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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이와 인문학 교육
폴 페어필드 지음, 김찬미 옮김 / 씨아이알(CIR) / 2018년 3월
평점 :
학생에서 강사로, 그리고 다시 학생이 되어 강의를 듣고, 과제를 준비하고 시험을 치르면서 새삼 나이들어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교육과 관련된 수업을 듣다보면 아마 누구라도 '듀이'라는 학자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듀이와 인문학 교육>은 해석학, 현상학 학자인 폴 페어필드가 교육철학자로서의 듀이를 이 시대의 교육과 관련지어 설명해준 책으로 쉽지는 않지만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다. 한 세기 전에 이미 듀이는 교육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현실에 대해 고민했고, 비판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한 불합리성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말처럼 교육의 실제는 모순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담론을 형성한 듀이를 대화자로서 저자는 불러들인다. 우선 그가 정립한 대화자 듀이는 다음과 같다.
듀이는 우리가 우리의 교육기관들이 겪고 있는 실패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해 크게 벌을 받아야 하는 악당도 아니고, 일단 그의 견해를 적절하게 이해하면 진심으로 찬성하게 될 최고의 사상가도 아니다. 우리는 대화자의 견해에 대해 전적인 동의 또는 부정(yes or no)으로 답하지 않는다. -저자 서문-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던 까닭은 위의 대화자 설정을 염두하고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여러명의 철학자가 등장할 터인데 저자 스스로 최고의 교육자로서 듀이의 경험과 실제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내가 가장 관심을 두고 보고 싶었던 예술과 문학교육 방식에 있어서는 듀이가 저작물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듀이는 물론 저자의 의견을 두고 골치아플 필요가 없다.
평생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고, 배울수록 더 배우고자 하는 것은 교육의 이상(ideal)이다. 그렇지만 교육이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있을까? 교육은 더 나은 삶, 더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 역자 서문-
듀이와 인문학 책이 어찌보면 '교육철학'에서 방점이 '철학'에 찍힌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사실 저자의 연구분야만 보더라도 어쩔 수 없긴 하다. 하지만 역자의 전공은 또 교육에 있으므로 위의 역자가 던진 질문, 교육이 그자체로 목표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결국 이상적 삶을 위한 수단인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방향으로 대화자 듀이의 이야기를 정리해보겠다. 듀이의 진보적인 성향을 두고 앨런 블룸은 미국 학생들의 역사의식 부족의 원인이 그에게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것보다 학생들의 경험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듀이 스스로 자신의 저작물을 통해 아동을 포함한 학생들에게 있어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의 오류를 설명해주었다. 사실 최근에 듀이의 교육철학에 관해 접하게 된 과목이 '아동미술'이었기 때문에 다소 오해의 소지가 될 부분이 해소된 셈이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이데올로기가 정반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듀이의 말처럼 경험에 대한 오해의 소지는 끊임없이 이에대해 증명하고 반박하는 과정을 통해 보다 자신의 철학을 확고하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었다. 앨런 외에 보수주의 허쉬역시 진보주의로서의 듀이 철학을 반박했는데 이는 듀이의 저작물이 굳이 아니더라도 폴 페어필드 스스로가 다음의 해석으로 반박한다.
문화적 리터러시는 '전통'을 학생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대화라기보다는 그들이 바뀌지 않은 형태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종의 절대적인 것, 단일하고 동질적이며 변화에 매우 저항하는 어떤 것으로 보는 견해를 전제한다. 50쪽
이부분에 있어서는 최근 끊임없이 듣게 되는 '창의성' 혹은 '창의적 사고'를 위한 교육방식을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창의적 사고라는 것은 다변하는 사회속에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문제를 전통적인 방법을 재구성하거나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으로 페쇄적인 방식의 '전통'을 이야기하는 허쉬의 반박은 애초에 현재 교육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2장에서는 1장에 이어 좀 더 듀이의 경험적 사고와 교육에 대한 접근법들에 대해 서술되는 데 이때 전통적인 사고의 교육을 비판하는 듀이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맥락적인 사고를 요한다. 가령 일상에서는 아이들이 맛보고 뛰어놀고 하는 것이 열린 사고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오히려 이런 사고를 증진시키고 발달시켜야 하는 교육현장에서의 학생의 자유사고가 방치되거나 금지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올바른 사고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3장에서 나오는데 해당 편에서는 하이데거의 이론을 바탕으로 듀이와 유사한 점과 어느 면에서 더 뛰어난 그의 이론을 등장시킨다. 그의 말을 빌자면 단순히 사고한다는 것 자체가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사고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할까. 어디서나 활발하게 끊임없이 철학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오늘날, 거의 모두가 도대체 철학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오늘날에 말이다! 철학자들은 사고하는 데 탁월한 사람들이다. 철학자들은 사고하는 사람들로 불리는데, 이는 바로 사고가 철학에서 적절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고라고 부르는가- 중에서
2부에는 각 인문학의 소분야별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철학, 종교, 윤리, 정치, 역사 그리고 문학에 이른다. 특히 문학의 경우 부제가 '삶과 내러티브'로 표현되어 있는데 줄곧 등장하는 리터러시와 내러티브는 학생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서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제대로된 이해가 필요하며,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고하는 과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대화자를 듀이로 설정하긴 했지만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 부분은 저자의 바람처럼 다양한 인문학 분야에서 교육자로서 뿐 아니라 학습자로서 어떤 사고가 요구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어 좋았다. 역자의 매끄러운 번역이 큰 역할을 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