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한번 구입하면 버릴 줄을 몰랐는데, 버리면 안되는 걸로 알고 살았는데,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새책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다. 읽기를 얼른 해치우고 중고매장에서 팔아치운다. 그래야 좀 더 좋은 가격으로 팔 수 있어서다. 그러러면 책을 깨끗하게 읽는 건 기본. 이렇게 팔아치워 받은 돈으로는 신간을 사기도 하는데 대부분 중고서적을 구입한다. 다 읽은 중고서적은 되팔기도 하는데 팔리지 않는 책이 더 많다. 낡았기 때문만은 아닌데 그 기준에 갸우뚱할 때가 많다. 신간이라고 무조건 다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따지는 일에는 서툴러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산책삼아 두어 군데의 알라딘중고매장을 들락거리는 재미가 있다. 진즉에 왜 책을 떠나보낼 생각을 못했을까....하다가 이게 가능하려면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생각에 멈춘다. 집안 여기저기에 쌓이는 책이 넘쳐나고, 시간이 있어야 하고, 가까운 곳에 중고매장이 있거나 개인간 거래를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이. 쌓아두기보다 버려야할 나이가 되다보니 버리는 일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새록새록 나오는 책도 많은데 이미 읽은 거 언제 또 읽겠나 싶어 하나하나 점검하다보니 떠나보내야 할 책이 한짐. 말 그대로 짐이 되었다. 팔리지 않는 책을 어떻게 떠나보내야 하나. 예의를 갖춰 인천 아벨서점에 들고 갈까, 폐휴지 분리수거장에 버려야 할까.


이렇게 저렇게 떠나보내고 남는 책은? 사놓고 읽지 않은 책과 세계 각지의 여행 가이드북, 현재 좋아하는 소수의 작가들 책. 다시 볼 일 없지만 힘들게 읽었던 원서 몇권. 한번 갔다온 여행지를 언제 또 간다고 여행 가이드북을 껴안고 있는 걸까? 식욕이 의욕이라면 버리지 못하는 책은 생에 대한 욕망 내지는 미련.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호시우행 2026-01-18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상 팔 땐 매입가에 비해 너무 형편없는 가격이라 종종 주저하게 되기도 합니다.ㅠㅠ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몇구절 옮기면,


'일반인과 야쿠자의 차이는 일반적인 인식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서, 성실한 이미지의 일반인 쪽이 실은 군데군데 대충 살아가는 구석이 있습니다. 반면에 건실하지 않은 인간은 어째서인지 대충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무슨 일을 하든 자멸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단언해 버리면 반론하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작은 요령을 부리는 게 일반인이라면, 작은 요령은 못 피워서 결국 큰 게으름을 피우게 되는 게 야쿠자 같은 부류가 아닐까요?'


어떤 사람이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한다고 치자. 식당을 열기가 무섭게 볶음밥 주문이 들어왔다. 밥솥에 쌀을 안쳤으나 밥이 완성되려면 아직 10여 분이 남았고 잠시후면 손님들이 밀어 닥칠 시간이다. 때마침 어제 마무리를 하며 싱크대 옆에 대충 정리해 두었던 찬밥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볶음밥, 기름과 춘장으로 달달 볶으면 모양은 나오니 이럴 때 찬밥 재활용하는 거지 뭐. 이런 순간에 대충 이렇게 볶음밥을 만드는 사람은 '성실한 이미지의 일반인'이고, '건실하지 않은 인간'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음식 만들기를 거부하며 10분 기다렸다가 새밥으로 볶음밥을 만들겠다고 목에 힘을 준다. 그 찬밥이 상했을 지도 모른다며 세차게 머리를 저을 것이다. 이 광경을 본 주인은 주방장이 참으로 고지식하다며 인상을 쓰면서 조만간 내쫓을 궁리를 하게 된다. 어디 한두번 그랬어야지. 사사건건 원리원칙을 따지니 주인은 머리가 돌 지경이다. "야, 임마, 대충해." 하면 "아니, 임마가 뭡니까? 호칭을 제대로 부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대충 살아가지 못해 결과적으로 무슨 일을 하든 자멸하기 마련인 인간이, 위 글에서 말하는 '건실하지 않은 인간' 이다. 이 '건실하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야쿠자와 연결되는 지는 잘 모르겠고, 이런 사람을 가리켜 '건실하지 않'다는 표현을 써야 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작은 요령을 부리지 못해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큰 게으름을 피우게 되는 사람. 내 가족 중에도 있다. 바닥 모를 정직성과 타협하지 않는 올곧음으로 똘똘 뭉친 사람. 옆에 있으면 내 치부와 치졸, 비겁이 드러날까 두려운 사람. 결국 이 사람은 평생 밥벌이를 할 수 없게 되고 주변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다. 야쿠자는 물론 아니고 일반인도 될 수 없는 사람. 


건실하다: 건전하고 진실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너무나 건전하고 너무나 진실하기 때문에 진실하지 못한 것과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소설에 쓰인 '건실하지 않은 인간'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야쿠자를 건실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등치시킬 수는 있겠지만. 뭔가 미흡한 부분이다.


엇그제 분당 서현역 근처에 있는 유명한 중식당에서 남편과 점심을 먹었다. 남편은 볶음밥을 나는 굴짬뽕을 먹었는데 그날 밤 남편은 복통으로 시달렸다. 화장실을 여러번 들락거렸다. 볶음밥을 먹을 때부터 맛이 좀 이상하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볶음밥이 문제이지 싶었다. '성실한 이미지의 일반인'인 주방장이 대충 밥을 볶았나 보다. 또 엇그제 동네 식당에서 생선구이를 먹는데 상에 오른 공기밥이 떡처럼 굳어 있어서 숟가락으로 떼 먹어야 했다. 아마도 이틀쯤 밥솥에서 그릇째 뒹굴다가 내 차지가 된 모양이다. 이 역시 '성실한 이미지의 일반인' 주인 아주머니가 내주신 밥이다. 나 또한 성실한 이미지의 일반인. '건실하지 않은 인간'은 이런 글을 쓰지 않을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월 중순경 인스타그램에서 '너무나 아름다워서 실제일 것 같지 않은 도시 15'라는 게시물을 보았다.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프랑스 꼴마르, 체코 체스키 크롬로프, 스위스 루체른...대부분 유럽 지역에 몰려있는데 동양쪽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의 시라카와고가 들어있었다. 대단히 주관적인 목록이지만 그것보다도 시라코와고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급호기심이 당겼다. 찾아보니 우리나라 안동 하회마을 같은, 전통 가옥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시골 마을로 숙박도 할 수 있단다. 대충 마음에 담아두었는데 마침 올해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될 항공 마일리지가 있음을 갑작스럽게 발견했다. 보너스 항공권이라고 공짜는 아니어서 '세금 및 유류할증료' 라는 명목으로 102,800원을 지불했다. 도착지는 나고야.


막상 현지에 가보면 호텔 숙박이나 버스표 끊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닌데 여행 전 국내에서 예약이나 예매를 앞두고는 머리가 지끈거린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여행자수표를 발행하고, 필름 카메라 목에 걸고, 손에는 지도를 펼치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어설프게 물어가며 길을 찾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이 문득문득 그리워진다. 스마트폰 없이는 비행기 탑승도 어려운 시대. 그러나 AI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그러면 여행이 너무 쉬워지잖아. 나고야 출발 시라카와고행 직행 고속버스 예매와 시라카와고 민박 예약을 해냈다. 어떤 일이든 해놓고보면, 알고보면 별 것 아닌 법. 두 번째는 쉽게 하련만 ...여행 준비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셌음에 틀림없다.


재미도 없는, 자랑거리 같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를 내내 생각해본다. 나에겐 추억이고 기록이지만 이런 게 세상살이에 무슨 보탬이 될까도 생각해본다.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나 혼자 알고있기에는 좀 아까워서가 아닐까. 내 인생에서 며칠을 뚝 떼어낸 사건인데...그리고 시라카와고가 꿈결에 본 동화같은 세계 같아서. 야스나리의 <설국>에 열광하듯이 어떤 한 마을에도 열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나고야에서 시라카와고까지는 고속버스로 2시간 40여 분이 걸린다. 그 길지 않은 거리를 주파하는데 크고 작은 터널 50여 개를 통과한다. 무엇보다도 시라카와고에 가까와질수록 쌓인 눈의 두께가 달라진다. 터널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탄성도 조금씩 커진다. 드디어 마지막 터널을 지나면 <설국>의 첫 문장을 자연스럽게 읊조리게 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설국>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따로 있지만 뭐 어떠랴. 눈의 고장은 마찬가지.



갓쇼즈쿠리 집락촌.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일명 합장촌.

에 불을 밝히는 라이트업 행사가 연중 행사로 있는데 거의 로또 수준의 행운이 있어야 참가할 수 있다고 한다.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집




하룻밤 머문 민박집. 여러가지를 느끼게 하는 하룻밤이었다.




저녁밥과 아침밥을 주는데 이건 저녁밥. 전통 방식으로 꼬치에 끼워 화로에 구운 생선이 인상적인데 짭쪼름한 게 맛있어서 꼬리까지 먹어치웠다.




시라카와고 버스 터미널 게시판에 있는 사진을 찍은 사진. 무언가를 지켜내는 장중한 아름다움. 80년 만에 지붕을 교체할 때는 텔레비전 방송까지 했다고 한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봤으니 저 장면까지 보고 싶다면 욕심 되시겠다.




내가 찍고 내가 감탄한 사진. 우리 나라의 산과는 다른 일본 맛이 나는 풍경.


















<설국> 표지에 쓰인 사진이 바로 시라카와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5-12-1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아름다워서 실제일 것 같지 않은 도시 15‘ 에 선정될 만합니다. 초가 지붕 위에 앉은 새떼인 줄 알았더니 사람이군요.

nama 2025-12-14 19:26   좋아요 0 | URL
옛 것을 지키며 사는 게 쉬워 보이진 않지만, 구경꾼 입장에서는 참으로 볼 만합니다. 하룻밤 머물며 보니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오더군요.
관광객이 몰려드는 것도 장관이고요.
 

책상 앞에 앉기가 이렇게나 힘들다니... 딸이 독립하니 얼떨결에 친정 엄마가 되었고, 대장내시경으로 용종을 제거하면서 체면을 구겼던 비상사태를 벗어났고, 6도 6촌 생활(도시에서 6개월, 시골에서 6개월) 중 다시 도시로 돌아왔고, 도시로 돌아왔으니 잠시 중단했던 한겨레신문을 재구독하게 되었고. 벼르고 별러 남편 친구들 모임으로 남반구를 다녀왔고. 그리고 오늘은 난생 처음 골다공증 주사를 맞았다. 늙으면 늙은대로 새로운 세상이 다가온다는 걸 깨달은 사건. 다사다난한 와중에도 2월에 무지개 다리를 건넌 아진군이 무시로 떠올라 조용히 한숨을 삼키곤 한다.


도무지 책이 읽히지 않는데 어제는 서재 이웃님의 글을 읽고는 다급하게 영화 <국보>를 보았다. 주문한 책도 조금전에 도착해서 개봉을 기다리는데 이 책은 또 언제 읽을라나. 그간 여러 권을 들었다 놨다 했는데, 그중 끝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글쓰기에 관한 책은 일부러 피하는데 이 책의 저자인 김진해 교수의 글을 좋아하는지라, 분야 불문하고 눈으로 가슴으로 읽었다. 


p. 261~263

'1111법칙'이란 게 있습니다(이 글을 쓰면서 만들었습니다, 하하). 우리는 살면서 1000권의 책을 사거나 빌리거나 구경합니다. 그중에 100권을 읽습니다. 그중에서 10권이 마음에 남는 책입니다. 그중에서 1권이 자신의 세계관, 철학,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인생 책'입니다. 그 1권도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중요한 건 1000권의 책이 내 앞을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나머지는 자동으로 됩니다.

  글쓰기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살면서 우리는 1000편의 글을 끄적거립니다. 그중에서 10분의 1 정도가 글로 완성됩니다. 그중에서 열 편은 그럴듯한 글입니다. 그중에서 하나의 글만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담은 '인생 글'이 됩니다. 그 글도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때론 아직 쓰지 않은 글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욕심부리지 말고 1000편의 조각 글을 무심히 만들어내는 겁니다.

   (중략)

  모든 책은 '자신'에게로 수렴됩니다. 책을 지나치게 세심하게 읽는 것은 읽는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책 읽기는 잠자고 있는 자기 고유의 시각을 발견하는 실마리 정도의 역할이면 족합니다. 책은 신줏단지가 아니라 '나'의 실마리입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이 책은

내 앞을 무심하게 지나가게 하기에는 아까운 책.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5-12-02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11법칙, 나름 생각을 많이 하도록 만듭니다.

nama 2025-12-03 06:21   좋아요 0 | URL
누군가는 이 법칙을 콩나물에 물주기로 표현합니다. 물이 밑으로 다 빠져나가는 듯하지만 그래도 콩나물은 그 물 덕분에 성장하니까요. 그러고보니 이 알라딘 서재는 콩나물 농장 같습니다. ㅎ
 
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누구인가? - 근세 초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4
김원중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은 책이지만 야무지고 알차다. 목차를 잠시 살펴보면, 


- 머리말ㅣ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누구인가?

1 유럽 인들은 왜 먼바다로 나가려고 했는가?
2 어떤 지식과 기술의 발전이 대항해를 가능하게 했는가?
3 포르투갈은 아시아를 정복하고 지배했는가?
4 에스파냐 정복은 포르투갈 정복과 어떻게 달랐는가?
5 아메리카의 정복자들은 누구이고 그들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6 대항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글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거꾸로 책을 읽은 후에 이렇게 질문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읽기가 바빠서 실천하기 쉽지 않겠지만. 글자 빽빽한 책만 읽다가 이렇게 요약이 잘 된 책을 읽으니 달콤하다.


기억할 만한 두 가지를 적어본다.


* 에스파냐 정복은 포르투갈 정복과 어떻게 달랐는가?

p. 103  이처럼 정복 이래로 꾸준히 모습을 갖추어 간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제국은 포르투갈의 아시아 제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유럽 인들의 진출의 영향이 가장 크고, 가장 지속적으로 나타난 곳이 이곳 아메리카였다. 이곳에서 에스파냐 인들은 원주민들과 무역을 하거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 정착했고, 아메리카의 거대한 영토와 수많은 현지인들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제국을 건설했다. 1600년 경 포르투갈 인들이 서아프리카에서 마카오에 이르기까지 몇몇 요새와 섬들에만 머물러 있을 때 에스파냐 인들은 이미 아메리카에 에스파냐 본국보다 몇 배나 더 큰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p.97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발견'한 포르투갈 인들은 그 소유권을 현실화할 힘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에 비해 에스파냐 인들은 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p. 99  에스파냐의 해외 사업이 정복과 정주와 식민화 쪽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한 원인은 모국에서 유래한 것도 있고 아메리카의 지역적 상황에서 유래한 것도 있었다. 재정복운동은 카스티야에서 영토 정복과 정주의 전통을 확고하게 확립해 놓고 있었다. 그러므로 1492년 재정복운동이 완성된 시점에서 볼 때 에스파냐가 아메리카에서 계속해서 영토를 획득하고 재정복을 확대 연장하는 것에 관하여 고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콜럼버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카리브 해는 인도양에서 포르투갈 인들이 발견했던 수지맞는 교역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본토 내륙에 사는 훨씬 개화된 원주민들도 백인들과 지속적으로 교역할 만한 물품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에스파냐 인들이 볼 때 아메리카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오로지 금광과 은광, 진주 어장, 비옥한 토양 뿐이었다. 이것들을 수탈하기 위해서는 몇몇 해군 기지를 발판으로 하는 해상 제국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복과 식민지화,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한 원주민의 노예화였던 것이다.


** 원주민의 노예화에 대해

p.125 (각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열등하고, 그들의 삶의 목적은 더 우월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리스 인들에 비해 선천적으로 열등한 종족은 노예로 써도 된다고 주장했다. 또 선천적으로 열등한 종족의 저항으로 야기된 전쟁에서 포로가 된 사람들은 노예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 이론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아무도 노예 제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16세기 이후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의 논리는 서구에서 노예 제도의 정당성이 도전을 받을 때마다 그 윤리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인종주의를 자극했고, 특정 '인종'의 노예화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노예 제도를 유지하려면 열등한 인간으로 분류되는 집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의 뿌리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구나....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