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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발로 찬다는 행동을 상상해 보자. 쉽게 공을 차서 하는 축구가 생각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자. 누군가 발로 차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대체로 공격성이나 폭력이라는 것은 좋은 감정보다 나쁜 감정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때려주고 싶은 놈 정도가 되어야 그런 감정이 생긴다고 할까.
그런데 왜 좋아하는 그 아이를 발로 차고 싶은 걸까?
어린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논리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밀의 행동으로 상대의 몸을 만지거나 한다. 원숭이들이 몸속에 이를 잡아주듯이 말이다. 그리고 친밀감을 나타내고 싶을 때도 그런 행동을 하기도 한다.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은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자.
주인공인 하츠는 애정표현에 서툰 사람이다. 그녀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이길 바란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초라해 보이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런 그녀의 특이한 애정표현은 발로 찬다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대체로 애정표현에 서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과의 애정표현에 있어서 서툰 것 같다.
다들 표현하지 않아도 알겠지. 혹은 그런 걸 표현하는 것은 어색해. 쪽팔려 등등의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책 속의 하츠와 그에게 차이는 니나가와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혹은 그들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건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처럼 어느 쪽이 먼저 바라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는 문제이다.
언제나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하츠.
정작 자신은 누군가에게 뭘 해준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츠의 이런 모습은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지금껏 일본 소설을 꽤 보았었다. 재미있고 독특한 소재들도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일본 소설은 거의 의식의 흐름에 치중한 것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느낀 특징은 끝이 어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끝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끝이 약하다 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 책은 중반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언제 뭐가 시작 되서 끝날 것인지 걱정이 될 정도로 무난하게 진행된다. 그런데 마지막 맛이 좋았다. 혹은 소설이 갈수록 볼만했다. 이런 소설은 드물다.
그리고 뭐 내 나이 또래가 작가라는 것이 많은 생각을 가지게 했다. 어린 작가가 아니었다면 콘프레이크의 시식코너의 종류를 그렇게 자세히 글로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비슷한 또래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본다.
일본에서 아쿠타카와상을 받았을 때 한 심사위원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능숙하게 써내는 신인이 나타났다.”
한 마디로 나이 많은 사람은 못쓸만한 것들이 종 종 있다. 그들은 살아보지 못한 우리들 세대를 작가는 쓸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