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밍 업 - 문장과 소설과 인생에 대하여
서머싯 몸 지음, 이종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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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편견이 있었다. 무려 ‘1938의 작품인데다 ‘64외국작가가 쓴 책이라니! 유행지난 옷처럼 식상하지 않을까. 고루하지 않을까. 외국인과 정서가 어긋나지 않을까. 나는 이 책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403페이지의 두께감도 부담을 더했다.

일단 겉표지를 넘겼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다. 소설도 아닌 글이 다음 내용을 궁금하게 만든다. 작가의 문장과 생각들이 날렵하게 스며들었다. 미사여구 없이 문장이라는 주제를 향하는 직진성이 마음에 든다. 80여 년 전을 살던 작가의 생각에 이리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머싯 몸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내 문장은 분명함, 단순함, 좋은 소리를 지향해야 한다(p45)’ 그의 문장은 작가의 의도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원문을 읽지 못해 좋은 소리를 지향 했는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분명하고 단순한 문장을 구사한다는 점은 번역된 내용으로도 충분히 감지되었다.

 

서밍 업은 문장과 연극과 소설과 인생에 대한 서머싯 몸의 문학적 자서전이다. 요즘 문장에 대한 고민이 점점 커지기에 문장론이 담긴 첫 번째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좋은 문장은 노력의 흔적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종이에 써 놓은 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써진 것처럼 보여야 한다.(p60)’ 어미를 바꾸어보아도 자연스러운 문장이다. ‘좋은 문장은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써진 것처럼 보인다.’하고. 뛰어난 시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느끼는 사실은 한붓그리기를 한 듯 술술 써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막상 시를 써보면 절감한다. 그리 만만치 않은 과정이라는 것을. 그건 생밤을 깎는 과정과 흡사하다. 갈색의 두꺼운 겉껍질과 까슬까슬한 속껍질을 지나면 섬세한 칼질과의 싸움이다. 깎아지른 밤이 탄생하기 위해 얼마나 디테일한 각도의 보정이 필요한지 깎아본 사람은 안다.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를 때가 쉽게 써졌다. 2006년부터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14년째다. 어떤 내용으로 쓸지 구상만 떠오르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데 어찌 된 게 그만큼 써댔으면 걸리는 시간이 짧아져야 하는데 점점 늦어지고 있다. 뼈대를 구성하는 시간은 비슷한데 퇴고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일단 쓰고 나면 나의 문장들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메뚜기가 된다. 전체적인 흐름에 어긋난다 싶으면 문단 전체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일부분이 다시 부활하기도 한다. 고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전체의 3분의 2정도는 되는 듯하다.

걸어온 시간만큼 더 가면 나아질까. 지금으로서는 가망이 없어 보인다. 이제는 낱말 하나, 조사 하나도 떼었다 붙였다 바꾸며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껄끄러워지는 중이니까. 됐어! 이 정도면 음하하! 뿌듯하게 부르짖으며 서재블로그에 떠억 올리고 싶단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쩜쩜쩜. 뭔가 조금은 더 나올 것 같은데 어정쩡한 상태로 끊게 되는 응가처럼 매번 찜찜하다. 단 한 번도 깔끔하게 쾌변한 기억이 없다, .

 

나의 글을 돌아보게 된다. ‘내 영혼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표류하여 불편하게 여겨온 생각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p22)’ 서머싯 몸의 생각에 동의한다. 써야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품고 있기 어려워지면 생각이 밖으로 빠져나온다. 생각들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하므로 고통스럽지만 글로 마주한 생각은 묘한 희열을 가져온다. 그래, ‘해방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다만 나의 글이 혼자만을 위한 감정의 배설이나 넋두리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서재블로그에 처음으로 올렸던 글을 찾아 읽어본다.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를 읽고 쓴 내 삶의 주인으로라는 제목의 글이다. 내 리뷰의 시작이 담겨있다. 7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다소 나아진 듯하다. 시간과 경험은 내적 성숙을 가져다주고 글은 써본 만큼 느니까. 첫 글을 냉철하게 분석하니 좀 장황하다. 떡집 가래떡 나오듯 주저리주저리 뽑아지는 문장들이 지루하다. 혼자 말하고 혼자만 웃는 인간처럼 갇혀있는 느낌이다.

 

장황한 글은 매력이 없다. 이건 길이의 문제가 아니다. 길어도 속도감이 있는 글은 독자를 마지막으로 순간 이동시켜주니까.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어디서 들은 내용 같거나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면 하품이 나온다. 내가 아니어도 쓸 수 있는 글은 재미가 없다.

과감한 버리기와 팔딱거리는 표현이 절실했다. 그래서 시를 썼다. 시는 배추 겉잎 다 떼어내고 고갱이만 남기는 과정이니까. 문학적인 기초도 없이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초라한 시들이 적립금처럼 블로그에 차곡차곡 쌓였다. 버릴 것이냐 남길 것이냐 매번 그것이 문제였다. 힘들게 길어 올린 문구들이 아까웠지만 내버려두면 지루했다. 현명한 버리기가 필요했다.

시 쓰기는 청소하기와 비슷했다. 청소의 시작은 비우기이다. 새 물건이어도 쓰지 않으면 내게는 쓰레기나 마찬가지이다. 주제와 상관없는 문장은 화려한 모양새를 갖춘 쓰레기와 같다. 이런 생각을 갖자 버리기가 수월해졌다. 시의 각 연에 비슷한 무게감을 주듯 독후감의 문단들도 균형 잡힌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문장의 소리 팟캐스트>에서 이강산 소설가의 나비의 방편을 들었다. 작가가 설명하는 작품 속 인물은 실존 인물이면서도 가공인물이었다. 소설이 현실 같고 현실이 소설 같은 세상이다. 소설가는 주제에 맞게 등장인물들을 변형시켰던 것이다. 서머싯 몸의 말이 떠올랐다. ‘소설은 예술가이고, 예술가는 삶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자기 목적에 맞게 수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p279)’ 많은 소설이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수정된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가공인물들은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듯 작가의 생각을 전달하는 아바타가 된다.

정상에 대한 서머싯 몸의 생각도 소설에 적용된다. ‘정상은 당신이 발견하려고 애쓰지만 별로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것이다. 정상은 이상(理想)이다.(p91)’ 의대에 다녔던 사촌 언니가 시체 해부에 대해 해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해부학 책에 나온 것처럼 사람의 장기가 그 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제대로 있는 경우가 없어. 심장이 왼쪽에만 있는 줄 알았지?” 정형화된 틀은 없는 걸까. 우리 몸 뿐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들도, 어쩌면 정상적인 삶도.

 

얼마 전, 기도의 목적이 진정으로 타인을 위한 것인지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와 연관된 문장이 있어 화들짝 놀랐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쾌락만을 추구하는데, 그가 남들을 위해 희생하는 경우는 그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이런 희생을 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것이다.(p320)’ 누군가 말했다. 이타적인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이라 여겨질 수 있다고. 남을 위하는 행위가 결국 자신의 기쁨을 위한 것이니. 다소 극단적인 뾰족함이 담긴 생각이지만 한 때 내가 했던 생각을 과거의 누군가 했다고 생각하니 묘했다.

위안을 얻기도 했다. ‘노년에는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고, 비록 종류가 다르지만 청춘의 즐거움 못지않다.(중략) 노인은 시간이 더 많다.(p366)’시간이 더 많다는 문장에 웃었다. 너무 공감이 가서. 큰 아이는 타 지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둘째 아이는 고3이라 밤 1030분 넘어서 집에 오니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할 수가 있다. 다만 이에 상응하는 체력이 뒷받침되지 못해 날아갈 듯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시간이 많아졌다. 그 나름의 즐거움이라. 희망적이다. 인디언 추장의 현명한 말처럼 64세의 노작가가 했던 말이니 어느 정도 믿어보고 싶어진다.

 

초고에 썼던 첫 문장이 최종판의 첫 문장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 독후감의 첫 문장은 책을 읽을 때마다 독후감을 썼다.’였다. 제목 없이 글을 쓰다 일단 저장하면 첫 문장이 저장된다. 그래서 이토록 민망한 첫 문장을 알아버렸다. 짐작하셨겠지만 버려졌다. 처음에 생각했던 이 독후감의 제목은 뭐였더라. 생각도 나지 않는다. 제목은 글을 쓰면서 수시로 바뀐다. 내용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써야겠다며 구상하지 않는다. 필이 꽂히는 내용이 떠오르면 무조건 노트북을 연다. 한데 쓸수록 글이 나를 당겨 손가락을 끌고 간다. 계속 생각이 흘러나온다. 받아쓰기를 하듯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인다.

글과 문장을 통해 인생을 말하는 작가를 따라갔다. 77장으로 요약된 작가의 글을 따라 나의 문장과 삶을 더듬었다. 분명 작가 자신에 대하여 쓴 글인데도 나를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글의 매력이다. 작가가 쓴 글은 나의 생각을 끌어내어 글을 쓰게 하고, 내가 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마도 당신의 생각을 끌어냈을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미노처럼 바로 그 순간 글의 매력은 마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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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06: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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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16: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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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16: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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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17: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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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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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만 하면 몸은 피곤에 흠뻑 젖은 빨랫감이 되었다. 간헐적인 두통과 함께 걸핏 하면 체한 듯 명치가 답답해 액체소화제를 음료수인양 마셔댔다. 격하게 일하기가 싫었다. 평소에도 딱히 좋았던 건 아니지만 심한 거부반응이 일었다. 가끔 식은땀도 났다. TV에서 드라마 오빠를 영접하지 않았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농담으로 넘어갔을 말들이 뾰족한 침이 되어 고막을 쿡쿡 찔렀다. 혹인 줄 알고 찾아갔던 산부인과에서 새끼손톱만한 고름을 짜냈다. 다음날에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무릎 때문에 관절 병원에 가서 X-레이 사진을 찍었다. 아프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이틀이요. 너무 예민하신 것 같네요. 약은 안 드릴 게요. 물리치료만 받고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물리치료 한 번에 찌릿하던 증상은 금세 날아갔다. 무릎은 여전히 말끔하지 않지만 지난 한 달간 몸에서 일어났던 변화의 데이터들은 한 단어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의 일생에는 몸과 마음을 뒤흔드는 시기가 필연적으로 두 번은 오는 듯하다. 그 시기는 성호르몬의 분비와 관계가 깊어 보인다.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몸에서 남과 여로 구분되는 시기. 신체와 함께 마음 역시 커다란 폭으로 달라지는 사춘기이다. 삶의 전 과정을 색채로 표현한다면 이 시기가 첫 번째 이유기로서 도약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시기일 거다. 이제 나는 두 번째 이유기를 맞는 중이다. 만 오십의 가파른 비탈은 높은 과속방지턱으로 다가왔다.

 

오십을 건너는 삶의 이사를 위해 평온하게 안착해있던 세포들이 짐을 꾸리는 과정이었나. 몸이 힘드니 마음이 힘들고, 마음이 힘드니 몸이 또 힘들고. 나중에는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헷갈렸다. ~ 나는 나이가 들어버렸어. 이러다 땅속으로 푸욱 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무기력한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몸이 낡아간다는 생각을 하니 혼란스러웠다.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몸의 변화에 마음도 덩달아 들썩이며 머물 곳을 잃었다.

우리가 스쳐 지나지 않고 머물 어떤 곳이 있을까?(p189)’ 줌파 라히리의 소설내가 있는 곳은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론 시간을, 추억을, 사람을, 관계를 의미한다. 46개의 장소를 천천히 지나는 주인공을 좇아가며 혼돈의 시기를 맞이한 나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었다.

내 몸과 글이 찾아가는 장소를 떠올린다. ‘내 집에서는 빈둥거릴 수가 없어. 늘 할 일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잠깐 앉지도 못해. (중략) 내게 작은 구석자리면 충분하다는 거 아니?(p55)’ 나에게 충분한 구석자리는 커피숍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내 글에는 왜 자주 친정어머니가 담기는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답은 마음이 향하는 장소였다.

 

어두운 바탕의 책 표지에 찍힌 별들을 바라보며 북쪽 하늘의 일주 운동을 떠올린다. 지구의 자전으로 별들은 천구 상에서 1시간에 15도씩 움직인다. 천체망원경에 사진기를 부착한 후 조리개를 열어두면 별빛이 계속 흘러들어 빛이 그려내는 선이 찍힌다고 한다. 사진은 하늘의 방향에 따라 다르다. 나는 북쪽하늘이 가장 좋다. 나머지 방향들은 뭔가 잘린 듯 날카롭지만, 북쪽 하늘 별빛의 선은 둥글고 부드러운 원 모양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심이 보인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북극성이다.

일주운동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관계의 본질을 찾는다. 몸과 마음의 관계, 나와 주변과의 관계, 그리고 내가 머물러야 할 곳까지. 나를 중심으로 멀고 가까운 관계가 지속되는 시간을 선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 비슷할까. 사실 얼핏 동심원처럼 보이는 그 어떤 선도 완벽히 닫히지 않는다. 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으므로 선은 길어봤자 밤의 길이만큼의 시간인 180도 가량을 넘을 수 없다. 실제 일주운동 사진과의 차이점은 각각의 지속시간이 다르다는 점일 뿐 이들은 모두 언젠가는 떠난다. 이런 이유로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리라.

 

영원히 머물게 되는 곳은 없다. 삶의 길 중간 중간에 다만, 우선멈춤의 순간이 존재할 뿐이다. 추억도, 사람도, 관계도. 그리고 또 다시 걸어갈 때 존재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이리라. 나를 담은 많은에서의 멈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두 번째 이유기의 문턱에서 우선멈춤을 한 것은 마음이 따라올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함께 오십의 과속방지턱을 씩씩하게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라고.

있는 그대로의 변화를 인정하자 하니 몸도 차츰 안정되어 갔다. 아름다운 오십대를 걸어가며 깊어지는 나를 꿈꾼다. 삶의 일주운동 사진을 멋지게 만들고 싶다. 내가 있을 곳은 흔들리지 않는 북극성의 자리. 몸과 마음을 함께 놓고 주변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거다. 조리개를 오래 열어두면 선이 길게 연장되듯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둘 것. 어두울수록 사진이 선명하게 찍힌다는 마음으로 너무 우울해하거나 외로워하지 말 것. 이제 마음이 머무는 곳을 따라 나의 몸을 움직이면 되겠다.

 

*p49, 3째줄 : 것일지 도 → 것일지도

p189, 7째줄 : 쌓다가 푸는 → 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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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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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부터가 우주인가. 지표로부터 350km 높이에 떠있는 국제우주정거장에 상주하는 사람들도 우주인이라 지칭한다. 실상 우주는 담벼락처럼 경계가 지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 시작이 모호하다. 팽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어디까지라는 범주를 정하기도 어렵다.

사랑에도 범주가 있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드라마에 등장하는 달콤한 장면도 사랑을 연상시키지만 증오로 얼룩진 스릴러물의 어두에도로맨스라는 말이 등장한다. 사랑이 시발점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랑의 일종인 것이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에는 수채화를 좋아했다. 도화지의 바탕이 비칠 것 같은 투명함이, 하늘거리는 보드라움이 좋았다. 비슷한 이유로 하프 소리와 고운 울림의 목소리도 좋아했다. 사랑 역시 솜사탕 맛이 날 것 같은 감정, 20대였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랑의 범주는 딱 거기까지였다.

세월은 나의 범주를 점점 넓혀주었다. 빈센트의 유화가 뿜어내는 노란빛이 강렬함으로 다가왔고, 베이스기타의 저음과 락 음악의 압도적인 사운드에 심장이 뛰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매료되었고 파스텔 톤과 다른 느낌을 주는 색채들을 알게 되었다. 사랑의 다른 빛깔에도 마음이 끌렸다.

 

소설폭풍의 언덕은 사랑의 범주를 생각하게 한다. 책이 담고 있는 사랑은 강렬하다. 사랑에 메이저와 마이너가 존재한다면 극한의 마이너 쪽에 가깝다. 칙칙한 분위기를 선호하지는 않지만 소설이 전해주는 묵직한 의미는 외면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1권의 전반부에 들어서면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된다. 복잡하게 얽힌 혼인 관계와 동명인 캐서린 때문이다. 성씨만으로 지칭되는 인물이 등장하면 린턴이 할아버지 린턴인지 아버지인 에드거 린턴인지 딸인 캐서린 린턴인지 심지어 린턴 부인인 캐서린인지 헷갈린다. 언쇼도 만만치 않은 양대 산맥이다. 캐서린 언쇼인지 힌들리 언쇼인지 할아버지 언쇼인지 언쇼 부인인 프랜시스 언쇼인지 헤어턴 언쇼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책장은 몇 번이나 도돌이표를 찍는다. 흐름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방심하면 다른 인물로 뒤집어지는 게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기분이다. 결정적인 난코스는 히스클리프 부인이다. 히스클리프의 아내인 줄 알았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보면 인물이 꼬여버린다. ! 엄마와 딸 이름을 똑같이 짓는 작명 센스라니! 캐서린이 캐서린 언쇼인지 캐서린 린턴인지. 캐서린 언쇼가 린턴과 결혼했으니 캐서린 린턴으로 불러도 된다. 엄마도 딸도 캐서린 린턴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게다가 죽은 남편과 사촌 지간인 아씨 캐서린은 한 분은 외가 쪽, 한 분은 친가 쪽이라는 게 당최 무슨 거미줄스러운 관계란 말인가. 안 되겠다! 종이 한 장을 준비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유전 법칙에 등장하는 가계도를 소설을 읽으면서 써먹을 줄이야. 문장을 짚어가면서 찬찬히 가계도를 그린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도를 파악하고 나서야 이야기의 전개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먼저 언쇼 가문을 정리하면, 1권의 여주인공은 캐서린 언쇼. 오빠는 힌들리 언쇼. 힌들리의 아들이 헤어턴 언쇼이다. 린턴 가문을 정리하면, 1권과 2권의 서브남주인공은 에드거 린턴. 여동생은 이사벨라 린턴이며, 에드거 린턴과 캐서린 언쇼의 딸이 2권의 여주인공 캐서린 린턴이다.

여기까지는 깔끔한 가계도의 배치를 보이는데 복잡한 가계도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바로 폭풍의 언덕집을 음산하게 만든 남주인공 히스클리프이다. 히스클리프가 사랑하지도 않는 이사벨라 린턴과 결혼하면서 복수극이 시작된다. 1부의 캐서린을 향해 린턴 가문에 다리 하나를 걸친 셈인데, 히스클리프와 이사벨라 사이에 아들 린턴이 태어나면서 히스클리프는 문어발식 확장을 도모한다. 자신의 아들과 캐서린의 딸을 결혼시킨 것이다.

린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린턴을 부부 관계로 연결한 가계도가 만들어지면서 바둑판에서의 집짓기처럼 폐쇄회로가 완성된다. 가계도의 가장 왼쪽에 자리한 히스클리프는 이제 관계의 사다리를 종횡무진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등장인물들에게 강력한 장풍을 뿜어댄다.폭풍의 언덕이라는 소설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자면 가계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다. 일단 이 문을 무사히 통과하면 이야기는 자못 흥미진진하고 빠르게 흘러간다.

 

사람의 몸은 탄소를 포함하는 유기체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세포로 구성이 되어있고 세포의 주성분은 단백질이니 결국 우리의 몸은 단백질이 주를 이루고 있을 터이다. 당신이나 나나 몸의 구성 성분은 거의 비슷할 거라는 얘기다. 1부 캐서린이 딘 부인에게 히스클리프에 대하여 말하는 장면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 애의 영혼과 내 영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어.(p130)’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각기 다른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말한다. 영혼의 구성 성분이라. 영혼이 가시적일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상상을 하자 기분이 묘해진다. 그렇다면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사람의 영혼은 같은 성분으로 되어있기에 서로 공명을 일으키는 걸까. 그러다 성분의 수명이 다하면 화학 변화를 일으켜 성질이 변하기에 공명이 사라지고 마음이 멀어지는 걸까.

사랑이든 삶이든 범주를 뛰어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용기인가보다. 2부 캐서린은 이제껏 가보지 못했던 폭풍의 언덕을 바라보면서 딘 부인에게 말한다. ‘하지만 여기는 내가 아는 데고, 저기는 내가 모르는 데잖아.(p300)’ 여기,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 말하며 캐서린의 시선을 돌리려는 딘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은 모르는 데를 향한다. 이로 인해 린턴 히스클리프와 이어지면서 복잡한 복수극의 희생자가 되지만 그녀의 입장이라면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정당하게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p291)’ 모르는 데를 선택할 정도의 용기를 지녔다면 스스로 선택한 운명을 감수할 준비도 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다. 피선택자에 가까워 보이는 헤어턴도 소설 말미에서는 당당한 선택자로 마무리된다. 헤어턴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바람이 휘몰아치는데 굽는 나무가 있고 안 굽는 나무가 있는지 두고 보자!(p294)’ 히스클리프가 만들어내는 바람에도 굽지 않는 나무로 남는 헤어턴의 모습은 찡한 울림으로 남는다.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재산을 빼앗긴 줄도 모르는 모습이 처음에는 억울하게 굽은 나무로 보이지만, 죽은 히스클리프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장면은 그가 굽지 않는 나무로 자라났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소설은 내내 음산한 분위기와 괴팍한 등장인물들로 둘러싸여 각기 다른 인물들의 입장에서 사랑의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준다. 히스클리프의 극단적인 행동도 마냥 악마 같은 본성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금은 이해된다. 사랑하는 히스클리프 대신 현실적인 상황에 걸맞는 에드거를 선택한 캐서린의 심리도. 히스클리프의 사랑, 캐서린 언쇼의 사랑, 이사벨라 린턴의 사랑, 에드거 린턴의 사랑, 캐서린 린턴의 사랑, 린턴 히스클리프의 사랑, 헤어턴 언쇼의 사랑, 힌들리 언쇼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온통 사랑이다.

초반에는 정서가 안 맞는 것처럼 삐그덕대다 고비를 무사히 넘기니 사랑에 관한 묵직한 느낌이 오래 머문다. 이런 것이 고전의 매력일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태풍을 뚫고 지나온 듯 여운이 길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며 온통 흔들려도 중심에는 맑은 하늘을 품고 있는 태풍처럼 작품의 껍질을 벗기며 파고들면 중심에 사랑이 있다. 기본적인 뼈대는 같은데 지점토, 찰흙 등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재료로 덧대는 소조처럼 사랑은 천차만별의 모습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공통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 영혼이 지닌 맑은 본성 같은 것 말이다.

사랑. 이토록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감정을 단 두 글자로 지칭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사랑이 포용할 수 있는 범주를 생각한다. 우주 공간이 떠오르며 겹쳐진다. 사랑을 한다는 건 우주를 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뻐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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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9-06-23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범주는 우주의 범주처럼 가늠하기도, 구분짓기도 어렵군요. 이제는 사랑이란 주제로 수많은 사연과 사례들을 듣는 현대지만,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또 처음보는 형태였어요. 이런 설정을 만들어낸 브론테도 참 대단합니다ㅎㅎ

아 저도 이름때문에 몇번이나 되감기 했는지 몰라요. 이게 무슨 언쇼인지, 이 린턴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더군요... 내 작품에 집중하라는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몰라요^^;

그러고보니 나비종님 말대로 ‘용기‘가 모두의 운명을 좌우했네요. 살아가는것도 죽는것도 누구와 함께할건지도 모두 본인들이 선택을 했고 운명을 받아들였어요. 누구하나 내 운명은 왜 이런건지 탓하지는 않았네요. 어쩌면 제가 발견하고자 했던 작가의 메시지가 이거였나 싶어요. 이렇게 나비종님의 리뷰로 많은걸 배워갑니다. 6월도 수고하셨어요ㅎㅎ

나비종 2019-06-23 16:25   좋아요 1 | URL
썩 호감이 가는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제 정서에는 맞지 않는 인간들이었지요. 소설 속 인물이지만 저런 인간도 있을까 싶더군요. 드라마화된다면 조금보다가 냉큼 채널을 돌리고 싶을 정도의..ㅎㅎ

맞아요. 가계도로 가시화하지 않으면 무지 헷갈리는 설정입니다.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서로 느낌을 공유하고 그 어렵고 짜증났던 난코스를 같이 넘었다고 생각하니 동지애가 느껴지네요. 이게 바로 함께 까는 즐거움인가 봅니다.ㅋㅋ

우리, 2번째 코스도 무사히 통과한 건가요? <설득>도 그렇고, <폭풍의 언덕>도 그렇고 깊이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와는 별개로 공감이 가는 내용들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함께 읽으니 책을 집어던져버리지 않고 끝까지 갈 수가 있어서 참 좋습니다.ㅎㅎ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 어쩐지 의기양양 도대체 씨의 띄엄띄엄 인생 기술
도대체 지음 / 예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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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위로받고 싶을 때 손이 가는 책이 있다. 일단 표지는 노란색이 좋다. 제목은 mg 정도의 질량이 적당하다. 이것저것 팽개치고 싶어도 눅진하게 눌러 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빌어먹을 상황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마취성 냄새가 배어나올 것 같은, 방수라도 된 양 마음이 글자들을 또르르 밀어낼 때 빈약하게 남은 안간힘 정도로도 겉장을 넘길 수 있는 책이다.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한 번이라도 입 꼬리를 실룩거리고 싶어, 그래서 선택했다.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라는 제목이 따뜻해서, 작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500만 뷰를 달성한 <행복한 고구마>의 맛도 모른 채 그저 펼쳐 들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택한 책인데 책속은 온통 적나라한 현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큭큭 대고 웃음을 흘리는 나를 발견한다. 호탕하게 터지는 껄껄 웃음이 아니라 쿡쿡 입을 가리고 웃게 되는 자잘한 즐거움을 준다. 몇 시간 동안 빠져 들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이다.

뒤표지를 쓰다듬다보니 뭉클 한다.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사회생활과 일상생활에서 마음의 소리로만 중얼거리는 생각들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디테일한 심리 묘사에 놀라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마음에 동지를 만난 듯 반갑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을 품고, 변변치 못한 나의 모습을 거울을 보듯 바라보며 주눅 들게 되는 순간들마다 팅커벨처럼 짠 나타나서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게 한다. 위로의 방식이 어쭙잖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미사여구 없는 직설 화법에 속이 후련해진다.

 

<리빙포인트>라는 제목으로 간지처럼 끼워진 문장들이 위로가 된다. ‘내가 지금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란 생각이 든다면/ 이 짓을 안 했을 때도 딱히 더 나은 일을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침착해지세요.’(p106), ‘오늘따라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면/ 평소에도 그랬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안심하세요.’(p147), ‘뭔가 문제를 발견해서 자꾸 신경 쓰일 땐/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지금 그 문제를 고민할 때가 아니라 더 큰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p184), ‘사람들이 비웃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 때문에 시작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불필요한 걱정입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늘 나를 비웃고 있답니다.(찡긋)’(p267) 이런 식이다.

 

어릴 때 음악 시간에 배웠던 박수가 생각난다. ‘강약약 중간약약하던 리듬감이 책속에서 출렁거렸다. 심오한 생각이 담긴 몇 줄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가뿐하게 삶의 파도를 넘어가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다. 바닷물이 콧구멍에 들어간대도, 몇 번씩 넘어진대도 힘을 빼면 반드시 내 몸을 바다 위에 떠 있게 하는 고무튜브 같다 할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에게 반짝이는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p234) 따끈한 군고구마를 반으로 갈라 먹기 직전에 밀려오는 행복감처럼 허한 마음이 든든하게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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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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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보면 그때부터였나 싶다. 고등학교 다닐 때 삭아버린 도시락밥을 버렸던 기억이, 떠올릴 때마다 울컥하던 기억이 그런대로 견딜만한 것으로 자리 잡았던 건 어떤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의 중간에 끼어든 다음부터였다. 재작년에는 백일장에 나가서 <이팝꽃처럼 솔솔> 이란 시에 그 기억을 담았다. ‘공양주로 일하던/ 어미의 소원은/ 이팝꽃처럼 솔솔/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내 새끼 뱃속에 담아/ 배불리는 것이었다// 부처님 공양하고/ 남은 밥 찐 도시락/ 어느 날 삭아버려/ 축 늘어진 이팝꽃/ 자식은 밥을 버리며/ 철없이 투덜댔다// 30년 뒤 절 마당/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이팝꽃처럼 솔솔/ 지어주고 싶었지/ 버려진 이팝꽃은/ 노모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뜨겁게/ 피어나고 있었다이렇게 글 안에 담겨가면서 이제는 건드려도 아프지 않은 딱지가 되었다. ‘서툴더라도 자기 말로 고통을 써본다면 일상을 중단시키는 고통이 다스릴 만한 고통이 될 수는 있다.(p6)’ 저자의 말이 맞았다. 일상의 고통들은 글로 봉인되는 순간 닳고 닳은 4B 연필의 끄트머리처럼 뭉툭해졌다. 독후감으로든 시로든 산문으로든 글 안에 나의 아픔들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꺼내는 순간은 쓰라렸지만 그렇게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갔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 책이다. 은유 작가는 자신의 상처조차 고스란히 드러낸 채 글을 통해 공감하고 이해하는 손길을 내민다. 다가오는 말들에 담긴 마음이 조금씩 다가오면서 사람들이 다가왔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서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나는 이 얘기를 들려주었다.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된 점이라고.(p140)’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찬찬히 살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늘 있었다. 아무 상관없는 이를 죽이는 사이코패스조차 뇌에 이상이 생겨서 나타나는 증상이니 결국 이유 없는 행동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관대해졌다.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또 좋은 점은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인지하게 된다는 점이다. ‘두 존재의 교감에는 의 동일성보다 의 연속성이 중요함을 책과 현실이 증명한다.(p37)’ 몸이 아플 때,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이 누구더라. 몇 명이 떠올랐다. ‘이란 말이 새삼 뭉클했다.

 

어릴 때의 나는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아이였다. 특히 슬픔이나 울컥함 같은 감정에 취약했다. 도무지 안타깝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공감능력이 부족했던 거였다. 예전 같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을 내용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나를 인식했다. 닭의 사육 환경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A4용지 절반만한 공간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밤에도 내리쬐는 인공의 조명 아래에서 달걀만 뽑아내야하는 암탉의 삶을 상상하니 내가 먹는 달걀이 암탉이 흘리는 눈물방울처럼 생각되었다. <달걀>이란 시를 지었다. ‘그칠 줄 모르는 장맛비처럼/ 몸뚱어리 때리는 빛줄기 아래/ 우산마냥 벌린 내 오른손만한 공간에/ 눕지도 못하는 암탉의 삶이 놓인다.// 한껏 펼친 손끝처럼 안간힘 쓰며/ 밤의 이불은 차마 꿈꾸지 못한 채/ 충혈 된 눈 부릅뜨고 생명을 뽑아낸다./ 후두두둑 눈물방울 허옇게 뒹군다.’ 시를 인터넷서재에 올리면서 생각했다. 나의 공감 능력이 조금씩 나아졌나보다 하고. 이렇게 조금씩 공감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글을 써나가고 싶다고.

 

표현을 잘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제는 떠오르는 마음을 조금씩 말한다. 사랑하는 감정이든, 기쁜 마음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정말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이다. ‘그걸 말하지 않으면 모르나 싶지만 정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 남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p173)’ 가까운 이들조차 의외로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다시금 깨달았다.

시댁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머님께서 잠시 망설이시다 말씀하신다. 얘야, 전에 내가 네 글, 너 먼저 읽고 나중에 달라고 해서 서운했니? ?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 말했던 독후감을 이제껏 안 보여줘서 말이다. 너 볼 때마다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잊어버리고 너 가고 나면 생각나고 그랬다. 아하! 전후 맥락이 파악되었다. 재작년, <맑은 꽃으로 피어>라는 제목의 독후감을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있다. 어머님에 대해서 썼어요. 자랑하듯 말했다. 수상 작품집 나오면 보여드릴게요. 그래라, 너 읽고 보여줘라. 수상 작품집은 그 다음 해에 2년 치를 모아서 나왔고 나는 당신께 보여드린다던 말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얘가 당장 보여 달라고 안 해서 혹시 서운했나 싶으셨던 거다. 전혀 아니에요! 오해를 풀어드렸다. 말씀 안하셨으면 두고두고 서운하게 해 드릴 뻔했다. 말씀을 꺼내어주신 당신께 고마웠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 겨우 말하는 것이다.(p177)’ 어쩌면 잊지 않으셨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다. 좀 더 세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송했다.

 

집에서도 혼자 있지만 집은 번잡스러운 노동의 공간이지 고요가 고이는 공간은 아니다.(p79)’ 라는 문장을 보자 커피숍에서 주로 글이 잘 써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공간은 어떠한 강요나 고통이나 힘듦의 흔적도 없는 순수한 나만의 공간이니까. <듣고도 믿기지 않는 실화>(p172~174)에서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 속이 후련했다. ‘교사나 가수 같은 직업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꿈일 수 있다는 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나는(p244)’ 이란 문장까지 오자, 편하게 숨쉬기가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건너왔지만 난 참 행복했구나. 막연하게 미안했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쓰기의 말들등 작가의 전작들도 좋았지만, 나는 이 책이 가장 좋았다. 은유 작가의 글은 강한 인력으로 마음을 끌어당겼다. 해야 할 일이 많던 순간에도 일을 제치고 책장을 넘겼다. 타인의 고통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문장들에 위안을 받기도 하고, 그런 글을 쓰는 마음이 부럽기도 했다. 가슴속 깊이 구석구석 툭 터진 상처들을 토닥이는 영혼의 결이 찡했다.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는 것(p8)’ 이란 문장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기회가 될 때마다 했던 말이다. 내가 진짜로 꿈꾸는 것은 뭘까. 진지하게 생각해보다 이 말의 맹점을 깨달았다. 습관처럼 뱉던 이 말만큼 번지르르한 것이 없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등단을 하는 건가? 딱히 그런 것은 아닌데. 그러면 글을 쓰는 삶을 사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계속 글을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오가자 내가 했던 말이 조심스러워졌다. 너무 게을렀다, 나는. 작가를 꿈으로 생각하는 사람치고 글을 너무 적게 써왔던 거다.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p145)’ 정곡을 찌르는 문장이다. 일단 그냥 써야 하는 것을.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작가라는 타이틀은 아니므로.

나의 글이 담지 못하는 한계점을 알고 있다. 시대를 말하고 국가와 민족의 고통을 나누는 거대한 글이 아니라는 것. 한동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주눅 들게 했던 점이다. ‘누구나 자신이 속박된 주제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p132)’ 는 작가의 말에서 힘을 얻는다. 작은 고통은 없다. 견딜만한 고통이 있을 뿐이다. 나의 고통이 견딜만한 것이 될 때까지, 그 과정에서 만나지는 주변의 고통들을 글에 담고자 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계속 쓰려고 한다. 이렇게 쓰다보면 나의 글이 적어도 한 사람, 이 글을 맨 처음으로 읽게 되는 이의 마음은 어루만질 수 있을 터이니.

 

 

(메모) 읽고 싶은 책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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