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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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보면 그때부터였나 싶다. 고등학교 다닐 때 삭아버린 도시락밥을 버렸던 기억이, 떠올릴 때마다 울컥하던 기억이 그런대로 견딜만한 것으로 자리 잡았던 건 어떤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의 중간에 끼어든 다음부터였다. 재작년에는 백일장에 나가서 <이팝꽃처럼 솔솔> 이란 시에 그 기억을 담았다. ‘공양주로 일하던/ 어미의 소원은/ 이팝꽃처럼 솔솔/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내 새끼 뱃속에 담아/ 배불리는 것이었다// 부처님 공양하고/ 남은 밥 찐 도시락/ 어느 날 삭아버려/ 축 늘어진 이팝꽃/ 자식은 밥을 버리며/ 철없이 투덜댔다// 30년 뒤 절 마당/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이팝꽃처럼 솔솔/ 지어주고 싶었지/ 버려진 이팝꽃은/ 노모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뜨겁게/ 피어나고 있었다이렇게 글 안에 담겨가면서 이제는 건드려도 아프지 않은 딱지가 되었다. ‘서툴더라도 자기 말로 고통을 써본다면 일상을 중단시키는 고통이 다스릴 만한 고통이 될 수는 있다.(p6)’ 저자의 말이 맞았다. 일상의 고통들은 글로 봉인되는 순간 닳고 닳은 4B 연필의 끄트머리처럼 뭉툭해졌다. 독후감으로든 시로든 산문으로든 글 안에 나의 아픔들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꺼내는 순간은 쓰라렸지만 그렇게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갔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 책이다. 은유 작가는 자신의 상처조차 고스란히 드러낸 채 글을 통해 공감하고 이해하는 손길을 내민다. 다가오는 말들에 담긴 마음이 조금씩 다가오면서 사람들이 다가왔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서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나는 이 얘기를 들려주었다.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된 점이라고.(p140)’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찬찬히 살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늘 있었다. 아무 상관없는 이를 죽이는 사이코패스조차 뇌에 이상이 생겨서 나타나는 증상이니 결국 이유 없는 행동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관대해졌다.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또 좋은 점은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인지하게 된다는 점이다. ‘두 존재의 교감에는 의 동일성보다 의 연속성이 중요함을 책과 현실이 증명한다.(p37)’ 몸이 아플 때,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이 누구더라. 몇 명이 떠올랐다. ‘이란 말이 새삼 뭉클했다.

 

어릴 때의 나는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아이였다. 특히 슬픔이나 울컥함 같은 감정에 취약했다. 도무지 안타깝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공감능력이 부족했던 거였다. 예전 같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을 내용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나를 인식했다. 닭의 사육 환경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A4용지 절반만한 공간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밤에도 내리쬐는 인공의 조명 아래에서 달걀만 뽑아내야하는 암탉의 삶을 상상하니 내가 먹는 달걀이 암탉이 흘리는 눈물방울처럼 생각되었다. <달걀>이란 시를 지었다. ‘그칠 줄 모르는 장맛비처럼/ 몸뚱어리 때리는 빛줄기 아래/ 우산마냥 벌린 내 오른손만한 공간에/ 눕지도 못하는 암탉의 삶이 놓인다.// 한껏 펼친 손끝처럼 안간힘 쓰며/ 밤의 이불은 차마 꿈꾸지 못한 채/ 충혈 된 눈 부릅뜨고 생명을 뽑아낸다./ 후두두둑 눈물방울 허옇게 뒹군다.’ 시를 인터넷서재에 올리면서 생각했다. 나의 공감 능력이 조금씩 나아졌나보다 하고. 이렇게 조금씩 공감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글을 써나가고 싶다고.

 

표현을 잘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제는 떠오르는 마음을 조금씩 말한다. 사랑하는 감정이든, 기쁜 마음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정말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이다. ‘그걸 말하지 않으면 모르나 싶지만 정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 남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p173)’ 가까운 이들조차 의외로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다시금 깨달았다.

시댁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머님께서 잠시 망설이시다 말씀하신다. 얘야, 전에 내가 네 글, 너 먼저 읽고 나중에 달라고 해서 서운했니? ?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 말했던 독후감을 이제껏 안 보여줘서 말이다. 너 볼 때마다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잊어버리고 너 가고 나면 생각나고 그랬다. 아하! 전후 맥락이 파악되었다. 재작년, <맑은 꽃으로 피어>라는 제목의 독후감을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있다. 어머님에 대해서 썼어요. 자랑하듯 말했다. 수상 작품집 나오면 보여드릴게요. 그래라, 너 읽고 보여줘라. 수상 작품집은 그 다음 해에 2년 치를 모아서 나왔고 나는 당신께 보여드린다던 말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얘가 당장 보여 달라고 안 해서 혹시 서운했나 싶으셨던 거다. 전혀 아니에요! 오해를 풀어드렸다. 말씀 안하셨으면 두고두고 서운하게 해 드릴 뻔했다. 말씀을 꺼내어주신 당신께 고마웠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 겨우 말하는 것이다.(p177)’ 어쩌면 잊지 않으셨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다. 좀 더 세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송했다.

 

집에서도 혼자 있지만 집은 번잡스러운 노동의 공간이지 고요가 고이는 공간은 아니다.(p79)’ 라는 문장을 보자 커피숍에서 주로 글이 잘 써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공간은 어떠한 강요나 고통이나 힘듦의 흔적도 없는 순수한 나만의 공간이니까. <듣고도 믿기지 않는 실화>(p172~174)에서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 속이 후련했다. ‘교사나 가수 같은 직업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꿈일 수 있다는 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나는(p244)’ 이란 문장까지 오자, 편하게 숨쉬기가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건너왔지만 난 참 행복했구나. 막연하게 미안했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쓰기의 말들등 작가의 전작들도 좋았지만, 나는 이 책이 가장 좋았다. 은유 작가의 글은 강한 인력으로 마음을 끌어당겼다. 해야 할 일이 많던 순간에도 일을 제치고 책장을 넘겼다. 타인의 고통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문장들에 위안을 받기도 하고, 그런 글을 쓰는 마음이 부럽기도 했다. 가슴속 깊이 구석구석 툭 터진 상처들을 토닥이는 영혼의 결이 찡했다.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는 것(p8)’ 이란 문장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기회가 될 때마다 했던 말이다. 내가 진짜로 꿈꾸는 것은 뭘까. 진지하게 생각해보다 이 말의 맹점을 깨달았다. 습관처럼 뱉던 이 말만큼 번지르르한 것이 없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등단을 하는 건가? 딱히 그런 것은 아닌데. 그러면 글을 쓰는 삶을 사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계속 글을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오가자 내가 했던 말이 조심스러워졌다. 너무 게을렀다, 나는. 작가를 꿈으로 생각하는 사람치고 글을 너무 적게 써왔던 거다.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p145)’ 정곡을 찌르는 문장이다. 일단 그냥 써야 하는 것을.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작가라는 타이틀은 아니므로.

나의 글이 담지 못하는 한계점을 알고 있다. 시대를 말하고 국가와 민족의 고통을 나누는 거대한 글이 아니라는 것. 한동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주눅 들게 했던 점이다. ‘누구나 자신이 속박된 주제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p132)’ 는 작가의 말에서 힘을 얻는다. 작은 고통은 없다. 견딜만한 고통이 있을 뿐이다. 나의 고통이 견딜만한 것이 될 때까지, 그 과정에서 만나지는 주변의 고통들을 글에 담고자 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계속 쓰려고 한다. 이렇게 쓰다보면 나의 글이 적어도 한 사람, 이 글을 맨 처음으로 읽게 되는 이의 마음은 어루만질 수 있을 터이니.

 

 

(메모) 읽고 싶은 책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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