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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ㅣ 에디션 D(desire) 14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잉글리시 페이션트

소설을 읽기 전이었던 2년 전 겨울 영화로 먼저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만났다. 정식 개봉을 하던 때에는 미성년자라서 볼 수 없었고, 대략적인 줄거리만 들었기 때문에, 그것도 원작인 소설의 줄거리가 아니라 영화의 줄거리만 알았기에 영화가 시작되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여운이 오래갔다. 다만 영화에서는 해나의 비중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녀가 영국인 환자를 그렇게까지 보살피려했는지, 어째서 남자들 뿐인 빌라에서 별다른 두려움 없이 머물렀는지, 그저 전쟁에서 연인을 잃었기 때문에 삶의 애착이 소멸해버렸기 때문일거라 대략적으로 짐작만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섰을 때 내 마음속에서 동굴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며, 어둠속에서 죽어가던 여인에 대한 잔상이 크게 자리잡았을 뿐이다.
소설의 중심축은 영국인 환자, 해나 그리고 카라바조 그리고 킵. 기억이 불분명한데 영화에서는 카라바조와 해나의 관계가 소설과 달랐다. 무엇보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말하자면 다음의 문장을 예로 들면 될 것 같다.
그녀는 책을 덮고 도서관으로 내려가 그 책을 책장 위 높은 선반에 숨겨놓는다. -본문-
위의 문장속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단어들로 가득하다. 책을 덮는 행위라던가, 도서관이라는 장소라던가, 그리고 소중한 책이라는 암시인 듯 선반에 숨겨놓는 행위까지 단순히 한 장면에 담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마음을 흔든다. 그렇다고 영화는 별로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속에서 테니스화를 신고 퐁당 퐁당 뛰어다니는 해나의 모습은 스무 살이 가질 수 있는 천진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의 인생 중 이 시기는 책만이 감방을 벗어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문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16쪽
이제 빌라 산 지롤라모에는 영국인 환자와 그녀밖에 살고 있지 않았다. 17쪽
영국인환자는 엄청나게 박식하다. 외국어도 능통하다. 정작 자신이 누군지는 모르는 그에게 사람들은 관심이 가고 호감을 느낀다. 영리한 사람을 만났을 때 보통사람이 가질 수 있는 거부감마저 특유의 친화력, 이미 삶의 저편 어딘가에 머무는 듯하다. 전쟁속에서 누구나 '생' 그 자체에 집착하게되고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지 모른다. 모두가 바라는 무언가에 욕망을 가지지 않는 존재라서 어쩌면 더 매력을 느꼈던것일지도 모른다.
카라바지오는 도서관에 들어간다. 그는 대부분의 오후를 여기서 보냈다. 언제나처럼 책들은 그에게 신비로운 피조물이다. 113쪽
인물들이 책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치 그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중스파이로 의심과 호기심이 많은 카라바지오에게 책은 신비 그자체이고, 해나에게는 일생의 어느 순간 숨을 쉴 수 있는 호흡기가 되어주고 영국인 환자에게는 자신의 전부가 그 안에 녹아들어있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독자인 나는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애착을 가지게 되고 유사한 상황속에 놓인 적이라곤 단 한 순간도 없었음에도 깊게 몰입하게 된다.
그는 침대에 누운 남자를 바라본다. 사막에서 온 이영국인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해나를 위해서 이 사람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아니 어쩌면 이 사람을 위해서 피부를 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탄닌산이 화상 입은 남자의 감추어주고 있듯이. 168쪽
영국인환자가 어떤 일을 했는지가 책의 절반을 읽어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조급하게 그의 정체를 캐묻고 싶지는 않다. 아니 그 어떤것에도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카라바지오가 당하는 고문, 해나가 병사들과 함께 있었을 때의 일들, 영국인환자가 어떤 까닭으로 화염에 갇혔었는지에 대한 일들은 긴장 그자체다. 한쪽에서는 지뢰가 터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야기는 흘러간다. 이야기 속에서 낯선 것은 그저 전쟁을 원한 사람은 없는데
전쟁이란 이유로 자신의 일부 혹은 전부를 잃어야했던 사람들이 실재했다는 사실 뿐이다.
영국인환자가 누구인지는 어느순간 이미 머릿속에서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저 어느 한 때 누군가를 사랑했던 때만 그리워졌다. 전쟁중이 아닌데도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에서 나는 마치 책이 전부인듯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고, 이보다 나은 상태로,
환자복을 벗을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사랑, 그래 사랑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