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욕망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꿋꿋하게 살기 위해 오늘을 비추는 사색 1
우메다 고타 지음, 노경아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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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의지 부정의 철학이다. 즉 쇼펜하우어는 죽을 때까지 우리를 조정하는 "삶의 의지"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다. 20쪽

우리는 의지가 원인이 되어 신체를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생각을 명확히 부정했다. 62쪽

사는 동안 '의지가 부족하다' 혹은 '의지가 약해서'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는 '의지가 없다'라는 말을 들었을 수도 있다. 도대체 의지가 무엇이길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저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란 의지이자 의지와 연동하여 활동하는 신체(63쪽)라고 말했으니 왜 저런 말들이 나왔는지 이해가 된다. 쇼펜하우어를 간략하게 그러나 핵심만 담은 우메다 고타의 작지만 알찬 이 노란책은 200페이지가 되지 않는다. 중간 중간 중복(혹은 강조)되는 내용이 많아 실제로 읽게 되는 페이지는 100페이지 이내이지만 쇼펜하우어 철학의 입문자 혹은 두꺼운 주요 저작을 읽었으나 여전히 그의 철학의 시작과 핵심을 정리해서 누군가에게 전하기가 어려운 사람에게는 유익한 책이다. 정리해서 전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경제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부모님의 지원을 넉넉하게 받고 자랐다. 덕분에 유년 시절 해외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쌓을 기회도 많았는데 그 여행 중 만났던 납득할 수 없는 여러 상황들을 보며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사업가가 아닌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물론 아버지 역시 그의 선택을 반대하진 않았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구도철학과 관련된 내용에 더 집중할 수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쇼펜하우어는 이처럼 금욕을 시행하는 종교들 사이에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성자든 인도의 성자든 교의는 제각각 달라도 행동의 출발점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짜 인식인 "의지의 부정""이다. 즉 어느 종교에서든 의지의 부정을 인식해야만 진짜 구제나 해탈을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81

누군가를 '동고'하는 마음으로 의지와 별개로 행동할 수 있지만 완전한 방법은 아니라고 말한다. 동고라는 단어가 낯설게 다가오지만 타인의 괴로움을 나의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런 마음은 노력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불우한 이웃을 만났을 때 가진 것을 다 팔아 나눠주거나 구호단체를 만들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완전한 의지 부정상태가 되려면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경에 쓰인 것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이란 말은 결국 동고의 마음이 지속되는 것일테니 쇼펜하우어의 말에 공감이 간다. 또 쇼펜하우어 역시 인간의 욕망은 어떤 적정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채워야만 하는데 내면에 갖춰진 부를 언급하는 부분에 있어서 한나 아렌트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은 혼자인 존재이지만 그 시간을 고독으로 채워가며 성장하는 사람(내적인 부를 쌓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며 외적인 요소를 채우려는 것을 경계했던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작지만 알찬 '오늘을 비추는 사색 시리즈'를 한 권 한 권 읽어가며 내면의 부를 쌓아가길 추천한다.


참고로 쇼펜하우어의 "목적 없는 의지"가 "맹목적 의지"로 번역될 때가 많은데, 이처럼 맹목이라는 말을 "무목적"으로 즉각 해석하는 것은 시각 장애인을 멸시하는 차별적인 태도이다. 이 책이 출간된 후에는 적절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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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 일하고, 돈 벌고, 삶을 꾸려 가는 이들을 위한 철학
존 캐그.조너선 반 벨 지음, 이다희 옮김 / 푸른숲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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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책 #책읽는엄마


현재 속에 살아야 하고 파도가 올 때마다 뛰어들어야 하며 매 순간에서 영원을 찾아야 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기회의 섬을 딛고 서서 또 다른 육지를 바라보기만 한다. 또 다른 육지는 없다. 또 다른 생은 없다. 이번 생이, 이런 생이 전부다.”
(일터의 소로 242쪽, 소로의 일기 1859년 4월 24일 일기 중)

주말 그리고 연휴 근무 내내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 300페이지가 안되는 책이지만 ’일‘에 관해, 의미있는 삶에 관해 다룬 책이라 찬찬히 집중해서 점심시간에도 식사 대신 차를 마셔가며 읽기도 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만두는 것이 맞겠지만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퇴사‘ 대신 미래의 있을 여유로운 삶 혹은 이직을 위한 발판을 쌓아야 한다는 이유로 만류한다. 그런 우리에게 소로는 자신의 삶을 근거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결국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만 유한한 삶을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내일은 단지 시간이 흐른다고 밝아 오지 않는다.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드는 빛은 그저 어둠일 뿐이다. 깨어 있을 때만 날이 밝는다. 밝아 올 날은 더 있다. 태양은 아침에 뜨는 별일 뿐이다. 131쪽

우리는 회사에 출근 해 근무하는 동안 ’깨어 있다‘고 착각한다. 일단 회사에만 나가면 어찌되었든 업무를 하게 되고, 그렇게 적당히 시간을 보내면 급여가 들어오니 버티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족의 끼니를, 자녀의 미래를 그리고 자신의 노후를 보장해준다고 믿는다. 소로는 오랜 시간을 결핵으로 고생했고, 40대에 생을 마감했다. 또 그의 형 역시 지병이 있었지만 어이없게도 아주 작은 상처가 파상풍이 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소로는 ’현재‘를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았고,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일처럼 보였던 일들도 결국 자연과 공존하는 현명한 태도 였다는 것을 이웃사람들 조차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스스로 ’좋다고 생각한 일‘을 계속 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이런 소로를 알아본 이 책의 두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유다.

자랑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지루하고 평범한 삶을 산다. 그들은 결코 월든에 가 보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월든을 발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더라도 바빠서 절반밖에 읽지 못할 것이다. 148쪽

일터는 의미 있는 삶의 배경일 수 있지만 착취와 억압의 온상일 수도 있다. 소로가 노예들의 삶을 걱정한 것은 단지 노예들이 끔찍한 학대를 당하고 모욕적인 상태에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노예들이 강요받았던 노동, 그 노동이 노예들의 몸과 마음에 끼친 영향 때문이었다. 218쪽

소로는 우리가 하는 자유의지로 선택한 직업 혹은 직장에서 근무할 때 불성실한 것은 죄라고 말한다. 열심히 자기 시간을 버려가며 일하는 데 ’죄인‘이라니, 누명 처럼 들리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내가 선택한 직장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상사나 동료가 아닌 자신이다. 물론 소로 역시 직장에서 만나는 고약한 상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실제 그런 상사를 만나 회사를 관두기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는가. 내가 선택한 이 일에 성실하게 임하고 있는가. 또 저자들이 말한 것처럼 적어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행운아라는 점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고 제대로된 목표를 설정했는지를 노트에 마지막으로 정리해보았다. 이 책은 소로의 월든은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의 일기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였다. 덕분에 소로의 일기를 원서로라도 제대로 읽어보고픈 마음이 들었고, 앞서 나열한 질문과 답을 구하는 유용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이 좋은 시간을 다른 독자들도 꼭 누려보길 바란다.

#연휴독서 #명절독서 #책읽는 #푸른숲 #월든 #시민불복종 #소로의일기 #철학 #존캐그 #조너선반벨 #번역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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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지음, 최정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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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이라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나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너무도 고통스럽게 배운 교훈을 기억하려고 몸부림쳤다. 돌봄의 결말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 돌봄의 결말은 큰 슬픔이라는 것.

외외조부모와의 결별까지는 괜찮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외조모까지도. 그러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언급하며 아버지를 이야기하고, 결국 어머니를 떠나 보낸 이후의 내용은 이 책을 미래의 어느 순간 반드시 떠올릴 수 밖에 없겠구나 싶어 가슴이 아파왔다. 마치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리해서 잡아 탄 전철에서 결국 버티지 못해 내려야 했을 때 느꼈던 통증이었다. 돌봄의 결말은 큰 슬픔이라는 것. 어른들의 대화 내용 중 절반이상을 이해할 수 있었을 때 부터 줄곧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랐다. 긴 병의 효자 없다는 말. ‘슬픔’이 아닌 ‘후련함’. 이 크다했는데 위의 저 문장을 읽는 순간 알았다. ‘꿈에 엄마가 나올 때마다 나의 첫 반응은 항상 안도감이다. 오,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가 착각했어요. 당신은 살아 계십니다.(252쪽)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만큼 슬픔이라는 것을.

거대한 옥시클린 상자 다섯 개를 간직했어요. 오, 맙소사. 엄마는 왜 옥시클린에 대해 한 마디도 안 했던 거죠? 상자 하나당 156개, 우리의 양말은 엄마가 떠난 뒤 수년 내내 새하얬어요. 247쪽

나의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는(외조모라는 표현은 영 어색하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그분들의 성경책을 엄마가 간직하고 계신다. 나 또한 엄마가 써놓은 여러권의 성경필사 노트만큼은 다른 형제에게 양보할 수 없다고 말해둔 상태다. 물론 어떻게 될 지는 신 만이 아신다. 아이에게 입혔던 옷들 중 단 한 벌도 버리지 않고 지금껏 가지고 있는 내가 과연 엄마의 유품 중에서 선택할 수 있을까. 간직하지 못한 것이 마음을 짓누른다는 저자의 말은 결코 사적이지 않다.


물고기들은 모두 죽어요?

청설모들은 모두 죽어요?

선생님들은 모두 죽어요?

식료품점에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죽어요?

엄마들은 모두 죽어요?

(...)

내가 죽을까요?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게 될까요?



보면 알겠지만 발췌문의 쪽수가 역순이다. 초반부터 이 책은 재미있었다. (사실 첫 서평도 아니다. 초반부터 밀려오는 공감과 매력에 이미 한 차례 부분적으로 서평을 남기기도 했다.) 공감되는 부분도, 이전에 읽었던 <메이블 이야기> 혹은 <우파 아버지를 부탁해> 등을 떠올리기도 했다. (사실 그때 그때 떠오른 다른 저작을 나열하자면 이 감상은 결코 끝이 안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간 중간 발췌문에 표기를 해두었지만 위의 언급한 것처럼 어머니와의 결별 이후로는 밑줄을 그으면서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감사의 말에 저자가 적은 것처럼 가족이란 것이 '부분적으로는 안정망이고 부분적으로는 트램펄린이다.'(320쪽)라는 말은 꼭 남겨두고 싶다. 이 책은 책장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꺼내 읽게 될 것이다.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자연을 관찰한 부분과 훌륭한 삽화를 언급하지 않으면 큰 결례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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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트 베어스 - 곰, 신화 속 동물에서 멸종우려종이 되기까지
글로리아 디키 지음, 방수연 옮김 / 알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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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곰종이 서로 매우 다른데도 불구하고 현재 곰 여덟 종은 모두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고유하고 있다.

함께 곤경에 빠져 있다. (프롤로그 중에서)

기후위기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북극곰은 삶의 터전을 잃기 시작했고, 결국 멸종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어릴 때 부터 동물원에 갈 때면 북극곰 만큼은 내 손으로 카메라에 담아오던 내게는 끼니를 거를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멸종위기의 곰이 북극곰만은 아니었다. 남은 종들을 포함 해 그 수가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된 미국흑곰과 대왕판다 외에는 다른 여섯 종 모두가 위험에 처한 상황이었다. 책 제목을 그림책이나 어린이 동화에서 봤더라면 귀여운 여덟마리의 새끼곰의 재롱이었겠지만 이 책은 안타깝게도 저자가 긴 시간 만나거나 만남을 가지려했던 곰들의 진짜 이야기가 담겨있다. 처음 그가 곰의 생태를 조사하기로 맘먹었던 계기는 기후위기라기 보다는 인간과의 공존이 쉽지 않은 흑곰의 이야기였고, 그 결과는 '사살'이라는 잔인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이유였다. 물론 곰들의 습격으로 생명을 잃은 사건들도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점에서 무조건 곰을 보호하자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말처럼 '돌보미'라는 인간의 협조가 가능했던 것도 지금껏 곰에게서 우리가 가지는 상징이나 이미지가 '테디 베어'와 같은 귀염성과 인간과 유사하다는 의견(결론만 보자면 틀렸지만)에 기대어 살아왔다는 것도 부정할 순 없다. 실사영화로까지 제작된 안경곰 '패딩턴'만 보더라도 테디 베어와 함께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왜 대왕판다를 귀여워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걸까? 187쪽

캐릭터화 되어 인기가 있는 곰이 아니라 종 자체가 인간에게 사랑을 받는 대왕판다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최근 특정 판다의 인기가 한국에서는 첨언 할 필요없이 굉장하다. 각종 굿즈에 책까지 엄청난 인기를 끄는 판다의 검은 얼룩은 '포식자를 속이려는 방어용 위장의 일부(같은 쪽)'지만 판다를 친근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다른 곰과와 달리 공격성이 거의 없다는 점과 나라의 수장이 친교를 위해 선물하는 '판다 외교'에 멸종위기에서는 벗어났지만 인공 사육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안전하다고만 볼 수 없다. 그런가하면 최근 국내 언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반달가슴곰은 '웅담' 이 특효약으로 알려지면서 다른 어떤 종보다 인간의 잔인함을 겪은 불운의 곰이기도 하다.

"기자님이나 제가 6개월 동안 겨울잠을 잔다면 몸에 남아 있는 게 많이 없을 겁니다." 담즙 내 우르소데옥시콜산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스티어가 설명했다. 우리의 근육은 쇠약해질 것이고,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쯤이면 뇌손상을 입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곰은 겨울잠에 들어갈 때 우르소데옥시콜산 수치가 그 증가분이 10퍼센트가 넘도록 치솟는다. 213쪽

긴 시간 겨울잠을 잘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신비롭고 놀라운 부분이다. 물론 모든 곰이 겨울잠은 자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또 이 좋은 성분을 반드시 곰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법이 개정되어 곰 샤육 금지법이 생겨나 이전보다는 곰 사육 산업이 저물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챕터에서 다음의 문장을 보고 다시 절망하고 말았다.

북극곰은 이번 세기말을 넘겨 살아남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 383쪽

전반적으로 다큐를 보는 것처럼 내용과 별개로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북극곰의 참담한 현실은 이 책이 널리 읽혀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처럼 곰의 멸종속도는 엄청나게 빠르게 진행되지만 동시에 곰의 멸종을 걱정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다. 특히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곰을 비롯 야생동물과 공존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 맘에 들었다. 책의 첫 장에 담긴 추천인들의 추천사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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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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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 소설 ’천 개의 파랑‘을 읽은 독자들은 ’콜리‘라는 단어에 이전과는 다른 의미부여를 하게 될 것이다. 기수 로봇 콜리는 아주 작은 실수에 의해 보통의 기수 로봇과 달리 질문도 하고 생각을 한다. 물론 로봇이 사고한다는 것이 맞는 표현은 아닐테지만 소설 속 콜리는 ’사고하는‘존재였다. 콜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우연재. 소설 속 배경은 현재보다 조금 먼 미래이며, 기수 로봇이 실재할지의 여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찰나의 유희를 위해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잔인하게 부리는 인간의 성향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초반에는 연재와 콜리가 어떤 상황에서 만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또 콜리가 내뱉는 로봇이 아닌 사유하는 인간에 가까운 질문과 대화들이 호기심을 자극해 미소 띤 채로 계속 읽어갔다. 그러다 연재의 언니 은혜가 등장하고, 자매의 부모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 할 때면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어쩌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을지 모른다. 출산을 한 이후,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이후 모든 소설은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보다 그들의 부모, 특히 엄마라는 존재에 관심이 갔다. 남편을 잃고 몸이 불편한 아이와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를 동시에 기른다는 것은 기쁨보다 고통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장애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조금 더 ’손이 가야하고‘, '마음을 써야하는' 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보경은 언젠가,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소방관에게 말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83쪽

이런 맥락에서 콜리가 아이들의 엄마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모범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거리를 유지하고, 기다려주며 무엇보다 ’평가하거나 탓하지 않음‘이 맘에 들었다. 물론 이런 시선으로만 소설을 읽은 것은 아니었다. 콜리가 주변의 ’어른‘들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며 영화로 더 잘 알려진 ’로봇 드림‘이나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를 떠올리게 했다. 그 이전의 SF영화 중 손꼽히는 A.I 속 데이빗이 떠올랐다. 사실 데이빗이나 다른 로봇들의 최후가 안타까워 영화를 다시 바라보고 싶진 않지만 로봇 드림이나 ’천 개의 파랑‘속의 콜리는 그(?)들의 실존을 희망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은 상상도 하기 싫다.

이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켰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자 살아갈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정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221쪽

어찌보면 로봇이라는 특수적인 상황을 제외한다면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존재가 존재에게 상처주는 이유는 ’너보다 나를‘이라는 이기심에 비롯된다. 그러니 이타적인 마음이 보편화된 사회라면 휴먼이든 휴머노이드든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던져준 것 만으로도 이 소설은 추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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