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두 번 보고 각본집 두 번 읽고 써보는 주절주절.
일차 폭력으로 인한 이차 폭력. 이 말을 떠올리게 만든 인물, 홍산오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홍산오, 그는 죽기보다 감옥가기를 싫어하는 인물이다. 한 여자 오가인을, 그에 의하면 '사랑'했다. 그는 그의 방식대로 사랑했고 그의 방식대로 죽음을 택했다. 죽는 방식도 폭력적이다. 가위, 피, 추락. 그런데 계획한 바는 아니지만 사랑하는 오가인이 보는데서 그렇게 한다. 폭력에 폭력을 더한 셈이다. 자기중심주의라고밖에... 정말 홍산오가 오가인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나? 죽으면서까지 트라우마를 만들어주는 게 사랑인가? 홍산오를 끌어안고 해준을 올려다보는 가인의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같다. "이게 남자들이 사랑하는 방식인가요?"
이 방식은 송서래가 택한 죽음의 방식과 대비된다. 산오의 "... 너 아녔음 내 인생 공허했다"라는 말은 얼핏 감동적으로 들리지만 이건 사랑고백도 뭣도 아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다. 항상 '나'가 세계의 중심이지. "여자들은 왜 그런 쓰레기 같은 새끼들하고 자요?" 산오의 이 말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포인트는 "자요?"다. "(걔랑) 잤니?"와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사귀어요? 도 아니고 결혼해요? 도 아니고 자요? 이 말은 남자들이 '여전히' 사랑을 모른다는 말로 들린다.(사랑 = 섹스) 그래서 중요한 대사다. 해준이 산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설득을 위해서였거나 말거나 간에. 더군다나 똑같이 비슷한 말을 나중에 해준도 하지 않나. 이 두 남자가 만들어내는 장면에서 그들이 '사랑'한다고 믿는 여자들은 철저히 타자가 된다.
<헤어질 결심>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이밍이 맞지 않는, 사랑. 그러나 본질은 그게 아니다. 타이밍은 늘, 맞지 않게 되어 있다. 이성애에 있어 사랑에 대한 생각,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은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루어질 수 없어서, 어긋나서 슬픈 게 아니다. 사랑을 모르는 남자와 사랑을 아는 여자, 우리는 그 사실에 슬퍼해야 한다.
그러면 서래와 해준은 어떠한가.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서래는 상황을 적확하게 본다. 해준의 머리꼭대기에 있다고 말해도 좋다. 사람이 어리석어지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자주 그 지점에 도달해버려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순간들을 갖는다. 서래는 남자들의 사랑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해준이 말한 적 없다던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으며 그의 사랑이 언제 끝났는지 안다. 그의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것도, 비겁한 것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초반 서래가 해준에게 보이는 관심과 행동들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호기심, 지금껏 보지 못했던 남자의 유형에 대한 호기심일 확률이 높다. ("말씀. ... 아니 사진." 해준은 이걸 '같은 부류'로 생각하는 근거로 삼지만 틀렸다. 서래는 '말씀' 부류다. 해준은 계속 틀린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남자의 유형,이라는 말은 관객에게도 유효하다. 여전히 찌질하고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여전히 폭력적이고 여전히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진 전형적인 남자이지만, 그래도 지금껏 보지 못한 유형은 맞다. 과연 그런가 생각은 좀 해야 한다. 그저 요리 좀 하고 눈썰미 좀 있다고 해서 과대평가를 하는 건 아닌가 의심해봐야 할 지점이다. 잠깐의 호의나 친절이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담배. 사랑하니까 이해해준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해준은 동료들에게 폭언, 폭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데 막상 자신은 피의자를 두드려팬다. 욕설은 하지 않지만 상처가 되는 말들을 서래에게 한다. 폰을 바다에 버리라고 말만 하고 증거를 없애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스스로 '품위' 있는 남자니까.
어쨌거나 서래는 해준 때문에, 혹은 해준을 위해서, 혹은 해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죽은 게 아니다. 서래는 다 알아버려서 죽었다. 사람도, 세상도. 탕웨이의 아우라에 가려져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방인의 고달픈 삶. 밀입국 중국인. 영화에서는 외국인으로 나오지만 같은 한국여성이라 해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서래의 삶이 훨씬 고달플 뿐. 안 그래도 잘 보이지 않는 그 처절함마저도 아우라에 가려졌다. 반면에 서래가 보여준 당당함은 가려질 수 없는 것이었다. 가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자주 부족한 '당당함'. 서래 캐릭터가 갖는 양가성. 혹은 장단점. 어쨌거나 해준이 서래의 죽음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다. 기폭제가 될 수는 있었겠다. 세상은 서래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고 유린했다. 사람에 대한 약간의 희망을 해준에게서 보았으나 그것 역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끝의 끝에서 마지막 불이 꺼졌다. 죽음은 서래가 행한 다른 방식의 사라짐이다.
해준은 서래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다. '작고 귀여운' 아내 정안에게는 없는 매력의 소유자. 그가 중국인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국적을 알기 전에 이미 해준은 서래에게 반했으니까. 그가 서래에게 한 말, "서래씨는요, 꼿꼿해요."는 스스로에게 바라는 이미지이다. 남편, 경찰, 아버지로서 꼿꼿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자부심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스스로 품위있기를 바라지만 자신은 없어보인다. 사랑은 투사이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투사해 그 환상을 좋아하는. 서래가 꼿꼿한 것은, 우스갯소리지만 등을 잘 굽힐 수 없는 몸을 가져서 그럴 수도 있다.(풋.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적 있다. 그는 항상 자세가 '꼿꼿'했다.) '자부심'이라는 단어는 해준에게 매우 중요하다. 마치 그것만이 그의 삶에서 의미가 있어보인다. 이 지점도 매우 중요한데, 남자들은 흔히 자부심을 자존심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준이 '붕괴'되었다고 한 말은 자존심의 붕괴일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한 채 서래를 범인이라 생각하고(배신 혹은 기만당했다는 자책) 어떻게든 서래가 범인임을 입증해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노력. 어리석고 어리석다... 그렇다면 해준이 서래를 찾아 바닷가를 헤매게 된 이유는? 서래가 범인이 아님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그동안 오해했던 것을 서래에게 사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품위'있는 형사니까. 설령 그가 다시 서래를 만났다 하더라도 뻘소리를 할 확률 100%. 그는 사랑이 무언지 계속 모를 것이다. 정안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죽을 때까지 서래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해준이 깨달았다고 치고 하는 말이다. 아닐 확률이 높지만.) 해준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사랑(서래)이 아니라 그의 자존심이었고, 서래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사랑(해준)이 아니라 서래 자신이었다.
서래가 중국인인 것은 여성과 남성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절묘한 장치였다. 아마 이 부분에서 많은 여성들이 공감했을 것이다. 반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다. 정안과 해준이 그랬듯이, 가인과 산오가 그랬듯이, 서래와 해준이 그랬듯이. 이 영화의 주제는 여남 간 소통의 불가능성, 바로 그것이다. (뭐 원래 인간 사이에 소통이라는 게 불가능하기는 하다. 쩝)
"뭐라고요? 한국말로 해 줘요."
(한국말로 하면 과연 알아들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 서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 있다. 연수다. 서래와 가장 친밀한 사이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
+ 서래가 죽음으로 사라지는 건 좀 아쉬웠다. 처음엔 그냥 아쉬웠는데 가만 생각하니 무수한 영화들에서 얻어맞고 상처입고 죽어 사라지는 여성들,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죽어 사라지는 여성의 재현, 이라서 아쉬운 것같다. 잘 만든 영화인데 군데군데 이렇게 반복재현되는 것들. 현실을 반영해 굳건한 남성의 무너지지 않는 세계와 자꾸만 흔들리고 무너지는 여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어디까지 반영이고 재현이고 어디에서 재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건지 좀더 고민해 봐야.
+ 해석은 내 마음대로.
(알라딘에는 영화이미지를 올릴 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