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당신과 내가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 때는 당신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과 나의 만남이 우연이었듯이

우리의 관계를

하나의 우연이라 규정지어 주십시오.

우리들의 잿빛 일기장 속에서

여름날의 타 버린 모닥불 같은

모든 기억들이 재로 변할 것입니다.

어느 버스간에서

당신과 내가 또다시 만나

마주서 본다 한들

그것을 스침이라 할까 운명이라 할까

두 개의 가지 사이로 밀착됏던 잎새처럼

잠깐 사이에 꽃향기는 지워져 버리고

당신은 말 없이 차창 밖으로

눈 흘려 버릴 것을!

우리의 만남을 늦가을

낙엽의 떨어짐과 같이

대단치 않은 원리로 간주합시다

우리가 최초로 만났던 그 어두운 카페 의자에

등 돌리고 다시 앉아

제가끔 식은 커피를 이별의 술잔처럼 나누더라도

그것은 부질없는 일

이별은 또 하나의 이별을 창조하지는 않습니다.

동그라미와 네모가 일치될 수 없듯이

서로 어긋난 각도에서 상대방을 애무했던 우리들

봄날의 아지랭이 처럼 무분별하게 불명확하게

이 나이껏 쓸모 없이 살았음을 생각하고

허전해질 때

그 모두가 첫우연 탓이었다고

속절없이 잊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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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2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수원 2004-03-1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에 나오는 그 거리가 아닌가요? 영화에서 본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이탈리아의 피렌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