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 어쩐지 의기양양 도대체 씨의 띄엄띄엄 인생 기술
도대체 지음 / 예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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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받고 싶을 때 손이 가는 책이 있다. 일단 표지는 노란색이 좋다. 제목은 mg 정도의 질량이 적당하다. 이것저것 팽개치고 싶어도 눅진하게 눌러 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빌어먹을 상황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마취성 냄새가 배어나올 것 같은, 방수라도 된 양 마음이 글자들을 또르르 밀어낼 때 빈약하게 남은 안간힘 정도로도 겉장을 넘길 수 있는 책이다.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한 번이라도 입 꼬리를 실룩거리고 싶어, 그래서 선택했다.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라는 제목이 따뜻해서, 작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500만 뷰를 달성한 <행복한 고구마>의 맛도 모른 채 그저 펼쳐 들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택한 책인데 책속은 온통 적나라한 현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큭큭 대고 웃음을 흘리는 나를 발견한다. 호탕하게 터지는 껄껄 웃음이 아니라 쿡쿡 입을 가리고 웃게 되는 자잘한 즐거움을 준다. 몇 시간 동안 빠져 들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이다.

뒤표지를 쓰다듬다보니 뭉클 한다.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사회생활과 일상생활에서 마음의 소리로만 중얼거리는 생각들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디테일한 심리 묘사에 놀라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마음에 동지를 만난 듯 반갑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을 품고, 변변치 못한 나의 모습을 거울을 보듯 바라보며 주눅 들게 되는 순간들마다 팅커벨처럼 짠 나타나서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게 한다. 위로의 방식이 어쭙잖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미사여구 없는 직설 화법에 속이 후련해진다.

 

<리빙포인트>라는 제목으로 간지처럼 끼워진 문장들이 위로가 된다. ‘내가 지금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란 생각이 든다면/ 이 짓을 안 했을 때도 딱히 더 나은 일을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침착해지세요.’(p106), ‘오늘따라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면/ 평소에도 그랬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안심하세요.’(p147), ‘뭔가 문제를 발견해서 자꾸 신경 쓰일 땐/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지금 그 문제를 고민할 때가 아니라 더 큰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p184), ‘사람들이 비웃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 때문에 시작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불필요한 걱정입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늘 나를 비웃고 있답니다.(찡긋)’(p267) 이런 식이다.

 

어릴 때 음악 시간에 배웠던 박수가 생각난다. ‘강약약 중간약약하던 리듬감이 책속에서 출렁거렸다. 심오한 생각이 담긴 몇 줄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가뿐하게 삶의 파도를 넘어가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다. 바닷물이 콧구멍에 들어간대도, 몇 번씩 넘어진대도 힘을 빼면 반드시 내 몸을 바다 위에 떠 있게 하는 고무튜브 같다 할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에게 반짝이는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p234) 따끈한 군고구마를 반으로 갈라 먹기 직전에 밀려오는 행복감처럼 허한 마음이 든든하게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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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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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보면 그때부터였나 싶다. 고등학교 다닐 때 삭아버린 도시락밥을 버렸던 기억이, 떠올릴 때마다 울컥하던 기억이 그런대로 견딜만한 것으로 자리 잡았던 건 어떤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의 중간에 끼어든 다음부터였다. 재작년에는 백일장에 나가서 <이팝꽃처럼 솔솔> 이란 시에 그 기억을 담았다. ‘공양주로 일하던/ 어미의 소원은/ 이팝꽃처럼 솔솔/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내 새끼 뱃속에 담아/ 배불리는 것이었다// 부처님 공양하고/ 남은 밥 찐 도시락/ 어느 날 삭아버려/ 축 늘어진 이팝꽃/ 자식은 밥을 버리며/ 철없이 투덜댔다// 30년 뒤 절 마당/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이팝꽃처럼 솔솔/ 지어주고 싶었지/ 버려진 이팝꽃은/ 노모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뜨겁게/ 피어나고 있었다이렇게 글 안에 담겨가면서 이제는 건드려도 아프지 않은 딱지가 되었다. ‘서툴더라도 자기 말로 고통을 써본다면 일상을 중단시키는 고통이 다스릴 만한 고통이 될 수는 있다.(p6)’ 저자의 말이 맞았다. 일상의 고통들은 글로 봉인되는 순간 닳고 닳은 4B 연필의 끄트머리처럼 뭉툭해졌다. 독후감으로든 시로든 산문으로든 글 안에 나의 아픔들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꺼내는 순간은 쓰라렸지만 그렇게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갔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 책이다. 은유 작가는 자신의 상처조차 고스란히 드러낸 채 글을 통해 공감하고 이해하는 손길을 내민다. 다가오는 말들에 담긴 마음이 조금씩 다가오면서 사람들이 다가왔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서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나는 이 얘기를 들려주었다.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된 점이라고.(p140)’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찬찬히 살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늘 있었다. 아무 상관없는 이를 죽이는 사이코패스조차 뇌에 이상이 생겨서 나타나는 증상이니 결국 이유 없는 행동은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관대해졌다.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또 좋은 점은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인지하게 된다는 점이다. ‘두 존재의 교감에는 의 동일성보다 의 연속성이 중요함을 책과 현실이 증명한다.(p37)’ 몸이 아플 때,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이 누구더라. 몇 명이 떠올랐다. ‘이란 말이 새삼 뭉클했다.

 

어릴 때의 나는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아이였다. 특히 슬픔이나 울컥함 같은 감정에 취약했다. 도무지 안타깝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공감능력이 부족했던 거였다. 예전 같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을 내용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나를 인식했다. 닭의 사육 환경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A4용지 절반만한 공간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밤에도 내리쬐는 인공의 조명 아래에서 달걀만 뽑아내야하는 암탉의 삶을 상상하니 내가 먹는 달걀이 암탉이 흘리는 눈물방울처럼 생각되었다. <달걀>이란 시를 지었다. ‘그칠 줄 모르는 장맛비처럼/ 몸뚱어리 때리는 빛줄기 아래/ 우산마냥 벌린 내 오른손만한 공간에/ 눕지도 못하는 암탉의 삶이 놓인다.// 한껏 펼친 손끝처럼 안간힘 쓰며/ 밤의 이불은 차마 꿈꾸지 못한 채/ 충혈 된 눈 부릅뜨고 생명을 뽑아낸다./ 후두두둑 눈물방울 허옇게 뒹군다.’ 시를 인터넷서재에 올리면서 생각했다. 나의 공감 능력이 조금씩 나아졌나보다 하고. 이렇게 조금씩 공감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글을 써나가고 싶다고.

 

표현을 잘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제는 떠오르는 마음을 조금씩 말한다. 사랑하는 감정이든, 기쁜 마음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정말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이다. ‘그걸 말하지 않으면 모르나 싶지만 정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 남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p173)’ 가까운 이들조차 의외로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다시금 깨달았다.

시댁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머님께서 잠시 망설이시다 말씀하신다. 얘야, 전에 내가 네 글, 너 먼저 읽고 나중에 달라고 해서 서운했니? ?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 말했던 독후감을 이제껏 안 보여줘서 말이다. 너 볼 때마다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잊어버리고 너 가고 나면 생각나고 그랬다. 아하! 전후 맥락이 파악되었다. 재작년, <맑은 꽃으로 피어>라는 제목의 독후감을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있다. 어머님에 대해서 썼어요. 자랑하듯 말했다. 수상 작품집 나오면 보여드릴게요. 그래라, 너 읽고 보여줘라. 수상 작품집은 그 다음 해에 2년 치를 모아서 나왔고 나는 당신께 보여드린다던 말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얘가 당장 보여 달라고 안 해서 혹시 서운했나 싶으셨던 거다. 전혀 아니에요! 오해를 풀어드렸다. 말씀 안하셨으면 두고두고 서운하게 해 드릴 뻔했다. 말씀을 꺼내어주신 당신께 고마웠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 겨우 말하는 것이다.(p177)’ 어쩌면 잊지 않으셨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다. 좀 더 세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송했다.

 

집에서도 혼자 있지만 집은 번잡스러운 노동의 공간이지 고요가 고이는 공간은 아니다.(p79)’ 라는 문장을 보자 커피숍에서 주로 글이 잘 써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공간은 어떠한 강요나 고통이나 힘듦의 흔적도 없는 순수한 나만의 공간이니까. <듣고도 믿기지 않는 실화>(p172~174)에서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 속이 후련했다. ‘교사나 가수 같은 직업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꿈일 수 있다는 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나는(p244)’ 이란 문장까지 오자, 편하게 숨쉬기가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건너왔지만 난 참 행복했구나. 막연하게 미안했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쓰기의 말들등 작가의 전작들도 좋았지만, 나는 이 책이 가장 좋았다. 은유 작가의 글은 강한 인력으로 마음을 끌어당겼다. 해야 할 일이 많던 순간에도 일을 제치고 책장을 넘겼다. 타인의 고통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문장들에 위안을 받기도 하고, 그런 글을 쓰는 마음이 부럽기도 했다. 가슴속 깊이 구석구석 툭 터진 상처들을 토닥이는 영혼의 결이 찡했다.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는 것(p8)’ 이란 문장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기회가 될 때마다 했던 말이다. 내가 진짜로 꿈꾸는 것은 뭘까. 진지하게 생각해보다 이 말의 맹점을 깨달았다. 습관처럼 뱉던 이 말만큼 번지르르한 것이 없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등단을 하는 건가? 딱히 그런 것은 아닌데. 그러면 글을 쓰는 삶을 사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계속 글을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오가자 내가 했던 말이 조심스러워졌다. 너무 게을렀다, 나는. 작가를 꿈으로 생각하는 사람치고 글을 너무 적게 써왔던 거다.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p145)’ 정곡을 찌르는 문장이다. 일단 그냥 써야 하는 것을.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작가라는 타이틀은 아니므로.

나의 글이 담지 못하는 한계점을 알고 있다. 시대를 말하고 국가와 민족의 고통을 나누는 거대한 글이 아니라는 것. 한동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주눅 들게 했던 점이다. ‘누구나 자신이 속박된 주제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p132)’ 는 작가의 말에서 힘을 얻는다. 작은 고통은 없다. 견딜만한 고통이 있을 뿐이다. 나의 고통이 견딜만한 것이 될 때까지, 그 과정에서 만나지는 주변의 고통들을 글에 담고자 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계속 쓰려고 한다. 이렇게 쓰다보면 나의 글이 적어도 한 사람, 이 글을 맨 처음으로 읽게 되는 이의 마음은 어루만질 수 있을 터이니.

 

 

(메모) 읽고 싶은 책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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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기의 여행 - 대책 없이 느긋하고 홀가분하게
송은정 지음 / 걷는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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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터와 스칼라. 물리학의 개념이다. 벡터는 크기와 방향성을 갖는 값, 스칼라는 크기만을 갖는 값이다. 처음 위치에서 나중 위치까지 최단 거리를 연결하면 변한 위치 즉, 변위가 되는데 이게 벡터이다. 반면 스칼라는 처음에서 나중에 이르기까지 꼬불꼬불 헤맨 이동 거리 전체를 의미한다.

성형외과 홍보 사진을 보면 성현 전과 후를 비교한 모습이 등장하는데, 사진 속 인물과 전혀 관계없는 제3자는 beforeafter의 모습만을 보는 셈이므로 비유하면 벡터이다. 같은 맥락으로 성형외과 의사는 사진 속 인물의 모든 변화 과정을 함께 하는 사람이므로 스칼라와 같은 의미가 된다.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오랜만에 만난 동창의 모습이 변했을 때 흔히 하는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은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인물이므로 벡터, 그의 곁에 머무르며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오랜 친구는 스칼라.

단순한 이동과 대비시켜 여행을 정의하는 작가의 문장을 보며 벡터와 스칼라를 떠올린다. ‘이동이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달리는 행위라면, 여행은 목적지에 닿기까지 가능한 한 우회하려는 시도이지 않을까.(p17)’ 요즘 어쩌다보니 여행 관련 서적을 많이 읽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서술한 정의, 꽤 마음에 든다. 이동이 벡터라면 여행은 스칼라의 의미를 띠는 개념이 되는.

 

책장을 정리했다. 그동안 쌓아둔 알라딘 다이어리 및 각종 노트들이 꽤 되었다. 다이어리는 1년에 한 권이면 족하거늘 언젠가 쓸 것도 아니면서 무슨 욕심으로 같은 해의 것을 몇 권씩이나 모았단 말인가. 어릴 때 껌 종이를 모으던 심리였을까. 책장의 빈 공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서있어야 할 책이 드러눕게 되었을 때, 나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미래를 위해 물건을 쌓아두지 않고, 날마다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다 써버리고서 더 좋은 것이 생기리라믿은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일상 습관이다.(p6, 카버의 법칙에 대한 설명)’ 몇 년 동안 책장을 차지하며 벽화처럼 그려져 있던 물건들을 도서관 사서 쌤께 갖다드렸다. 혹시 필요하다는 학생들이 있다면 나눠주시라고. 꽤 집요하게 디자인과 색상을 선택했던 다이어리들이었건만 함께 한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후련함이 느껴졌다. 책장에 생긴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p188, <일상적인 삶>, 장 그르니에)’ 공백이 주는 희열이 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비우니까 뭔가 채워졌다. 무언가를 얻었을 때 느끼는 충족감 못지않게 뿌듯했다.

 

작가의 책을 읽어가면서 물건들을 정리하고 버렸다. 빼기의 여행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작가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니 일상에서 무언가를 자꾸 덜어내고 싶었다. 덜어낸 만큼 생겨나는 공백의 느낌이 좋았다.

일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어제와 같은 길을 걷는 오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어제의 나는 몰랐던 사실을 오늘의 내가 깨달았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야가 한 뼘쯤 더 넓어졌다면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p228)’ 하루를 돌아보고 걸어온 시간들을 스칼라처럼 더듬어보았다.

어찌 보면 글도 스칼라량이 아닌가. 소설 속 인물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경로를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것이므로. 시 속 자아가 느끼는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글로 된 발자국이므로. 변위는 오로지 한 가지 경우만 존재한다. 반면에 거리는 다양한 경로로 묘사할 수 있는 다채로움이 있다. 어떤 경로를 그릴 것인지는 오롯이 작가의 몫이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모습들을 그리고 싶다. 소중한 사람들의 스칼라를 따라가며 글로 스케치하고 싶다. 나의 인생도. 내 삶의 경로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일 테니. 스칼라 같은 글, 스칼라 같은 삶을 상상하니 가슴속 빈 공간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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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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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괜찮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늘 괜찮았던 나는 하루하루를 안간힘을 쓰며 견뎌내는 중이다. 느릿느릿 흐르기만 하는 시간은 켜켜이 쌓여 나를 짓눌렀다. 이 또한 지나가지 않는 것도 있더라.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내 마음을 지배하는 잿빛 감정. 명확한 명사로 명명하기 애매한 그것. 우울과 상실감과 허무와 슬픔이 뒤엉켜 찐득하게 들러붙은 빌어먹을 감정이다. 잠시 잊는 일은 있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마치 처음부터 있던 것처럼, 여기가 제 자리라 말하는 것처럼 거기에 있다. 바탕화면처럼 저변에 깔려있는 마음은 나를 늘 가라앉게 만들었다. 드라마를 마약처럼 취하며 벗어나려 해도, 가까스로 책을 붙들고 시를 쓰고 또 써도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어쩌면 그나마 이 정도로 끌어올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자주 슬펐고,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사실은 이런 시간들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득함으로 펼쳐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다.

 

제목만으로 구매를 결정한 책이다. 이것저것 고려하지 않고 결정했다는 점에서 실망할 위험이 상당히 높을 것이었다. 구입하고 얼마간은 읽지 않고 꽂아두었다. 작가가 쓴빈센트 나의 빈센트를 읽고 나니 이 책에 눈길이 갔다. 정여울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았다. 예감은 맞았다. 작가의 문장은 공허한 마음을 자주 토닥였다. 트라우마에 가까운 영향력으로 나를 잠식시키는 감정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했다.

문학작품 속의 캐릭터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한 방식이 신선했다. 고전이 많이 언급된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권 정도씩 고전을 읽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기에 얼떨결에 고전 맛보기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 표지를 보고 찡했다.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어오는 환한 공간으로 빈 의자 두 개가 놓여있는 그림. 의자 위에 앉게 될 두 사람을 상상하니 부러워서였다. 두 의자의 방향에 주목한다. 오른쪽에서 창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의자는 아마도 괜찮지 않은 사람일터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이를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민낯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리라. 반면 왼쪽 의자는 오른쪽 의자를 향한다. 오른쪽 의자의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이 의자는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두루두루 모습을 보인다. 당신의 얘기도 들어줄 수 있다며 말을 건다. 왼쪽 의자가 작가의 분신인 것 같아 한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예쁘고 행복해보여. 근심걱정이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아. 안정된 직장 있겠다, 자식들도 알아서 공부하겠다, 연금이 있으니 노후 걱정도 없고, 직장일도 잘 하고, 퇴근 후에 커피숍에 가서 우아하게 책 읽고 글도 쓰는 생활, 너무 부러워.’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은 매번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나를 쿡쿡 찔렀다. 책을 읽고 글이라도 쓰는 안간힘을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의 껍데기를 보고 쉽게 판단하고 쉽게 말을 했다.

막연하게 작가가 될 생각을 한 것도 간절한 매달림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니까.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 모든 슬픔과 고통마저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소재로 만드는, 모든 끔찍한 불행에 대한 정당한 복수의 길이었다.(p78)’ 글을 쓰면서 답답한 마음이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어느새 묵직한 감정의 물이 채워져 자주 길어 올려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내가 쓴 시나 리뷰가 감정의 배설물 내지는 쓰레기 같다는 마음이 들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고 글을 올린다. 나의 웃음을 갉아먹는 감정들을 언젠가는 모조리 글에 박제하여 봉인해버리리라. 작가가 된다는 것은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민낯을 마주 보는 순간을 견뎌내는 일인 걸까.

 

사랑이 인생 최고의 가치였던 적이 있다. 그게 허물어지는 순간, 상실감은 생각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사랑만큼 허무한 것이 없었다. 한 때 그토록 가슴 뛰던 대상에게서 증오의 감정을 느꼈을 때, 나를 울적하게 했던 것은 슬픔이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버지니아 울프의 유산이 마음 언저리에 확 다가왔다. ‘마음은 서로의 존재를 비추는 영롱한 거울이지만 서로의 가슴을 날카롭게 내리긋는 흉기이기도 하다.(p115)’ ‘사랑은 그 사람의 얼굴이라는 살아 있는 거울에 투영된 자기 자신을 비춰보는 일(p136)’이라는데. 내가 마주 보는 거울은 너무 차고 딱딱했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의 마음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생각은 매순간 날카로운 흔적을 남겼다.

같은 식탁에 앉았으면서도 어색한 침묵을 반찬으로 먹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즐겁게 웃음이 구르던 장면이 아득하게 떠올랐다. 당신과 나, 우리가 담겨있던 시간도 지나왔는데. 이제 우리라는 말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걸까.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의 속내를, 우리는 평생 이해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p119)’ 대화를 한다 해도 알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날카롭게 나를 찔렀다. 서로에 대해 아무런 기대감도 없는 마음이 아팠다. 3도 화상을 입은 건지도, 그래서 무감각해진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다시 슬펐다.

 

정여울의 빈센트 나의 빈센트에는 빈센트의 외로움이 언급된다. 거리를 지나면서 연인을 부러워했다는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울컥했다. 나 역시 가장 부러움을 느끼는 장면이기에 격하게 공감했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의 모습이 제일 부럽다. 나는 스킨십을 좋아한다. 손의 감촉과 온기를, 사람의 품이 주는 아늑함을 사랑한다. 내게 그것은 19금 영화의 야한 장면보다 더 유혹적이다. 이런 이유로 견디기 어려운 난제가 존재한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내손을 잡아주지 않으니까. 나는 스킨십을 좋아해, 한 번 만져 보자, 으흐흐. 변태 새끼도 아니고 다짜고짜 손을 잡기도 상당히 뻘쭘하지 않은가.

간접 체험이라도 할까 싶어 책을 샀다. 손길이 닿는 순간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터치, 보디랭귀지, 몸의 일기등을 사들였다. 정작 구입만 해놓고 겉표지조차 넘기지 못했다. 학문적인 탐구는 개뿔, 백날 읽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스킨십에 환장한 인간처럼 현실의 사람을 만지고 싶었다. 드라마 인간 말고, 책속에 등장하는 멋진 간지 남 말고.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도 하듯 이 사실은 종종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가끔 상상한다. 하루에 한 번씩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두 팔 벌려 나를 안아주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킨십 AI라도 있다면 당장이라도 구입할 각이다. 구매의사는 간절하나 구매할 수 있는 경제력은 없기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는 나는 불가능한 꿈만 꾼다. 손잡고 다만 10분이라도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좋을 텐데.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저 사람 말이다. 인간이 지닌 36.5도를 느끼고 싶을 때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서도 다시 또 사람의 감촉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몇 년 전부터 꽤나 심각하게 고민한 주제는 성욕이다. 고등학교 국민윤리 시간에 인간의 기본적인 3대 욕구가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 배웠다. 먹거나 잠을 자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젠장! 이런 욕구와 동급의 레벨이라니! 기본적인 욕구라면 거의 필수 요소라는 의미인데 성욕도 충족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걸까. 한데 수녀님이나 스님, 목사님 등 종교계에 몸담고 있는 분들도 있지 않은가. 머릿속은 종종 혼란에 빠졌다. 스스로를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성욕은 주기성을 띠며 나를 괴롭혔다. 그 때마다 지독한 외로움도 덩달아 따라왔다. 스킨십의 출발로 일컬어지는 손잡기조차 어려운 척박한 불모지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나로서는 프로이트의 리비도에 대한 이론은 상처에 뿌려지는 왕소금이었다. 성욕을 바탕으로 깔린 그의 이론에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 속에는 프로이트, , 아들러 등 심리학자들의 이론들이 자주 등장했다. 융의 접근 방식에서 위안을 받았다.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은 all1/n 의 차이였다. 성욕이 절대적인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욕구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다른 욕구들이 상호보완작용을 한다면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이제부터 나의 욕구를 더욱더 예술적인 창작열로 불사르리라! 성욕에 대한 견해가 아니더라도 융이라는 심리학자의 사상은 꽤나 매력적이다. 조만간 그의 책을 읽어보아야겠다.

 

흰 머리가 늘어나면서 몸이 부쩍 피곤해졌다. 늙음은 이렇게 서서히 나를 잠식하는가, 이런 모습으로 점점 쪼그라드는 건가 우울했는데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p170~171)을 보는 순간 뭉클해진다. ‘어떤 힘겨운 상황에서도 내 마음속의 사자 한 마리를 결코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마음만은 결코 늙지 않는 최고의 비결이다.(p168~169)’ 몸을 뒤로 쑥 뺀 채 기다란 막대기를 청새치를 향해 휘두르는 노인의 모습에서 삶의 의지가 보인다. 너무 선명한 장면을 보니 눈물이 났다. 그래, 저렇게 치열하게 살아야하는 게 맞는 것이겠지. 가끔은 이런 고전작품에서 위안을 받는다. 읽다보면 내가 안고 있는 고민의 크기가 줄어들고 좀 더 커다란 인생의 그림이 그려진다.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에너지를 준다.

만약 그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 주변에서 가장 따뜻한 눈빛을 가진 이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p196)’ 지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없지만 조금씩 찾아보기로 한다. ‘오직 몸으로 행동해야만 삶은 바뀔 수 있다.(p313)’했으니. ‘우리 자신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보다 더 강하다.(p204)’는 작가의 말을 믿어보려고 한다. 317페이지에 담긴 작가의 위로에 기대보려고 한다. 내가 느끼는 우울과 상실감과 허무와 슬픔을 비슷하게 안고 있을 또 다른 누군가를 상상하며 당신만 그런 것은 아니라며말하고 싶다. 당신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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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바나나 2019-05-1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나비종 2019-05-17 23:40   좋아요 0 | URL
‘좋아요‘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척박한 불모지에 무려 댓글을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춤추는바나나 2019-05-18 0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와닿는부분이 많터라구요^^ 그리고 생각의 조각들을 멋진 글로 풀어서 쓰신게대단하고 부러웠어요^^ 앞으로 리뷰에서 자주뵈요 우리!!

나비종 2019-05-19 22:35   좋아요 0 | URL
위 댓글의 핵심어는 ‘우.리.‘인 거죠?ㅋㅋ
공감하신 부분이 많으셨다니 위안이 되는군요.^^ 멋진 글이라 여겨주시니 다소 민망하지만 계속 글을 써야겠다는 의지가 생깁니다. 불!끈!ㅎ 글 읽는 속도가 느려서 리뷰를 자주 올리지는 못하지만 자주 들러주시고 의견주세요~^^
 
빈센트 나의 빈센트 - 정여울의 반 고흐 에세이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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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똑같았단 말이다. 꼬부랑 머리를 한 아그리파 석고상을 사진을 찍은 것처럼 실물과 흡사하게 그렸건만. 미술 선생님께서는 괴팍한 느낌이 끼얹어오던 친구 작품에 점수를 더 주셨다. 고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다. 불현듯 기억이 떠오른 것은 미술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앙금으로 가라앉았던 억울한 마음이 생각나서일 거다.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친구의 작품이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사실을. 선생님의 평가가 옳았다. 내게 없던 것은 아그리파를 해석하는 나만의 고유한 시각이었다. 말하자면 모조품과 창작품의 차이였다.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은 예술의 본질과 연결되는 중요한 요소였다. 결국 그 친구는 미술 관련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고흐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졌다. 괴팍한 모습으로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과 해바라기가 그려진 정물, 청보라로 채색된 밤하늘. 고갱과 함께 미술교과서에 나오던 화가, 미친 사람의 이미지가 강했던 인물. 딱 여기까지였다. 그의 삶이든, 보다 많은 그림들은 관심 밖이었다.

자연스러운 글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미술에 대한 책도 역시 글 잘 쓰는 사람이 써야 제격이다 했다. 한데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이런 느낌은 단순히 뛰어난 글쓰기 능력으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빈센트의 전기를 읽는 듯 그의 삶을 속속들이 알아가는 것도 좋았지만, 나는 그를 해석하며 그림인 듯 그려내는 작가만의 시선이 더욱 좋았다.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이런 글이 나올 수 없겠구나 싶었다. 화가의 삶 자체가 간절한 데다 그를 향하는 작가의 깊은 시선이 어우러지자 그들을 바라보는 나에게 뭉클함이 전해졌다. 여운으로 이어지는 울림으로 커버 그림의 강렬한 노랑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글과 삶이 일치하는 책은 매번 깊은 감동이다. 빈센트의 그림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그림과 삶이 일치하는 느낌이랄까. 꾹꾹 눌러 그려 털실로 짠 옷을 연상시키는 붓 터치는 삶의 묵직함을, 타들어가는 불꽃같은 노랑과 밤하늘의 색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일생을 외로움에 흠뻑 젖어 살면서 사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소용돌이 문양은 사람들과 삶을 향해 뻗는 간절한 손길이었다.

 

밤하늘은 검지 않다. 30대의 어느 날 늦은 퇴근길, 땅만 바라보며 터벅터벅 걷다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간혹 야간자습 끝나고 오는 길에 올려다보았던 고등학교 때에는 밤하늘의 색깔을 인식하지 못했다. 나의 시선은 별 자체만을 향했으니까. 힘들다, 참 외롭다는 생각이 온몸을 감싸던 하루였다. 안에서 우러나는 한기를 느끼며 별을 품고 있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것 같다. 새까맣지 않았다. 약간의 보랏빛 같기도, 짙은 남색 같기도 했다. 어두웠지만 분명 검은색은 아니었다.

빈센트의 밤하늘은 짙은 보라색과 남색의 중간쯤에 닿아있다. ‘빈센트가 그린 밤하늘의 별이 감동을 주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검은색이 없기 때문이다.(p39)’, ‘빈센트는 과연 얼마나 오래, 얼마나 하염없이 별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 것일까.(p44)’, ‘그는 알고 있었다. 어두운 밤의 풍경 속에 때로는 낮보다 더 많은 색채가 숨어 있음을. 우중충하고 텁텁해 보이는 어두운 빛깔 속에 생의 눈부신 진실이 도사리고 있음을.(p79)’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던 시인의 말처럼 그에게 밤하늘은 이런 의미였으리라.

색채만큼이나 <별이 빛나는 밤>(p46~47)에서 마음에 들었던 점은 별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패턴이었다. 노란 밀밭의 소용돌이와는 다른 느낌이다. 하늘을 바라볼 때의 화가의 눈동자를 상상한다. 약간의 물기가 어린 눈이었으리라. 맑은 눈물이 살짝 맺혀있을 때, 별을 바라보면 그림처럼 빛이 번져 보이니까.

 

빈센트의 그림은 밝지 않다. 온통 밝은 노랑인 작품도 가뿐하지 않다. 인물들의 표정 역시 소위 아름답다말하는 세상의 기준에서 많이 벗어난다. 굴곡진 표정, 뭉툭한 손, 여기저기 삶의 더께가 진득하게 눌러 붙어있는 모습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여인의 표정을 명확히 알 것 같은 <슬픔>(p102)도 비슷한 느낌이다. 묘한 점은 이런 그림에서 위안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상처 입은 자가 바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p133)’는 문장에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발>(p191)을 보았을 때 그랬다. 스윗소로우의 노래 <나의 구두>를 이미지로 표현하면 이런 모습일까. ‘고단한 거리를 나선다, 하루의 끝을 달랜다./ 분주했던 발걸음, 꿈을 꾸던 한 걸음,/ 항상 너와 함께였지.// 뭘 위해 걸어왔던 걸까./ 어느 새 낡은 너의 끝/ 너와 함께 달렸던, 너와 함께 울었던,/ 그 시간도 아득해.// 어리석게도 아름다웠었던,/ , 아름답게도 어리석었던/ 그 소중한 맘을 기억하고 있어,/ 고마워, 너의 마음 다 알아.// 쉽게 헤어질 순 없었지./ 꼭 지친 내 삶 같아서./ 그래도 참 애썼다, 그래도 참 고맙다,/ 말해주는 것 같아서.//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맨 날도,/ 너무 아파 잠 못 들던 밤도/ 여전히 나는 기억하고 있어,/ 미안해, 너의 아픔 다 알아.// 고단한 겨울이야 정말, 너도 내 맘 아는지./ 그래도 또 한 걸음, 괜찮아 또 한걸음,/ 서툰 봄을 기다린다.// 그래도 또 한 걸음, 괜찮아 또 한 걸음,/ 또 하루를 걸어간다./ 너와 함께 걸어간다.(출처: 네이버 뮤직)’

빈센트의 화폭에 담긴 한 켤레의 신발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두 가지에 주목한다. 첫째, 신발의 끈이 풀려있다는 점이다. 이건 신발 주인이 고단한 시간을 지나 신발을 벗고 휴식을 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신발 주인을 쉬게 해주고 싶던 화가의 마음이 전해진다. 둘째, 신발이 향하는 방향이다. 신발의 앞코는 화가를 향한다. 그림을 감상하는 이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림의 전체적인 색채는 매우 어두운 것도 의도적으로 보인다. 캔버스의 틀 바깥은 그림 속 세상보다 밝을 것이니까. 화가는 신발 주인에게 말한다. 어서 그림 밖으로 걸어 나와 쉬라고. 신발 주인을 한껏 안아주고자 하는 따스함이다.

 

미술은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시선을 눈에 보이는 틀에 담는 행위이다. 사각의 캔버스가 되었든 입체적인 조형물이 되었든 창작자의 해석에 따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빈센트는 모두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는 창조적 시선(p324)’을 지닌 사람이었다. 대성당에는 없는 것을 사람의 눈 속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빈센트의 노랑은 소유격을 사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특별한 색채이다. 파도처럼 꿈틀거리는 커버 그림의 노랑이, <수확하는 사람>(p344~345)의 절반을 차지하는 밀밭의 노랑이 마냥 바라만보아도 좋았다. 그가 표현한 노란 빛 하늘이 좋았다.

사각의 틀이 담고 있는 무한한 세계를 상상했다. 감정이입이 된 그림 안에는 고정된 색채나 형태가 없음을 알았다. 캔버스 안에서 듬뿍 펼쳐진 찬란한 자유를 보았다. 빈센트의 색채로 이루어진 싱크 홀에 깊이 빠져버렸다.

 

 

p6, 밑에서 6째줄: 파랑, 노랑, 빨강, 이 세 가지 이 만나면 결국 새하얀 빛이 되는 것처럼 빛의 3원색은 RGB(Red Green Blue)이므로 노랑 대신 초록이 들어가야..

p231, 테오에게 쓴 편지 베르나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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