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퇴근만 하면 몸은 피곤에 흠뻑 젖은 빨랫감이 되었다. 간헐적인 두통과 함께 걸핏 하면 체한 듯 명치가 답답해 액체소화제를 음료수인양 마셔댔다. 격하게 일하기가 싫었다. 평소에도 딱히 좋았던 건 아니지만 심한 거부반응이 일었다. 가끔 식은땀도 났다. TV에서 드라마 오빠를 영접하지 않았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농담으로 넘어갔을 말들이 뾰족한 침이 되어 고막을 쿡쿡 찔렀다. 혹인 줄 알고 찾아갔던 산부인과에서 새끼손톱만한 고름을 짜냈다. 다음날에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무릎 때문에 관절 병원에 가서 X-레이 사진을 찍었다. 아프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이틀이요. 너무 예민하신 것 같네요. 약은 안 드릴 게요. 물리치료만 받고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물리치료 한 번에 찌릿하던 증상은 금세 날아갔다. 무릎은 여전히 말끔하지 않지만 지난 한 달간 몸에서 일어났던 변화의 데이터들은 한 단어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의 일생에는 몸과 마음을 뒤흔드는 시기가 필연적으로 두 번은 오는 듯하다. 그 시기는 성호르몬의 분비와 관계가 깊어 보인다.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몸에서 남과 여로 구분되는 시기. 신체와 함께 마음 역시 커다란 폭으로 달라지는 사춘기이다. 삶의 전 과정을 색채로 표현한다면 이 시기가 첫 번째 이유기로서 도약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시기일 거다. 이제 나는 두 번째 이유기를 맞는 중이다. 만 오십의 가파른 비탈은 높은 과속방지턱으로 다가왔다.

 

오십을 건너는 삶의 이사를 위해 평온하게 안착해있던 세포들이 짐을 꾸리는 과정이었나. 몸이 힘드니 마음이 힘들고, 마음이 힘드니 몸이 또 힘들고. 나중에는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헷갈렸다. ~ 나는 나이가 들어버렸어. 이러다 땅속으로 푸욱 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무기력한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몸이 낡아간다는 생각을 하니 혼란스러웠다.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몸의 변화에 마음도 덩달아 들썩이며 머물 곳을 잃었다.

우리가 스쳐 지나지 않고 머물 어떤 곳이 있을까?(p189)’ 줌파 라히리의 소설내가 있는 곳은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론 시간을, 추억을, 사람을, 관계를 의미한다. 46개의 장소를 천천히 지나는 주인공을 좇아가며 혼돈의 시기를 맞이한 나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었다.

내 몸과 글이 찾아가는 장소를 떠올린다. ‘내 집에서는 빈둥거릴 수가 없어. 늘 할 일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잠깐 앉지도 못해. (중략) 내게 작은 구석자리면 충분하다는 거 아니?(p55)’ 나에게 충분한 구석자리는 커피숍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내 글에는 왜 자주 친정어머니가 담기는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답은 마음이 향하는 장소였다.

 

어두운 바탕의 책 표지에 찍힌 별들을 바라보며 북쪽 하늘의 일주 운동을 떠올린다. 지구의 자전으로 별들은 천구 상에서 1시간에 15도씩 움직인다. 천체망원경에 사진기를 부착한 후 조리개를 열어두면 별빛이 계속 흘러들어 빛이 그려내는 선이 찍힌다고 한다. 사진은 하늘의 방향에 따라 다르다. 나는 북쪽하늘이 가장 좋다. 나머지 방향들은 뭔가 잘린 듯 날카롭지만, 북쪽 하늘 별빛의 선은 둥글고 부드러운 원 모양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심이 보인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북극성이다.

일주운동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관계의 본질을 찾는다. 몸과 마음의 관계, 나와 주변과의 관계, 그리고 내가 머물러야 할 곳까지. 나를 중심으로 멀고 가까운 관계가 지속되는 시간을 선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 비슷할까. 사실 얼핏 동심원처럼 보이는 그 어떤 선도 완벽히 닫히지 않는다. 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으므로 선은 길어봤자 밤의 길이만큼의 시간인 180도 가량을 넘을 수 없다. 실제 일주운동 사진과의 차이점은 각각의 지속시간이 다르다는 점일 뿐 이들은 모두 언젠가는 떠난다. 이런 이유로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리라.

 

영원히 머물게 되는 곳은 없다. 삶의 길 중간 중간에 다만, 우선멈춤의 순간이 존재할 뿐이다. 추억도, 사람도, 관계도. 그리고 또 다시 걸어갈 때 존재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이리라. 나를 담은 많은에서의 멈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두 번째 이유기의 문턱에서 우선멈춤을 한 것은 마음이 따라올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함께 오십의 과속방지턱을 씩씩하게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라고.

있는 그대로의 변화를 인정하자 하니 몸도 차츰 안정되어 갔다. 아름다운 오십대를 걸어가며 깊어지는 나를 꿈꾼다. 삶의 일주운동 사진을 멋지게 만들고 싶다. 내가 있을 곳은 흔들리지 않는 북극성의 자리. 몸과 마음을 함께 놓고 주변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거다. 조리개를 오래 열어두면 선이 길게 연장되듯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둘 것. 어두울수록 사진이 선명하게 찍힌다는 마음으로 너무 우울해하거나 외로워하지 말 것. 이제 마음이 머무는 곳을 따라 나의 몸을 움직이면 되겠다.

 

*p49, 3째줄 : 것일지 도 → 것일지도

p189, 7째줄 : 쌓다가 푸는 → 쌌다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