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마룻바닥의 틈들을 쳐다보면서, 그 안의 꺼낼 수 없는 먼지들을 쳐다보면서. 내 몸에서 떨어지는 온갖 부스러기들이 저 마룻바닥 틈에도 쌓여가겠지.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먹고살겠지. 침대에 떨어진 각질들도 나와 공생하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겠지. 피부에도 어딘가에는 벌레들이 살고 있겠지.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고 집어삼키는 벌레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자는 사이에도 그렇다고. 벌레들은 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머리카락이 되고, 내 몸은 벌레들이 먹고. 며칠 동안 방바닥에 펼친 채 방치한 요가 매트 위에서 연보라색 바탕에 점점이 흩어진 불규칙한 흰 거스러미들을 보았다. 약간 거무스름한 것도, 연한 갈색을 띠는 것도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흰색이 많았다. 전부 내 몸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대부분이 그러할 텐데 매트 위에서 고작 기지개 펴는 정도의 동작 한두 개를 하루에 한두 번 할 뿐인 나로서는 놀랄 만한 양이었다. (물론 매일 청소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음. 게다가 옷도 입고 있었는데. 아, 옷 때문에 더 많이 피부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겠?)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대표주자가 머리카락이다. 잘 썩지도 않는 머리카락들, 태우면 고약한 냄새가 나는 머리카락들. 머리카락을 말리고 난 욕실 바닥을 청소기로 좀 밀라 했더니 아이가 나에게 탈모냐고 농을 건넬 정도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들. 하루 동안 세상에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모두 모으면 얼마나 될까? 하루 동안 세상의 인간이 깎은 손발톱들은 얼마나 될까? 하루 동안 세상의 인간이 눈 오줌은? 똥은? 흘린 눈물은? 우리의 분비물들은 어째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걸까? 내 발밑, 그리고 네 발아래, 드러나지 않지만 거대하게 존재하는 그곳의 분비물들, 변화하면서 흘러가면서 고여 있는. 오늘 아침 ‘장대’하게 싸지른 한때 내 몸이었던 그것(?)들은 지금쯤 어디에 이르렀을까? 축산업이 탄소 배출 원인으로 지목될 때 우리는 인간의 탄소 배출을 생각하지 않는다. 소와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소는 바다에 핵 오염수를 방류하지 않는다. 플라스틱을 만들고 버리지도 않는다. 나도 오염수를 방류하거나 플라스틱을 만들지는 않지만, 않지만... 모르긴 몰라도 소보다 내가 배출하는(나로 인한) 탄소의 양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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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으로부터 결코 단절될 수 없는 신체성에 거주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해 과학소설로 도약할 필요는 없다. 보니 스페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기체는 환경들 또는 다른 유기체들로부터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경들과 연루되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둘러싸이고, 상호작용 속에 기입된다(그러한 의미에서 환경과 인접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화기 통로와 호흡기 통로, 피부 모공, 또는 원형질 망 조직을 통해서든, 또는 수많은 유형의 세포들의 세포질을 통해서든 내부에서부터 환경과 인접한다. 인간 몸은 수많은 유기체들의 집합체이고, 대장의 대장균, 피부에 있는 미생물과 같은 유기체들 중 대부분은 건강한 생활을 위해 필수적이다. [......] 자아 등등에 대한 매우 다른 심리학은 우리의 내부와 외부 접촉면들을 통해,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내뿜는 어떤 무엇(우리의 날숨, 몸 머리 복사작용, 쓰레기, 기타 등등)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향해 열려 있고 환경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378~379p)


"... 배러드는 포스트휴먼 윤리의 일부로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다. 내부도,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내부로부터 시작하는 내부-작용하기 그리고 세계의 생성 속에서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내부-작용하기만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 (3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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