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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좌석에 앉아 두뼘도 채 되지 않는 작고 두꺼운 유리창으로 내려다보는 땅, 점점 작아지고 작아져서 점을 마구 찍어놓은 것처럼 구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일 때 느끼는 감정. 나를 멀리멀리 띄워놓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아주 잠깐의 시간.
책을 읽으며 떠오른 이미지는 이런 것이었다. 무수한 모래알 중 하나인 나, 또다른 하나들인 사람들. 작은 모래알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기는 인간의 죽음을 생각하기보다 훨씬 어렵다. 프롤로그를 읽으며 떠올린 이미지와 생각들은 글을 읽어나가는 내내 비슷하게 머리에 남아있다. 강렬한 프롤로그, 거기에 맞춤하게 이어지는 글들. 불규칙하고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들이 인물들을 헤집고 엮고 흐트린다.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고 그 사이를 생각과 감정이 흘러다닌다. 뜻밖의 인물이 튀어나와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 걸까?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 다른 생각, 다른 세계에 연결되어 있을까? 책을 읽으며 만나는 몰랐던 새로운 이름, 새로운 작품들을 찾아보게 된다면 또 어떤 인연이 나에게 다가올까? 알고 싶어하는 마음, 그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엄청나게 무섭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알기는 불가능한 일이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알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고 노래 가사를 쓴 사람은 이미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무 생각 없이 내뱉던 말이 때로는 진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사가 헷갈려서 찾아보니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다.^^;;; 잘못 알고 있었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책 속 이 사람들, 끼리끼리 노네?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설령 자기 자신을 투사하는 욕심의 결과라 할지라도, 시대 안에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연결짓고 확장해나간다. 항상 상승효과만 있지는 않지만 그런 관계들에서 말과 글과 행동이 나온다. 이 끼리끼리는 어쩔 수 없는 걸까. 조금 쭈그러드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확실히 욕심의 결과다. '이름'에 환상을 품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우주를 생각해라. 나는 티끌보다 더 작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먼지같은 존재이며...ㅠㅠ (나랑 친구할 먼지알갱이, 손?) 또한 똑똑하고 뛰어난 그들 역시도 사람이기에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똑같이(물론 인식의 정도가 다르니 감정의 깊이도 다르겠지만), 그러니까 비슷하게 느낀다는 사실에는 조금 위로를 받는다. (위로 어쩌구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님? 나 좀 웃김. 욕심의 화신이로구나. 사실은 조금도 위로 안 됨. 자기비하. 역시 나 웃김. 인간은 좀 웃긴 존재이니 나도 웃긴 걸로. 비하하지 말고 이젠 비상 좀 하지?)
"고립과 소외, 자기 자신을 "타자"로 인식하는 경험은 바로 이 가시성의 장막에서 비롯된다. 이 장막은 동류의 슬픔으로 슬퍼하고 동류의 갈등으로 갈등하는 다른 수많은 이를 보이지 않게 감추며 자기 자신의 본성마저도 외면하게 만든다. 이 장막을 걷어내야만 우리는 타자화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멜빌과 미첼의 시대에서 한 세기가 지난 후 미국의 시인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우리가 가장 상처 입기 쉬운 상태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일은 또한 우리에게 가장 큰 힘을 부여하는 원천이기도 하다"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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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그 일을 겪는 당사자도 잘 모를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친밀함의 종류는 "우라니아인" 혹은 "퀴어" 혹은 다음 시대에 등장할 그 어떤 꼬리표로도 규정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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