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페이션트 에디션 D(desire) 14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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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소설을 읽기 전이었던 2년 전 겨울 영화로 먼저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만났다. 정식 개봉을 하던 때에는 미성년자라서 볼 수 없었고, 대략적인 줄거리만 들었기 때문에, 그것도 원작인 소설의 줄거리가 아니라 영화의 줄거리만 알았기에 영화가 시작되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여운이 오래갔다. 다만 영화에서는 해나의 비중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녀가 영국인 환자를 그렇게까지 보살피려했는지, 어째서 남자들 뿐인 빌라에서 별다른 두려움 없이 머물렀는지, 그저 전쟁에서 연인을 잃었기 때문에 삶의 애착이 소멸해버렸기 때문일거라 대략적으로 짐작만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섰을 때 내 마음속에서 동굴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며, 어둠속에서 죽어가던 여인에 대한 잔상이 크게 자리잡았을 뿐이다.


소설의 중심축은 영국인 환자, 해나 그리고 카라바조 그리고 킵. 기억이 불분명한데 영화에서는 카라바조와 해나의 관계가 소설과 달랐다. 무엇보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말하자면 다음의 문장을 예로 들면 될 것 같다.


그녀는 책을 덮고 도서관으로 내려가 그 책을 책장 위 높은 선반에 숨겨놓는다.  -본문-


위의 문장속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단어들로 가득하다. 책을 덮는 행위라던가, 도서관이라는 장소라던가, 그리고 소중한 책이라는 암시인 듯 선반에 숨겨놓는 행위까지 단순히 한 장면에 담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마음을 흔든다. 그렇다고 영화는 별로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속에서 테니스화를 신고 퐁당 퐁당 뛰어다니는 해나의 모습은 스무 살이 가질 수 있는 천진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의 인생 중 이 시기는 책만이 감방을 벗어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문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16쪽

이제 빌라 산 지롤라모에는 영국인 환자와 그녀밖에 살고 있지 않았다. 17쪽


영국인환자는 엄청나게 박식하다. 외국어도 능통하다. 정작 자신이 누군지는 모르는 그에게 사람들은 관심이 가고 호감을 느낀다. 영리한 사람을 만났을 때 보통사람이 가질 수 있는 거부감마저 특유의 친화력, 이미 삶의 저편 어딘가에 머무는 듯하다. 전쟁속에서 누구나 '생' 그 자체에 집착하게되고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지 모른다. 모두가 바라는 무언가에 욕망을 가지지 않는 존재라서 어쩌면 더 매력을 느꼈던것일지도 모른다. 


카라바지오는 도서관에 들어간다. 그는 대부분의 오후를 여기서 보냈다. 언제나처럼 책들은 그에게 신비로운 피조물이다. 113쪽


인물들이 책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치 그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중스파이로 의심과 호기심이 많은 카라바지오에게 책은 신비 그자체이고, 해나에게는 일생의 어느 순간 숨을 쉴 수 있는 호흡기가 되어주고 영국인 환자에게는 자신의 전부가 그 안에 녹아들어있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독자인 나는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애착을 가지게 되고 유사한 상황속에 놓인 적이라곤 단 한 순간도 없었음에도 깊게 몰입하게 된다.



그는 침대에 누운 남자를 바라본다. 사막에서 온 이영국인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해나를 위해서 이 사람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아니 어쩌면 이 사람을 위해서 피부를 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탄닌산이 화상 입은 남자의 감추어주고 있듯이. 168쪽


영국인환자가 어떤 일을 했는지가 책의 절반을 읽어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조급하게 그의 정체를 캐묻고 싶지는 않다. 아니 그 어떤것에도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카라바지오가 당하는 고문, 해나가 병사들과 함께 있었을 때의 일들, 영국인환자가 어떤 까닭으로 화염에 갇혔었는지에 대한 일들은 긴장 그자체다. 한쪽에서는 지뢰가 터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야기는 흘러간다. 이야기 속에서 낯선 것은 그저 전쟁을 원한 사람은 없는데

전쟁이란 이유로 자신의 일부 혹은 전부를 잃어야했던 사람들이 실재했다는 사실 뿐이다.


영국인환자가 누구인지는 어느순간 이미 머릿속에서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저 어느 한 때 누군가를 사랑했던 때만 그리워졌다. 전쟁중이 아닌데도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에서 나는 마치 책이 전부인듯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고, 이보다 나은 상태로,

환자복을 벗을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사랑, 그래 사랑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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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어 데스 스토리콜렉터 50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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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41쪽

소설 라이프 오어 데스는 호주 제1의 범죄소설가로 불리는 마이클 로보텀의 소설이다. 내가 읽은 저자의 첫 작품인 라이프 오어 데스는 '오디 파머'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오디파머. 출소 하루 전 탈옥을 감행한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감옥 내 폭력을 견디다 못해, 그 남은 하루조차 견딜 수 없어서였을까. 실제 감옥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한 감옥내 폭력이 과연 전부일까 싶을 정도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의 끝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테니까. 어찌보면 오디가 살아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그의 지인들의 표현처럼 억세게 불운하면서 동시에 죽지 않고 살아나는 운좋은 인간이 바로 오디였다.


예전에 한 커뮤니티에서 만화 속 가장 불쌍한 캐릭터가 누구인지 순위를 매긴적이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때 1위가(그다지 영광스럽지 않은) <베르세르크>의 베르세르크였다. 절친에게 배반당하고, 잠도 편하게 잘 수 없는 그야말로 모든 불운을 다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였다. 그런 베르세르크나 오디 파머나 별차이가 없다. 그의 평소 성격이나 태도만 보더라도 애초에 그가 감옥에 억울하게 수감되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근데 그 상황을 다 알게되면 진짜 한숨밖에 안나온다. 갑자기 내가 안고 있는 문제, 견뎌야 할 상황이나 고통이 부끄러워질 정도가 되어버린다. 반면 오디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했던 일들을 보자면 지금껏 나는 나의 연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구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또 한 인물. 데지레.


성장기에 부모님은 "진짜 좋은 선물은 작은 상자에 들어 있는 법이야."

그리고 "사람들은 삶에서 작은 것들에 감사한단다." 같은 말을 들려주곤 했다. 51쪽

범사에 감사하라는 의미에서 저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보는이로 하여금 불안할 정도의 킬힐을 신고서도 160cm가 되지 않은 데지레의 작은 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정도로 작은 키를 가진 데지레의 직업은 연방수사요원이다. 그것도 연방수사국 아카데미를 1등으로 졸업했다. 그녀에게 작은 건 오로지 키 하나 뿐인 것이다. 데지레의 등장으로 나는 다시금 자괴감을 느꼈다. 소설 속 인물, 허구의 인물 때문에 자괴감을 느끼다니 소심하군 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내겐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에 소설보다 더 한 상황은 얼마나 많으며 오디와 데지레보다 더 극한상황에서도 멋지게 살아가는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자꾸 옆길로 새는 데 아무래도 새벽에 쓰는 리뷰라서 그런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리뷰를 굳이 검색해서 읽고 있는 분들에게 나의 자괴감 따위를 더이상 늘어놓진 않겠다.


오디는 십여년 전 폐기될 예정인 지폐를 훔치고 경관을 포함한 4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의 주범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때 훔쳤던 어마마한 금액은 그 이후 소식을 감췄고, 오디의 형이 마치 그 돈을 가지고 동생마저 버리고 도망간 것처럼 카더라 통신은 떠들어댔지만 그런 이야기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져갔다. 영리한 독자가 아니라면 중반까지도 아마 오디가 나쁜 형 때문에 억울하게 대신 감옥에 간것이라고, 형을 보호하기 위해 입을 다물었을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출간한지 1년이 훨씬 더 지났으니 결말을 이야기한들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테지만 왠지 결말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왜냐면 결말이 중요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반전을 그다지 기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쓴 소설이니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짊어진 채 가고 있다.

통근객들, 쇼핑객들, 관광객들, 사업가들, 야구모자 쓴 소년들, 넝마를 입은 거지들.

자기 자신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

오디는 그저 존재하고 싶을 뿐이다. 262쪽

오디가 왜 탈옥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금새 알 수 있게 되지만 어떻게해서 오디가 사건에 연류되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에 소설인데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책을 덮고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 정말 많은 줄은 알면서도 그랬다. 마치 소설<HHhH>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보는 것 같았다. 그토록 다정한 한 집안의 가장이 다른 곳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잔인하게 죽여버린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진짜 범인의 가족들의 태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범죄자를 극도로 혐오하거나 처단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이 어색하고 부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럴수밖에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는다. 사실 이 책을 읽는 중반까지만 해도 오디의 불우한 삶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린 사랑이 안타깝고 자괴감마저 들게 만들었지만 결말을 접하고 마지막 페이지마저 다 읽고났을 때 나를 괴롭힌 것은 범죄자 가족의 태도와 그 태도를 납득할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었던 것 같다.


율리케와 아이몬이라는 영국 아티스트 그룹 블라스트 씨어리의 작품이 있다. 작품의 내용은 폭력적인 성향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웠던 서독 극좌파 율리케와 북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마찬가지로 공격적으로 테러를 감행했던 아이몬이라는 인물을 다룬 내용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관람객에게 묻는다. 과연 자신 혹은 자신의 지인들에게 폭력을 가한 상대를 대상으로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느냐고.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뿐이라고 우리는 머리로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오디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나의 아버지가 누군가를 억울하게 죽였다면 피해자가 아닌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내게 던져주었다. 물론 이 책의 주된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짧다.

사랑은 무한하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550쪽


오디 파머가 그토록 지옥같던 인생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한 이유는 단 하나 사랑,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니까. 이것이 그야말로 스포중의 스포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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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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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작품을 완독하기는 처음이다.

워낙 유명한 작가라 소설 몇 편을 읽은 적은 있지만 완독은 못했다. 그냥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별다른 이유가 있을리 없다. 그래서 꿀벌과 천둥을 읽으면서, 그것도 엄청 몰입하며 읽는 내 자신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피아노 조율사의 이야기를 다뤘던 <양과 강철의 숲>과 표지도 유사해서 그런지 애니메이션 <피아노의 숲>보다 더 자주 비교하며 읽었는데 세 작품을 두고 점수까지 매겨보는 무례함을 범하기도 했는데 굳이 그 점수를 여기에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실은 적었다가 지웠다^^;;)


<꿀벌과 천둥>을 이끌어가는 피아노 천재들의 이름을 나열하자면, 비평가들에게, 그리고 음악인들에게 폭탄이자 선물이 될 만큼 놀라운 실력의 벌꿀소년 가자마 진, 어릴 때 이미 천재소녀로 이름을 알렸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 피아노를 치는 목적을 상실하고 무대를 버린 에이덴 아야, 피아노 실력은 물론 잘생긴데다 언변에 사업가 기질까지 갖춘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이름이 긴 이유는 책을 보면 나옴),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지만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콩쿨에 도전한 다카시마 아카시가 주인공이다. 물론 다카시마 아카시는 두 번째 경연에서 떨어지지만 어쨌든 끝까지 나오긴 한다.


하지만 딱 한가지, 우리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게 있잖아.

마유미가 조금 부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음악은 통해. 언어의 장벽이 없어.

작가와 음악가의 유사한 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음악과 문학의 가장 큰 차이점을 제대로 파악한 것 같다. 온다 리쿠 작가 개인적으로 느꼈던 부러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 그래 음악은 언어의 장벽이 없다. 예술가들이 종종 음악과 춤을 텍스트와 비교하며 '장벽의 유무'를 논하는 까닭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미에코가 아무리 악기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한다고 푸념을 늘어놓아도 저만한 장점이 어디있을까.




하지만 이 아이들은 찍지 않는다.

그사실이 또 가나데에게 작은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아이들은 굳이 일부러 인생을 기록할 필요가 없다. 보잘것 없는 인생을 기록 속에 붙잡아둘 필요도 없다. 그들의 인생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기록되어 남도록 이미 예정되어 있으므로.

 

단 한 번도 천재라고 느낀적도 타인에게 그런 느낌을 들게 한 적도 없기에 어쩌면 나는 아야를 곁에서 지켜보는 가나데에게 더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특히 맘에 맞는 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것도 엄청나게 좋은 순간에 머무는 동안 세 명의 천재 피아니스트들은 카메라를 꺼내지 않는다. 물론 나중에 보니 가나데의 착각이었고, 세 사람모두 너나할 것 없이 가나데를 시작으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평범한 나로선 가나데가 들었던 생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사루는 보폭과 호흡을 맞춰 온몸에 산소가 운반되는 상상을 했다.

그는 조깅을 할 때 음악을 듣지 않는다.

그래도 머릿속에는 도도한 바흐가 흐른다. 아침의 음악은 바흐다. 1차 예선 과제이기도 한 평균율 클라비어.

오늘 아침은 굴드가 아니라 레온하르트의 연주로.

음악을 듣지 않고도 특정 연주자의 음악을 듣는다는 느낌을 받으려면 도대체 어느정도의 음악성을 혹은 부지런함을 가져야 하는것일까 고민해봤다. 책을 읽는 내내 수없이 감탄했다. 심지어 이를 표현해내는 온다 리쿠란 작가는 또 얼마나 대단한가. 오늘 아침은 굴드가 아니라 레온하르트의 연주라니. 같은 음악을 매번 들으면서도 외우지 못하는 나같은 클알못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아무리 다들 부러워하는 행복의 정점에 있어도, 충실한 인생을 보내고 있어도, 역시 모든 행복은 언제나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독을 등에 업고 있다.

깊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단 깨닫게 되면 절망밖에 없다. 자기의 약한 부분을 보게 된다. 그런 생각으로 피해왔던 근원적인 '고독'을.


 

나처럼 절망하는 평범한 이들을 위한 작가의 배려였을까. 하긴. 작가의 배려가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고독을 즐길 줄 아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나뉜다는게 맞을 것이다. 이런내용도 위의 발췌문 이후로 쭈욱 나열된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의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믿으며(561쪽)라면서.  



천재들의 이야기라 그들만의 리그인가 싶다가도 결국 우리의 이야기라고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에 이책에 그토록 몰입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리뷰를 찾아서 읽다보니 어떤 분은 온다 리쿠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말이다. 읽다가 그만둔 온다 리쿠의 소설들을 다시금 읽어볼 마음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전작주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작가의 다른 작품을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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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작 한번 해봤을 뿐이다 - 운명을 바꾸는 "한번 하기"의 힘
김민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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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 때 나는 참 이상한 아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시킨 적도 없는데 느닷없이 가족신문을 만들겠다며 당시 사정이 있어 잠시 함께 살던 사촌오빠에게까지 신문제작비용을 달라고 졸랐다. 인당 100원. 고작 단 한부 제작하기를, 그것도 이미 가지고 있는 색연필, 싸인펜과 풀 등을 이용하면서 무슨 염치로 소위말해 펀딩까지 시도했는가 의아하기만 하다. 그랬던 내가 성인이 되어가면서 그 무엇하나 시도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실패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는 첫 회사라고 할 수 있었던 마케팅 회사에서 기획서를 작성할 때 무조건 '안되는 이유'부터 고민해야 한다는 사수의 여파도 꽤 오래갔다. 그렇다고 고작 한번 해보는 시도까지 아예 접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저 '한번'만 하고 그쳤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 문제의 답을 김민태PD의 책, <나는 고작 한번 해봤을 뿐이다>에서 찾아보았다.


시작은 미비했고, 무수히 많은 작은 도전 중에 어쩌다 작은 성공이 걸려든 것이다. '어쩌다'가 그들을 폄하하는 말이 아닌 이유는 '무수히 많은' 도전이 그 가치를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55쪽


기회라는 문은 무수히 작은 실천을 통해 마치 우연인 듯 열린다.

그래서 작은 실천의 시작, 무엇이든 '한번' 하겠다는 태도가 중요하다. 엄밀히 말해 기회는 오는 게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다.  70쪽


무수히 실천했어야 했다. 한 번에서 그치지말고 일단 한번했으니 두 세번까지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고 이 책이 내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그 작았던 시도조차 나이들면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실천-후동기부여'란 말에 크게 공감했는데 그것이 아무리 작은 실패라도 반복되면 좌절하는 것처럼 반대로 작은 성공이 연이어 벌어지면 무엇이든 자신감이 생기고, 성공하는 일 자체가 습관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작은 실천이 중요했다. 오늘 10분 걷기가 저자에게 왜 중요했고, 책까지 집필하게 되었는지 바로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래리 킹은 '지금' 자기가 할 수 있을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86쪽


​몇 년전에 들었던 자기개발 관련 명언 중 하나는 미래에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그려보고, 그렇게 되기 위해 현재 해야하는 것을 역으로 계획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이와 유사한 내용일 수도 있는데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 부터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렇다고 당장 숨쉬기가 가능하니까 숨쉬기만 일년 내내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당장 마트에 나가 10분을 걸어본다던가, 퇴근 길에 한 정거장을 걷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이 맞다. 이때 주의할 점은 이렇게 작은 실천을 끝낸 후에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는 것, 소위말해 상을 내리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러가지 실험 사례를 들어주며 그 이유를 말해주는 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보상에 눈이 멀어 좁은 시야를 갖게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단순업무나 작업에 있어서는 인센티브 제도가 도움이 되었지만 창의력을 요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먼저 경험한 선배, 먼저 나온 발명품에서 배우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연결'할 때 비로소 창조의 씨앗이 움튼다. 115쪽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꺼리는 편이라 어쩌면 이 책을 통해 내가 가장 많이 뉘우친 부분이 이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지만 그렇다고 완전 혼자서 살 수 있는 것만도 아닌데 왜그렇게 '선'을 그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었던 선은 적당한 '선'이 아니라 '어쩌면 '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작은 실천만큼이나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 '연결'이란 생각이 들었다. 뻔한 이야기가 적혔다고, 제목만 봐도 다 알 것 같던 책에서 다시금 또 몇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작은 것 부터 실천하기, 그리고 스스로 민폐란 생각에 선을 긋지말고 일단 한번 부탁해보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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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특별기획 통찰 - 예리한 관찰력으로 동서고금을 관통하다
EBS 통찰 제작팀 지음 / 베가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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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은 단편화된 우리의 지식을 바르게 꿰어주는 진주 목걸이의 역할을 한다. 숲도 보게 하지만 나무도 보게 한다. -13쪽-

 

총 6개의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 책은 EBS에서 동명의 제목으로 방영되었던 프로를 한 권의 책으로 추려 출간한 것이다. 첫 번째 챕터는 인문학의 시작이자 중심인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부분은 이전에 읽었던 소설과 종교를 포함한 인문학서까지 떠오르게 만들어주었는 데 '동굴'이란 키워드가 그랬다.

 

동굴의 '동'과 통찰의 '통'은 같은 한자다! 18쪽

 

동굴은 우리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기원전 인류가 벽화를 통해 당시 생활의 일부를 엿보게 해주는 통로일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깊게 성찰해 볼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하다. 최근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주인공이 과거에 풀지못했던 숙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이끄는 장소가 다름 아닌 우물이며, 그 고통의 과정을 축소시킨 장소가 다름아닌 동굴이었다. 비단 이 소설 뿐 아니라 하루키는 주인공이 현실 세계와 이상세계를 오가는 통로로 우물처럼 동굴과 유사한 장소를 선택하곤 했다. 그런가하면 원효대사 역시 동굴에서 마신 해골물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굴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장소로 등장했다. 책에서도 추천하는 책의 저자인 배철현 교수역시 자신의 저서<심연>에서 매일 아침 자신의 내면안으로 들어가 들여다보는 심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서문이자 제목이 '나라의 기초, 심연을 본 사람'이라고 적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렇게 동굴로 들어가든, 골방이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식의 자아성찰의 결과, 즉 깨달음의 결과가 인간의 삶은 유한하니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며 살기 보다는 늘 인지하면서 하루하루를 최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최선의 의미를 오해하면 안되는 데 이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인생의 처음과 끝은 정해져 있으니 의미있는 일을 하고 놀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인생의 정답'(본문61쪽)이라고 길가메쉬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우리가 흔히 바라는 '보통'과 '평범'한 삶을 뜻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자신의 마아트, 즉 신이 주신 소명을 깨닫고 노력해야 하는 삶이다. 물론 그 과정은 고통이 따르며 개인이 겪는 고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생각하고 함께 어우러진 삶을 살아가는 컴패션에 이르러야 비로소 완벽한 통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2편 자연으로 넘어오면 다음의 문장들을 바탕으로 양자역학 이전 부분까지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과학자는 늘 미래만 말하고, 인문학자는 늘 과거만 이야기했다." 스노우 71쪽

책과 책 사이의 맥락을 묶는 것이 바로 인문학 공부다. 78쪽

 

근대에 이르러 철학이 세분화 되면서 현재는 이과, 문과로 나뉘어져 마치 전혀 무관한 내용인것처럼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통찰'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 까지 이르렀고 다른 분야에 취약한 이유가 서로의 전공이 달라서라고 변명하기도 한다. 고려대 김인환 교수의 말처럼 계열이 다르더라도 '문과생들도 공통과학과 수학을, 이과생들도 공통사회와 국어를 함께 공부하고 추구하는 학교가 보다 원만한 교육으로 가까워지는 것이고-중략- 82쪽 라는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양자역학의 경우는 파인만 교수의 다음의 말 덕분에 큰 두려움없이 책을 읽었고 더 공부해 볼 마음이 생겼다.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다" 105쪽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가 저렇게 말하게 만든 양자역학은 도대체 무엇일까. 고전역학과 상반되는 이론으로 모든 것을 추측하고 예측해볼 수 있는 과학은 확률의 근거하여 추론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어느 결과의 중간 결과값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가진다. 그렇다면 과연 '과학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의 질문의 답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견해가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여전히 논쟁중인 부분이기도 하다. 그 대신 미래에 해당되는 인공지능, AI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지어 보자면 해당 책에서는 인공지능이 일으키게 될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 다음의 견해를 가진다.

 

인공지능이 이미 가지고 있는 입력값에 따라 일고리즘을 가지고 어떠한 정보를 선택했다고 해서 그 선택이 인공지능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비록 선택의 형식은 인간의 것을 닮았다 하더라도 인공지능의 선택은 엄밀히 말해 책임 있는 선택이 될 수 없다. 274쪽

 

미디 엔 그룹 비트닉 아티스트의 '무작위 다크넷 구매자'라는 작품이자 인공지능의 경우 다크넷을 통해 마약과 무기구매로 인해 물의를 빚었을 때 법원은 인간이 값을 넣어줬을 뿐 실제 구매를 한 것은 AI이기 때문에 아티스트들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위의 견해와 반대된다기 보다는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부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자유의지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AI의 윤리적인 부분은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부분에 있어 다섯 번째 챕터 상생에서 언급한 서민 교수의 의견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생충의 현실을 보면, 편견이라는 게 곧 혐오로 연결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편견은 피부색이나 인종, 남녀, 종교의 차이로 인해 생겼으며, 그 틈을 타고 반대와 차별이 일어났다. 237쪽

 

비단 기생충뿐 아니라 AI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앞서 사례를 두고 편견을 가져선 안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사실 기생충에 관련된 내용을 읽다보면 식사중에는 읽기를 피하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로 상생이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대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이 편견을 막는 것이고, 잘 안다고 해도 편견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이때 필요한 것이 첫 번째 챕터에서 강조하는 컴패션이 아닌가 싶다. 나의 고통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까지 아우르는 자세가 필요한 세상이 미래일 것이다.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 미래가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하고 다른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편견없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세상이 우리의 미래가 되길 바란다. 이것이 내가 책 <통찰>을 통한 통찰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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