에선 최인훈의 [광장]. 내겐 [설국] 이상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남겼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외국소설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던 걸로 아는데, 여기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김욱동 번역본으로 옮겨 놓는다.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 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한 편 더 꼽자면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

 

오래도록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의 광경을 보았노라고 우겼다. 그 말을 꺼낼 때마다 어른들은 웃었고, 나중에는 얘가 나를 놀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지 이 창백하고 어린애답지 않은 아이의 얼굴을 가벼운 미움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가면의 고백] 펼친 김에 도입부 인용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3부 3장 치열한 마음의 참회(시) 중에서.

 

아름다움 - 아름다움이라는 놈은 무섭고 끔찍한 것이야! 일정한 잣대로는 정할 수가 없거든. 그래서 무서운 거야. 왜 그런지 신께서는 인간에게 자꾸 수수께끼만 던져주신다니까. 아름다움 속에서는 양쪽 강 언덕이 하나로 만나고 모든 모순이 함께 살고 있어. 나는 교육이라고는 전혀 못 받았지만, 이건 꽤 연구를 많이 해서 생각해낸 거야. 실로 신비는 무한하다니까! 이 지구상에는 어지간히도 많은 수수께끼가 인간을 괴롭히고 있어. 이 수수께끼가 풀린다면, 그건 젖지 않고 물속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일이지. 아, 아름다움이라고! 게다가 내가 도저히 참을 수없는 건 아름다운 마음과 뛰어난 이성을 가진 훌륭한 인간까지도 왕왕 성모(마돈나)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 출발하였으나 결국 악행(소돔)의 이상으로 끝난다는 거야. 아니, 아직도 한참 더 무서운 게 있지. 즉 악행의 이상을 마음에 품은 인간이 동시에 성모의 이상 또한 부정하지 않고 마치 순결한 청년 시절처럼 저 밑바닥에서 아름다운 이상의 동경을 마음속에 불태우고 있는 거야. 야아, 실로 인간의 마음은 광대해. 지나치게 광대할 정도지.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걸 좀 줄여보고 싶다니까. 에이, 제기랄.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네. 정말! 이성의 눈에는 오욕으로 보이는 것이 감정의 눈에는 훌륭한 아름다움으로 보이니 말이야. 애초에 악행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건가? ... 그나저나 인간이라는 건 자신이 찔리는 것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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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1 09: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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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1 2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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