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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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뜨거운 가슴에 날 마구잡이로 끌어안도록 내버려 두었다. 몸을 빼지 않았다. 내가 속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여러 가지 확실한 문제가 있다. 숨이 막힌다. 그래도 안전하다. 109-110쪽



이민자 아파트에서 머물던 지난 시절 ‘엄마‘와 ‘나‘의 이야기를 공간을 이동하고 때로는 그들 사이에 있는 내면의 거리 또한 좁혔다 늘어나길 반복하면서 활자로 듣는다. 듣는다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상황이 마치 동화나 경험한 적 없는 연애, 역사소설을 상상하며 읽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보통스러운 ‘모녀‘의 대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대화를 이토록 공감되고 또 전혀 납득할 수 없도록 의아하게 잘 담아낸 것만으로도 비비언 고닉이라는 작가에게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의 딸이고, 또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이지만 그런 관계를 떠나 ‘부엌‘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사랑받는 아내로 사는 것이 여자로서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던 엄마가 남편, 즉 아빠와 사별했을 때의 풍경을 요약하면 절망이었다. ‘고아‘가 되어버렸다는 말로 ‘일축‘할 수 있는 그 상황에서 엄마는 부엌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의 부엌을 차지한 것은 아파트에 살던 누군가의 ‘엄마‘들이었다. 그녀가 엄마로서의 역할을 망각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으로서의 상실감에 빠져있을 때 나에게 음식을 챙겨주고 유혹적일 만큼 너른 품을 내어주기도 한다. 사별은 관계의 끝이지만 엄마의 삶에서는 ‘시작‘을 이야기 한다. 모든 존재의 생명이 아마도 그러할테지만 ‘말도 안돼‘를 입버릇처럼 하던 엄마에게 그야말로 정말 말도 안되는 사회인으로서의 시작이 바로 남편과 사별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면 흔히 제2의 인생이라 할 수 있는 ‘나‘의 결혼은 시작이지만 결국 ‘이혼‘이라는 어떤 ‘종결‘된 상황을 염두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한 날 한 시에 하늘의 부름을 받는 게 아닌이상 크게보면 결혼이라는 시작은 이혼이거나 사별로 끝나기 때문이다.



결혼식 전날 여자들 한 무리가 대거 우리 부엌을 점령했다. 모두가 우리 부엌에 들어왔다. 세라 이모, 지머먼 아줌마, 매릴린과 그의 모친이 와서 청소하고 요리하고 웃고 떠들어댔다. -중략-

그러나 신난 건 그 사람들, 우리를 뺀 일가친척과 이웃 여자들뿐이었다. 211쪽



딸인 나의 결혼식을 준비하며 엄마와 ‘나‘는 ‘공연을 하는 한 쌍의 연기자들‘(211쪽)이라고 표현한다. 서두에 발췌문을 보면 ‘나‘는 불편한 엄마와의 관계일지라도 그것은 곧 안전을 의미했다. 하지만 자신의 결혼식 전날 부엌에서 모녀의 모습은 ‘공연‘이라는 어떤 장치아래 존재하는 ‘허구‘이자, 과장되게 표현하면 ‘날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엌은 온전하게 한 여성의 공간일 때 지극히 자유롭고 풍요로울 수 있다. 끝이 곧 시작이라고 했을지라도 정작 엄마의 공간이었던 ‘부엌‘에 엄마가 없었고, 딸의 시작을 준비하는 자리에서는 존재했으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엄마가 온전하게 부엌에서 빛을 발했던 시절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설사 그곳이 진짜 자신의 부엌이 아니었을지라도 온전히 그녀가 자신의 모습으로 몰입만 한다면 부엌에서의 ‘엄마‘는 빛이었다.



한번씩 엄마는 네티의 부엌으로 쳐들어가 팔을 걷어붙이고 세 시간 동안 작정하고 부엌을 정리한 다음 반짝반짝하게 닦아주고 나왔다. 그러곤 이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네티를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정리 다 됐지? 이제부턴 알아서 해봐.‘ 네티는 아마 엄마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며 엄마를 안고 키스해주었을 것이다.78쪽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엄마와 딸의 관계라던가, 육아를 처음부터 능숙하게 하는 여성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오히려 굳이 표현하자면 ‘정상‘에 가깝다라는 미숙한 엄마로서의 공감이 아니었다. ‘부엌‘. 이라는 공간에 대한 고찰이었다.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거나, 최소한 자신만의 책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떠나 자신만의 ‘부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살림이나 하는 여편네로 전락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유야 어찌되었건 주어진 공간이 부엌인 사람에게 온전한 자신만의 ‘부엌‘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있거나 혹은 그런 상황에 내쳐지게 된다. 부엌 안 팎에서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던 ‘나‘를 떠올려 정리하자면, (시)어머니들은 딸(며느리)의 부엌에 더이상 간섭하지 않기를, 또 자신의 부엌에서 생성된 어떤 결과물이나 이야기들을 강압적으로 떠넘기거나 왜곡하지 않기를.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어머니의 부엌에 있는 동안 만이라도 부디 그녀의 입장에서 거룩하게 머물 줄 알았으면 좋겠다. 부엌에서 이 책을 읽고, 이 책의 리뷰를 적고 있는 내가 내린 가장 솔직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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