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내가 달리기를 하며 배운 것들 - 인내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삶에 대하여
안철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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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이야기한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주인공은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난다. 이탈리에서는 먹는 것에 집중하고, 인도에서는 뜨겁게 기도하고, 발리에서는 자유롭게 사랑하는 삶을 살고는 전에 없던 행복을 발견한다. 이 모든 과정이 마라톤에도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다. 123쪽


안철수. 그의 직업이 몇 개 인지 헤아려보아도 놀랍지만 거쳐온 이력을 보면 더욱 놀랍다. 마지막 그의 직업은 의원이었으나 이에 대한 부분은 굳이 이 리뷰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싶다. 한때였지만 20~30대 청년중 그를 존경하지 않았던 이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열심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숨은 의도가 보이지 않았던 그가 선택한 것은 다름아닌 마라톤이었다. 달린다는 것 자체에 기쁨을 느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별별 생각이 다들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한계에 다다르면 그때부터는 고통과 희열이 종이 한장 차이라는 사실을. 뮌헨에서 달리기를 통해 저자가 느낀 것도 위의 발췌문처럼 이와 같은 행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작정 달리는 것에만 머물지 않았다. 저자는 왜 달리는가, 자신에게 있어 달리기는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고 한다. 참고 견디는 것을 포함한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3년 전부터 달리기의 맛을 알게된 나역시도 왜 달리기인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유년시절 땅 혹은 하늘만 보고 다니느라 자주 넘어지는 아이였다. 초등학교에 입학 한 후 수업시간에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걷는 것 만큼 달리는 것에 흥미를 느껴 육상부로 활동을 해볼까 고민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던것이 스무 살 이후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로부터 흥미와 재미를 느끼면서 달리기에서 멀어지다가 회복을 위한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다시금 달리기의 맛을 알게 된것이다.



누군가는 달리기를 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거나 명상처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고 한다. 실제로 달리기를 해보니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그저 내 심장이 지금 쿵쾅쿵쾅 뛰고 있고, 내가 이 순간을 충실히 살고 있다는 느낌만 든다. 167쪽


회복을 위한 달리기 만큼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달리기가 있을까. 단순히 신체적인 회복을 떠나 정신도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그때부터 나는 '생존'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열심히 달렸다. 사실 저자 이전에 내게 마라톤을 향한 유혹의 손을 내민것은 하루키였다. 정해진 시간에 거의 매일에 가깝게 달리는 하루키에게 달린다는 것은 글을 쓰는 것 만큼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바꿔말하면 하루키에게는 숨쉬는것과 같은 의미, 결국 그에게도 달린다는 것은 '생존'아니었을까. 그 의미가 무엇이었든 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순박함이 느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안철수와 마찬가지로 누구라도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다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이전에는 알지못했던 것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마치 안철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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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일 때도 괜찮은 사람
권미선 지음 / 허밍버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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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라는 한 마디 말이 간절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그말을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만 들어야 그 힘이 발휘되는 줄 알던 때 였다. 지금은 조금만 벅차거나 다리에 힘이 빠질 때면 더 기다리지 않고 말해준다. 내가 나에게. 책<혼자일 때도 괜찮은 사람>의 저자도 그랬다고 했다.

아무것도 위안이 되지 않던 그때
‘너는 괜찮아질 거야’ 가만히 말을 건네준 건
힘든 시간을 견디던 그 어느 때의 나였다.
-prologue 중에서-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 있게 된다는 건 혼자인 시간이 더는 견뎌야 하는 시간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 해야 견딜 수 있을까 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방법의 차이일 뿐 나도 나름의 방식으로 잘도 견뎌냈구나 하는 작은 칭찬과 나눔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되고 싶지도 않다.
부족한 게 많아도 나는 그냥 나인 채로 살고 싶다.
21쪽

사실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부터가 대부분의 비참함과 고통속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그만큼 어려운 방법이란 걸 잘안다. 저자의 말처럼 타인을 향한 끝없는 질투와 부러움은 자아를 가난하게 만들고 병들게 한다. 자기계발서를 읽을수록 자아존중감이 더 낮아지는 사람들이라면 이부분을 살펴보아야 한다. 더 나은 내가 되길 바라는것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는 것은 다른 의미다. 20대를 지나 30대까지도 이런 이유로 많이 힘들었다. 혼자인 시간이 그래서 더 외로웠다. 혼자인 시간은 무조건 함께인 시간을 위해 나에게 가혹해질 수 밖에 없기에 조금씩 피하게 되어버렸다. 어릴 때는 늘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상의 나와 비교하며 살았던 것이다. 비단 저자 뿐 아니라 고전을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단명한 천재 예술인들의 삶을 동경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을거라며 발을 빼기도 한다. 마치 그 어린시절부터 도망칠 준비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게되는 공감가는 내용 중 하나가 체온이 1도 올라가면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추운 밤 따뜻한 방에 들어갈 때면 차갑게 얼어붙어 금새라도 쪼개질 것 같던 모든 것들이 차분해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씩 나쁜날들 속에서도 잠시 숨 쉴틈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속상한 일이 있었던 어제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생각, 그래서 온전히 위로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오늘 더 우울해진다. 106쪽

혼자서 잘 지내다가도 누군가의 위로에 익숙해지거나 위로받고 싶은 대상이 생기게 되면 이내 마음이 약해지고 작아진 나를 발견한다. 좋았던 때는 다 잊어버리고 지금의 나를 안아주지않는 그가 야속해진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혼자서도 잘 지내는 것이 타인의 위로가 필요없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혼자서만 잘지내는 것이 아니라 ‘혼자일 때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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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알비 문학 시리즈 3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지음, 김대영 그림, 문유림 옮김 / 알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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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 샤를 보들레르 /알비

 


 

시화집은 언제 만나도 반갑고 좋은 구성이기에 일러스트레이터가 누구냐에 따라 동일한 작가의 작품일지라도 여러 권 소장하고 싶기 마련이다. 이번에 만나게 된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귀여우면서 묘하게 심난한 기운을 내뿜는 고양이가 그려져있다. 좀 더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김대영작가로 고양이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사진과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작가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귀여우면서도 심난한 기운을 내뿜은 까닭도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살아가는 것은 마냥 기쁘기만 한일도 그렇다고 괴롭기만 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보들레르는 다음의 내용으로 시에 담아냈다.


희미한 삶을 짓누르는 권태와

막막한 슬픔은 뒤로 하고,


강한 날개로 빛나고 청명한 들판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자 행복하여라.


- 상승 중에서, 27쪽-


<뚜껑>이란 작품의 내용은 하늘아래 그 어떤 인간일지라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예측하지 못함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함께 실린 그림은 벽뒤에 숨어 고개를 내민 고양이의 모습이었다.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뒤돌아 모르는 척, 태연 혹은 초연한 척 할 수 없는 상황이 그대로 전달된다. 작품 내용 중에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희망이,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두려움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크게 와닿기도 하다. 두려움뿐 아니라 광적인 희망도 때로는 죽음과 맞닿아 있음을 알기에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책 표지가 된 그림은 <빨간 머리의 거지 소녀에게>와 함께 실린 그림으로 죽음과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주변사람들과 인간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을 보다 실제적으로 느끼게 된 시인의 상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마치 군데 군데 붉게 표시된 고양이의살짝 위를 향한 시선이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더한다.


작가가 되길 희망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그럴 수 없었던 초년과 말년까지도 그다지 순탄치 않았던 보들레르의 삶은 마냥 희망적이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암울하지도 않은 선을 잘 드러낸다. 한 작품이 마무리 될 즈음에는 고양이 일러스트와 함께 짧은 코멘트가 이어지는 구성으로 시를 통해 보들레르가 바라본 삶과 죽음을 한 번 느끼고 그림을 통해 다시금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지막으로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짧은 메세지를 통해 정리하게 된다. 서문에도 밝힌 것처럼 같은 내용일지라도 추려놓은 작품의 수와 내용이 다르고 또 함께 실린 그림에 따라 같은 작품이라도 시의 분위기가 사뭇달라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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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세 시대가 온다 - 실리콘밸리의 사상 초유 인체 혁명 프로젝트
토마스 슐츠 지음, 강영옥 옮김 / 리더스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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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세 시대가 온다 / 토마스 슐츠 /리더스북

 

지난 여름, AI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구글에서 진행중인 생명연장 관련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되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의학분야에서 양질의 데이터를 수집 및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AI가 다른 분야보다 훨씬 더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좀 더 집약적으로 저자가 현재 활동중인 연구진들과 관련인들을 10년간 150건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한 만큼  내용이 바론 책<200세 시대가 온다>에 담겨져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전문가, 연구자, 학자들은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인류가 기술화되고, 데이터에 기초한 디지털 헬스케어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질병 진단, 치료, 처방의 영역에서 더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8쪽


100세 시대라는 말을 넘어 이제는 120세 시대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 현재, 200세 시대가 무리라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문제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만 멈추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내용들을 개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면 책의 내용처럼 그동안 치료할 수 없었던 질병을 치료할 수 있고 예방이 가능해진다는 것은 현재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에게는 그 어떤 기술보다 따뜻하고 희망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디지털화된 의학정보가 긍정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데이터화 된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공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완벽하게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정보가 오용되거나 불법적으로 사용되어진다면 영화나 소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한 여지가 다분하다. 심지어 과거에 성별에 따라 출산여부를 결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전자 관련 기술의 발달로 우열을 예측할 수 있다면 앞서 언급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더불어 이런 기술과 혜택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부분을 고려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이런 기술은 한마디로 유한한 삶이라는 그나마의 위안조차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시간을 사고 팔 수 있다는 SF영화속에 등장하는 내용들이 떠올라 기술발전 내용에 희망을 품었다가 이내 결국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의 여부가 불투명해 진다는 것에 우울해질 수 있다.


현재 의학은 기하급수적 속도와 수준으로 발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계층 간의 격차도 그만큼 벌어지고 있다. 경제적 여건이 되는 사보험 가입자들은 건강 센서를 착용하고 정기적으로 마이크로비옴 분석과 줄기세포 검사를 받는다. 그래서 이들은 병에 잘 걸리지 않고 암에 걸려도 유전자치료로 생명을 유지할 것이다. 반면 데이터 의학의 혜택을 누리거나 사보험에 가입할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 환자는 구시대의 의료 서비스만 받을 수 있다. 디지털 의학의 발달에 따른 계층 양분화 현상에 대한 논의는 점점 격렬한 양상을 띨 것이다. 가난하면 일찍 죽는다는 극단적 주장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326쪽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과거 대부분의 기술이 개발되고 상용화되기까지 우려와 기대는 늘 있어왔으며 부정적인 측면보다 생명연장기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혜택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다른 것도 아닌 생명과 관련된 부분인만큼 저자가 마지막장에서 말한 당면한 과제들과 윤리적인 대책이 잘 마련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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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손을 보다
구보 미스미 지음, 김현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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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손을 보다 / 구보 미스미 지음, 김현희 역/ 은행나무


구보 미스미의 <가만히 손을 보다>는 직업이 요양보호사인 히나,가이토, 하타나카 그리고 히나가 사랑하는 미야자와 이렇게 네 사람의 이야기다. 자신을 길러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빈자리를 채워준 가이토와 잠시 사귀였지만 역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헤어지고 난 후 요양보호사 교육원 인터뷰를 통해 만나게 된 미야자와와 희망이 없는 관계를 가지게 된 히나의 이야기, 이런 히나를 사랑하면서 괴롭히고, 또 그로인해 다시금 그녀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가이토의 이야기 등 네 남녀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이들의 직업을 요양보호사로 설정한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평소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요양보호사의 이미지도 떠올려본다. 책에서는 이들이 요양보호사가 된 배경이 등장하는데 히나는 부모가 돌아가신 후 자신을 길러준 할아버지를 케어하기 위해 요양보호사가 되었고 자신의 직업을 바라보는 것 역시 죽음과 함께 사는 우울하고 어두운 사람이 아니라 그 길에 잠시 머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 직업은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며 거두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까지 이르는 시간 동안 옆에 살짝 다가서서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185쪽


반면 가이토와 하타나카는 일은 고되고 힘들지만 특별한 자격이나 부담스런 비용없이 취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직업을 선택한 배경이 그러하듯 이들의 사랑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내 친구 였는지 아니면 친척 아주머니였는지 잊어버렸지만, 매일 남자들과 노는 것 말고는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던 내게 "요양보호사가 되면 평새 먹고살 수 있어"라고 말해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108쪽

할아버지 역시 조건없이 홀로 남겨진 손녀를 돌봐준 것처럼 히나 역시 그저 자신의 마음이 가는, 사랑한다는 그 한 이유로 아내가 있는 미야자와를 사랑한다. 자신을 돌봐주는 가이토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은 있지만 사랑이 아니었기에 붙잡아둘수도 붙잡힐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이토는 생활고로 자살을 시도한 아버지가 그늘이 되어 자리잡았다. 아버지로부터 받고 싶었던 안정과 무한한 사랑은 히나를 향하지만 마치 끊어낼 수 없는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처럼 히나에게서 벗어나질 못한다. 이런 가이토를 만나는 하타나카의 상황은 모성애가 당연한 것이 아니듯 한 사람에게만 안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여러명의 남자를 동시에 만나기도 하지만 그 누군가를 오래도록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미야자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랑을 하고 마음을 여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찾아온 히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된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이들의 손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다. 맘껏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배려와 보호를 노인들은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들의 직업이 결코 자신의 직업이 될 수 없다고 믿는 미야자와의 모습을 통해서 이들의 불완전하고 이해되지 못하는 관계를 바라보는 스스로 멀쩡한 사랑을 한다고 믿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요양보호사라니, 난 절대 못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지만, 그 말은 히토미만이 아니라 나를 비롯한, 그날 인터뷰 촬영을 함께한 직원 모두의 의견이기도 했다. 221-222쪽​

어쩌면 한쪽에서 채워지지 못한 빈공간을 이렇게 채워가며 관계가, 사회가 유지되어가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완벽하게 사랑을 주고 받게된다면 어떻게 될까. 충분히 사랑받은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 네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해서 한 사람에게 안주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사랑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직업도 이성간의 사랑도 이렇듯 불완전 것일까. 책의 맨 첫페이지에 작가인 구보 미스미의 다음과 같은 메세지가 인쇄되어 있다.


산다는 것의 애달픔을 마음껏 음미해주세요.


사랑한다는 것, 산다는 것 모두 즐거울 수만은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들 네 남녀중 진심으로 스스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며,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면서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저자의 말처럼 산다는 것 자체가 애들픔 그 자체이기에 오히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나마의 행복을 위한 삶인가 싶어 문자그대로 이 책을 일고서도 그 애달픔을 한동안 음미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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