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아침 남편이 "너같은 여자와는 더 이상 살 수 없다." "나가라!" 고 외쳤다. 그가 이렇게 험한 말을 하도록 유도한 것은 분명히 나였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은 남편이었다. 오래된 부부의 갈등이라는 것은 양파처럼 무수한 껍질로 되어 있어 어느 것을 보여주며 한 쪽의 과실이라고 하면 결코 진실이 다다를수 없다. 그날 아침의 사건도 결국 아득한 세월 속에서 얽히고 설킨 갈등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는 말만 그렇게 하지 않고 크리스털 꽃병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먹을 쥐고 아주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와 2m도 안 되는 거리에 서 있던 나는 얼굴에 멍이 드는 것,마구 두들겨 맞는 것, 크리스털 꽃병에 머리가 깨어지는 것,등등을 상상하면서 극단적인 공포와 내 노예같은 존재의 가련함과 비천함에 허물어졌다. 나는 곧 일을 하러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야 했고 이웃집에선 남편에게 '야단맞는 쉰여섯 살의 소설가' 인생을 눈치챘을 것이었다. 물론 이와 반대의 장면을 보여주는 때도 있었다. 남편은 내 공포심과 달리 꽃병을 던지지 않고 이내 아이들의 잠자는 방문을 열고 말했다. "난 이런 여자와 살 수 없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이들의 의견을 묻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거의 4반세기 이상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네 식구가 살아왔던 것이다. 그세월동안 내가 도저히 결혼생활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졌을 때,그래도 이혼을 하지 못하게 했거나 그 욕구를 잠재워야 했던 것은 '아이들에 대한 책임' 이었다.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마 아빠 같이 살지 마"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큰 딸이 말했다. 예전 같으면 벌써 결혼해 자식을 두엇 두고도 남을 나이의 딸이었다. 그 애가 아주 어릴때 우리는 겁먹고 우는 아이를 모른 채 두고 이혼을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엄마 아빠 싸우지 마. 그 때 아이는 이렇게 우리를 말렸다. 그런데 지금 성인이 된 자식은 모두 부모가 이혼하고 따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사람은 따로 살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게 아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아이들은 금이 간 엄마와 아빠의 결혼생활이 자신들 때문에 억지로 봉합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날 아침 '폭탄선언'을 하고 집을 나갔던 남편이 사흘 만에 돌아왔다. 그는 이혼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도 무서웠다. 그는 단 한 순간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고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과 나누었다. 얼이 빠진 내가 "엄마는 지금 시간이 필요하다. "고 말하자 그는 "어떤 논의를 거치더라도 결론은 이혼"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집을 나가서 혼자 지낸 사흘 동안 아내라는 여자에 대한 극단적인 '환멸'을 확인하고 돌아온 듯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환멸에서 극단적인 '공포감'을 느껴야 했을까. 이 시간이후 아내로서의 내 행동은 그 '공포'로부터 도망가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사람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읁 모두 비상식적인 폭력들이다. 다음날,둘째가 구청에 가서 이혼서류를 가져왔다. 서류를 쓰기전에 남편에게 물었다. "마산 아버지한테 말했어?" "말했어." "이혼하래?" "그래.!" 내가 28년을 함께 살면서 두 아이를 낳아 기른 남편에게 아내로서 확인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모든 사무적인 절차가 끝난 뒤에 그가 한 이말은 거짓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 거짓도 시간과 함께 흘러서 과거가 되어버린 뒤였다. "아이들은 내가 데려가서 함께 살 것이고 당신은 아버지니까 아버지로서 언제든지 아이들과 만나." 서류를 쓰기 직전에 내가 말했다. 다음날, 법원데 접수를 했다. 큰 아이가 운전을 하고 어디 있는지 잘 알지 못하는 법원을 찾아갔다. 접수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 중간에 남편과 내가 내려 택시를 탔다. 우리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이미 다 눈치 챈 것 같았다. 그는 골목골목을 잘 찾아 아주 날듯이 법원 건물앞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낡고 우중충한 법원 건물. 이혼 법정은 뒤켠에 있었다. 나보다 치밀하고 날렵한 그가 건물을 찾아 앞서갔다. 가끔 뒤를 힐끔거려 내가 오고 있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건물 3층에 있는 접수처.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거의 탈진한 나는 걸음이 잘 걸리지 않았다. 그에게 매달려 함께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날 듯이' 올라갔다. 나는 뒤에서 그 날 듯한 걸음걸이를 바라보면서 그가 바라는 이혼의 의미를 언뜻 느낄 것 같았다. 그 느낌의 내 몫은 '허망'함이었다. 보통 이혼 서류는 오전에 접수하면 오후에 판결이 나는데 북부지원은 협의이혼을 원하는 부부가 너무 많아 오후에 할 수 없고 내일 다시 오라고 시간을 정해줬다. 남편은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사촌동서가 운영하는 부동산 사무실로 갔다. 이혼보다 더 무서운 '환멸과 공포'.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나는 서둘러 방을 얻기로 했다. 남편도 이혼 즉시 집을 나가주길원했다. 몇 군데 빈집을 돌아본 끝에 좋은 조건의 전셋집을 구했다. 동서는 빈손으로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나를 '바보'라고 잘라 말했다. 어쨌든 현재 살고 있는 집에 가처분 신청을 해두라는 것이었다. 나는 귀찮았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내 본래의 인생을 되찾아 소박하되 초라하지 않게 살고 싶었다. 다음날,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법원으로 갔다.판사가 나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안 나는 이혼에 대한 제도권의 '시각'을 쓰라리게 느껴야 했다. 법원 직원은 마치 길을 잃은 바보들을 대하는 거의 '버르장머리' 없게 느껴지는 언행으로 우리를 대했다. 인간에 대한 존중감이나 이혼에 이른 어른들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한 배려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혼이 이렇게 제도적으로 남루하게 취급된다면 그 반대인 결혼도 그럴 것이다. 결혼과 이혼을 한 몸이기 때문이다.........중략............
*로즈메리 생각:
전 혜린씨가 '이혼은 카인의 상처'라고 평했었죠. 본인 자신도 이혼녀였고 너무나 그 후유증을 잘 알았던 탓에.... 이 경자씨의 이글은 'herstory'에 특별기고한 것을 발췌한 것입니다.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아 실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