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나의 빈센트 - 정여울의 반 고흐 에세이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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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똑같았단 말이다. 꼬부랑 머리를 한 아그리파 석고상을 사진을 찍은 것처럼 실물과 흡사하게 그렸건만. 미술 선생님께서는 괴팍한 느낌이 끼얹어오던 친구 작품에 점수를 더 주셨다. 고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다. 불현듯 기억이 떠오른 것은 미술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앙금으로 가라앉았던 억울한 마음이 생각나서일 거다.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친구의 작품이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사실을. 선생님의 평가가 옳았다. 내게 없던 것은 아그리파를 해석하는 나만의 고유한 시각이었다. 말하자면 모조품과 창작품의 차이였다.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은 예술의 본질과 연결되는 중요한 요소였다. 결국 그 친구는 미술 관련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고흐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졌다. 괴팍한 모습으로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과 해바라기가 그려진 정물, 청보라로 채색된 밤하늘. 고갱과 함께 미술교과서에 나오던 화가, 미친 사람의 이미지가 강했던 인물. 딱 여기까지였다. 그의 삶이든, 보다 많은 그림들은 관심 밖이었다.

자연스러운 글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미술에 대한 책도 역시 글 잘 쓰는 사람이 써야 제격이다 했다. 한데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이런 느낌은 단순히 뛰어난 글쓰기 능력으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빈센트의 전기를 읽는 듯 그의 삶을 속속들이 알아가는 것도 좋았지만, 나는 그를 해석하며 그림인 듯 그려내는 작가만의 시선이 더욱 좋았다.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이런 글이 나올 수 없겠구나 싶었다. 화가의 삶 자체가 간절한 데다 그를 향하는 작가의 깊은 시선이 어우러지자 그들을 바라보는 나에게 뭉클함이 전해졌다. 여운으로 이어지는 울림으로 커버 그림의 강렬한 노랑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글과 삶이 일치하는 책은 매번 깊은 감동이다. 빈센트의 그림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그림과 삶이 일치하는 느낌이랄까. 꾹꾹 눌러 그려 털실로 짠 옷을 연상시키는 붓 터치는 삶의 묵직함을, 타들어가는 불꽃같은 노랑과 밤하늘의 색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일생을 외로움에 흠뻑 젖어 살면서 사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소용돌이 문양은 사람들과 삶을 향해 뻗는 간절한 손길이었다.

 

밤하늘은 검지 않다. 30대의 어느 날 늦은 퇴근길, 땅만 바라보며 터벅터벅 걷다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간혹 야간자습 끝나고 오는 길에 올려다보았던 고등학교 때에는 밤하늘의 색깔을 인식하지 못했다. 나의 시선은 별 자체만을 향했으니까. 힘들다, 참 외롭다는 생각이 온몸을 감싸던 하루였다. 안에서 우러나는 한기를 느끼며 별을 품고 있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것 같다. 새까맣지 않았다. 약간의 보랏빛 같기도, 짙은 남색 같기도 했다. 어두웠지만 분명 검은색은 아니었다.

빈센트의 밤하늘은 짙은 보라색과 남색의 중간쯤에 닿아있다. ‘빈센트가 그린 밤하늘의 별이 감동을 주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검은색이 없기 때문이다.(p39)’, ‘빈센트는 과연 얼마나 오래, 얼마나 하염없이 별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 것일까.(p44)’, ‘그는 알고 있었다. 어두운 밤의 풍경 속에 때로는 낮보다 더 많은 색채가 숨어 있음을. 우중충하고 텁텁해 보이는 어두운 빛깔 속에 생의 눈부신 진실이 도사리고 있음을.(p79)’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던 시인의 말처럼 그에게 밤하늘은 이런 의미였으리라.

색채만큼이나 <별이 빛나는 밤>(p46~47)에서 마음에 들었던 점은 별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패턴이었다. 노란 밀밭의 소용돌이와는 다른 느낌이다. 하늘을 바라볼 때의 화가의 눈동자를 상상한다. 약간의 물기가 어린 눈이었으리라. 맑은 눈물이 살짝 맺혀있을 때, 별을 바라보면 그림처럼 빛이 번져 보이니까.

 

빈센트의 그림은 밝지 않다. 온통 밝은 노랑인 작품도 가뿐하지 않다. 인물들의 표정 역시 소위 아름답다말하는 세상의 기준에서 많이 벗어난다. 굴곡진 표정, 뭉툭한 손, 여기저기 삶의 더께가 진득하게 눌러 붙어있는 모습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여인의 표정을 명확히 알 것 같은 <슬픔>(p102)도 비슷한 느낌이다. 묘한 점은 이런 그림에서 위안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상처 입은 자가 바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p133)’는 문장에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발>(p191)을 보았을 때 그랬다. 스윗소로우의 노래 <나의 구두>를 이미지로 표현하면 이런 모습일까. ‘고단한 거리를 나선다, 하루의 끝을 달랜다./ 분주했던 발걸음, 꿈을 꾸던 한 걸음,/ 항상 너와 함께였지.// 뭘 위해 걸어왔던 걸까./ 어느 새 낡은 너의 끝/ 너와 함께 달렸던, 너와 함께 울었던,/ 그 시간도 아득해.// 어리석게도 아름다웠었던,/ , 아름답게도 어리석었던/ 그 소중한 맘을 기억하고 있어,/ 고마워, 너의 마음 다 알아.// 쉽게 헤어질 순 없었지./ 꼭 지친 내 삶 같아서./ 그래도 참 애썼다, 그래도 참 고맙다,/ 말해주는 것 같아서.//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맨 날도,/ 너무 아파 잠 못 들던 밤도/ 여전히 나는 기억하고 있어,/ 미안해, 너의 아픔 다 알아.// 고단한 겨울이야 정말, 너도 내 맘 아는지./ 그래도 또 한 걸음, 괜찮아 또 한걸음,/ 서툰 봄을 기다린다.// 그래도 또 한 걸음, 괜찮아 또 한 걸음,/ 또 하루를 걸어간다./ 너와 함께 걸어간다.(출처: 네이버 뮤직)’

빈센트의 화폭에 담긴 한 켤레의 신발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두 가지에 주목한다. 첫째, 신발의 끈이 풀려있다는 점이다. 이건 신발 주인이 고단한 시간을 지나 신발을 벗고 휴식을 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신발 주인을 쉬게 해주고 싶던 화가의 마음이 전해진다. 둘째, 신발이 향하는 방향이다. 신발의 앞코는 화가를 향한다. 그림을 감상하는 이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림의 전체적인 색채는 매우 어두운 것도 의도적으로 보인다. 캔버스의 틀 바깥은 그림 속 세상보다 밝을 것이니까. 화가는 신발 주인에게 말한다. 어서 그림 밖으로 걸어 나와 쉬라고. 신발 주인을 한껏 안아주고자 하는 따스함이다.

 

미술은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시선을 눈에 보이는 틀에 담는 행위이다. 사각의 캔버스가 되었든 입체적인 조형물이 되었든 창작자의 해석에 따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빈센트는 모두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는 창조적 시선(p324)’을 지닌 사람이었다. 대성당에는 없는 것을 사람의 눈 속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빈센트의 노랑은 소유격을 사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특별한 색채이다. 파도처럼 꿈틀거리는 커버 그림의 노랑이, <수확하는 사람>(p344~345)의 절반을 차지하는 밀밭의 노랑이 마냥 바라만보아도 좋았다. 그가 표현한 노란 빛 하늘이 좋았다.

사각의 틀이 담고 있는 무한한 세계를 상상했다. 감정이입이 된 그림 안에는 고정된 색채나 형태가 없음을 알았다. 캔버스 안에서 듬뿍 펼쳐진 찬란한 자유를 보았다. 빈센트의 색채로 이루어진 싱크 홀에 깊이 빠져버렸다.

 

 

p6, 밑에서 6째줄: 파랑, 노랑, 빨강, 이 세 가지 이 만나면 결국 새하얀 빛이 되는 것처럼 빛의 3원색은 RGB(Red Green Blue)이므로 노랑 대신 초록이 들어가야..

p231, 테오에게 쓴 편지 베르나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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