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기의 여행 - 대책 없이 느긋하고 홀가분하게
송은정 지음 / 걷는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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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터와 스칼라. 물리학의 개념이다. 벡터는 크기와 방향성을 갖는 값, 스칼라는 크기만을 갖는 값이다. 처음 위치에서 나중 위치까지 최단 거리를 연결하면 변한 위치 즉, 변위가 되는데 이게 벡터이다. 반면 스칼라는 처음에서 나중에 이르기까지 꼬불꼬불 헤맨 이동 거리 전체를 의미한다.

성형외과 홍보 사진을 보면 성현 전과 후를 비교한 모습이 등장하는데, 사진 속 인물과 전혀 관계없는 제3자는 beforeafter의 모습만을 보는 셈이므로 비유하면 벡터이다. 같은 맥락으로 성형외과 의사는 사진 속 인물의 모든 변화 과정을 함께 하는 사람이므로 스칼라와 같은 의미가 된다.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오랜만에 만난 동창의 모습이 변했을 때 흔히 하는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은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인물이므로 벡터, 그의 곁에 머무르며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오랜 친구는 스칼라.

단순한 이동과 대비시켜 여행을 정의하는 작가의 문장을 보며 벡터와 스칼라를 떠올린다. ‘이동이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달리는 행위라면, 여행은 목적지에 닿기까지 가능한 한 우회하려는 시도이지 않을까.(p17)’ 요즘 어쩌다보니 여행 관련 서적을 많이 읽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서술한 정의, 꽤 마음에 든다. 이동이 벡터라면 여행은 스칼라의 의미를 띠는 개념이 되는.

 

책장을 정리했다. 그동안 쌓아둔 알라딘 다이어리 및 각종 노트들이 꽤 되었다. 다이어리는 1년에 한 권이면 족하거늘 언젠가 쓸 것도 아니면서 무슨 욕심으로 같은 해의 것을 몇 권씩이나 모았단 말인가. 어릴 때 껌 종이를 모으던 심리였을까. 책장의 빈 공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서있어야 할 책이 드러눕게 되었을 때, 나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미래를 위해 물건을 쌓아두지 않고, 날마다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다 써버리고서 더 좋은 것이 생기리라믿은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일상 습관이다.(p6, 카버의 법칙에 대한 설명)’ 몇 년 동안 책장을 차지하며 벽화처럼 그려져 있던 물건들을 도서관 사서 쌤께 갖다드렸다. 혹시 필요하다는 학생들이 있다면 나눠주시라고. 꽤 집요하게 디자인과 색상을 선택했던 다이어리들이었건만 함께 한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후련함이 느껴졌다. 책장에 생긴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p188, <일상적인 삶>, 장 그르니에)’ 공백이 주는 희열이 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비우니까 뭔가 채워졌다. 무언가를 얻었을 때 느끼는 충족감 못지않게 뿌듯했다.

 

작가의 책을 읽어가면서 물건들을 정리하고 버렸다. 빼기의 여행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작가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니 일상에서 무언가를 자꾸 덜어내고 싶었다. 덜어낸 만큼 생겨나는 공백의 느낌이 좋았다.

일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어제와 같은 길을 걷는 오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어제의 나는 몰랐던 사실을 오늘의 내가 깨달았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야가 한 뼘쯤 더 넓어졌다면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p228)’ 하루를 돌아보고 걸어온 시간들을 스칼라처럼 더듬어보았다.

어찌 보면 글도 스칼라량이 아닌가. 소설 속 인물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경로를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것이므로. 시 속 자아가 느끼는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글로 된 발자국이므로. 변위는 오로지 한 가지 경우만 존재한다. 반면에 거리는 다양한 경로로 묘사할 수 있는 다채로움이 있다. 어떤 경로를 그릴 것인지는 오롯이 작가의 몫이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모습들을 그리고 싶다. 소중한 사람들의 스칼라를 따라가며 글로 스케치하고 싶다. 나의 인생도. 내 삶의 경로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일 테니. 스칼라 같은 글, 스칼라 같은 삶을 상상하니 가슴속 빈 공간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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