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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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괜찮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늘 괜찮았던 나는 하루하루를 안간힘을 쓰며 견뎌내는 중이다. 느릿느릿 흐르기만 하는 시간은 켜켜이 쌓여 나를 짓눌렀다. 이 또한 지나가지 않는 것도 있더라.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내 마음을 지배하는 잿빛 감정. 명확한 명사로 명명하기 애매한 그것. 우울과 상실감과 허무와 슬픔이 뒤엉켜 찐득하게 들러붙은 빌어먹을 감정이다. 잠시 잊는 일은 있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마치 처음부터 있던 것처럼, 여기가 제 자리라 말하는 것처럼 거기에 있다. 바탕화면처럼 저변에 깔려있는 마음은 나를 늘 가라앉게 만들었다. 드라마를 마약처럼 취하며 벗어나려 해도, 가까스로 책을 붙들고 시를 쓰고 또 써도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어쩌면 그나마 이 정도로 끌어올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자주 슬펐고,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사실은 이런 시간들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득함으로 펼쳐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다.

 

제목만으로 구매를 결정한 책이다. 이것저것 고려하지 않고 결정했다는 점에서 실망할 위험이 상당히 높을 것이었다. 구입하고 얼마간은 읽지 않고 꽂아두었다. 작가가 쓴빈센트 나의 빈센트를 읽고 나니 이 책에 눈길이 갔다. 정여울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았다. 예감은 맞았다. 작가의 문장은 공허한 마음을 자주 토닥였다. 트라우마에 가까운 영향력으로 나를 잠식시키는 감정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했다.

문학작품 속의 캐릭터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한 방식이 신선했다. 고전이 많이 언급된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권 정도씩 고전을 읽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기에 얼떨결에 고전 맛보기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 표지를 보고 찡했다.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어오는 환한 공간으로 빈 의자 두 개가 놓여있는 그림. 의자 위에 앉게 될 두 사람을 상상하니 부러워서였다. 두 의자의 방향에 주목한다. 오른쪽에서 창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의자는 아마도 괜찮지 않은 사람일터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이를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민낯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리라. 반면 왼쪽 의자는 오른쪽 의자를 향한다. 오른쪽 의자의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이 의자는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두루두루 모습을 보인다. 당신의 얘기도 들어줄 수 있다며 말을 건다. 왼쪽 의자가 작가의 분신인 것 같아 한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예쁘고 행복해보여. 근심걱정이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아. 안정된 직장 있겠다, 자식들도 알아서 공부하겠다, 연금이 있으니 노후 걱정도 없고, 직장일도 잘 하고, 퇴근 후에 커피숍에 가서 우아하게 책 읽고 글도 쓰는 생활, 너무 부러워.’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은 매번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나를 쿡쿡 찔렀다. 책을 읽고 글이라도 쓰는 안간힘을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의 껍데기를 보고 쉽게 판단하고 쉽게 말을 했다.

막연하게 작가가 될 생각을 한 것도 간절한 매달림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니까.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 모든 슬픔과 고통마저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소재로 만드는, 모든 끔찍한 불행에 대한 정당한 복수의 길이었다.(p78)’ 글을 쓰면서 답답한 마음이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어느새 묵직한 감정의 물이 채워져 자주 길어 올려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내가 쓴 시나 리뷰가 감정의 배설물 내지는 쓰레기 같다는 마음이 들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고 글을 올린다. 나의 웃음을 갉아먹는 감정들을 언젠가는 모조리 글에 박제하여 봉인해버리리라. 작가가 된다는 것은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민낯을 마주 보는 순간을 견뎌내는 일인 걸까.

 

사랑이 인생 최고의 가치였던 적이 있다. 그게 허물어지는 순간, 상실감은 생각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사랑만큼 허무한 것이 없었다. 한 때 그토록 가슴 뛰던 대상에게서 증오의 감정을 느꼈을 때, 나를 울적하게 했던 것은 슬픔이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버지니아 울프의 유산이 마음 언저리에 확 다가왔다. ‘마음은 서로의 존재를 비추는 영롱한 거울이지만 서로의 가슴을 날카롭게 내리긋는 흉기이기도 하다.(p115)’ ‘사랑은 그 사람의 얼굴이라는 살아 있는 거울에 투영된 자기 자신을 비춰보는 일(p136)’이라는데. 내가 마주 보는 거울은 너무 차고 딱딱했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의 마음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생각은 매순간 날카로운 흔적을 남겼다.

같은 식탁에 앉았으면서도 어색한 침묵을 반찬으로 먹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즐겁게 웃음이 구르던 장면이 아득하게 떠올랐다. 당신과 나, 우리가 담겨있던 시간도 지나왔는데. 이제 우리라는 말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걸까.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의 속내를, 우리는 평생 이해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p119)’ 대화를 한다 해도 알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날카롭게 나를 찔렀다. 서로에 대해 아무런 기대감도 없는 마음이 아팠다. 3도 화상을 입은 건지도, 그래서 무감각해진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다시 슬펐다.

 

정여울의 빈센트 나의 빈센트에는 빈센트의 외로움이 언급된다. 거리를 지나면서 연인을 부러워했다는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울컥했다. 나 역시 가장 부러움을 느끼는 장면이기에 격하게 공감했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의 모습이 제일 부럽다. 나는 스킨십을 좋아한다. 손의 감촉과 온기를, 사람의 품이 주는 아늑함을 사랑한다. 내게 그것은 19금 영화의 야한 장면보다 더 유혹적이다. 이런 이유로 견디기 어려운 난제가 존재한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내손을 잡아주지 않으니까. 나는 스킨십을 좋아해, 한 번 만져 보자, 으흐흐. 변태 새끼도 아니고 다짜고짜 손을 잡기도 상당히 뻘쭘하지 않은가.

간접 체험이라도 할까 싶어 책을 샀다. 손길이 닿는 순간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터치, 보디랭귀지, 몸의 일기등을 사들였다. 정작 구입만 해놓고 겉표지조차 넘기지 못했다. 학문적인 탐구는 개뿔, 백날 읽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스킨십에 환장한 인간처럼 현실의 사람을 만지고 싶었다. 드라마 인간 말고, 책속에 등장하는 멋진 간지 남 말고.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도 하듯 이 사실은 종종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가끔 상상한다. 하루에 한 번씩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두 팔 벌려 나를 안아주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킨십 AI라도 있다면 당장이라도 구입할 각이다. 구매의사는 간절하나 구매할 수 있는 경제력은 없기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는 나는 불가능한 꿈만 꾼다. 손잡고 다만 10분이라도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좋을 텐데.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저 사람 말이다. 인간이 지닌 36.5도를 느끼고 싶을 때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서도 다시 또 사람의 감촉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몇 년 전부터 꽤나 심각하게 고민한 주제는 성욕이다. 고등학교 국민윤리 시간에 인간의 기본적인 3대 욕구가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 배웠다. 먹거나 잠을 자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젠장! 이런 욕구와 동급의 레벨이라니! 기본적인 욕구라면 거의 필수 요소라는 의미인데 성욕도 충족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걸까. 한데 수녀님이나 스님, 목사님 등 종교계에 몸담고 있는 분들도 있지 않은가. 머릿속은 종종 혼란에 빠졌다. 스스로를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성욕은 주기성을 띠며 나를 괴롭혔다. 그 때마다 지독한 외로움도 덩달아 따라왔다. 스킨십의 출발로 일컬어지는 손잡기조차 어려운 척박한 불모지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나로서는 프로이트의 리비도에 대한 이론은 상처에 뿌려지는 왕소금이었다. 성욕을 바탕으로 깔린 그의 이론에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 속에는 프로이트, , 아들러 등 심리학자들의 이론들이 자주 등장했다. 융의 접근 방식에서 위안을 받았다.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은 all1/n 의 차이였다. 성욕이 절대적인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욕구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다른 욕구들이 상호보완작용을 한다면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이제부터 나의 욕구를 더욱더 예술적인 창작열로 불사르리라! 성욕에 대한 견해가 아니더라도 융이라는 심리학자의 사상은 꽤나 매력적이다. 조만간 그의 책을 읽어보아야겠다.

 

흰 머리가 늘어나면서 몸이 부쩍 피곤해졌다. 늙음은 이렇게 서서히 나를 잠식하는가, 이런 모습으로 점점 쪼그라드는 건가 우울했는데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p170~171)을 보는 순간 뭉클해진다. ‘어떤 힘겨운 상황에서도 내 마음속의 사자 한 마리를 결코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마음만은 결코 늙지 않는 최고의 비결이다.(p168~169)’ 몸을 뒤로 쑥 뺀 채 기다란 막대기를 청새치를 향해 휘두르는 노인의 모습에서 삶의 의지가 보인다. 너무 선명한 장면을 보니 눈물이 났다. 그래, 저렇게 치열하게 살아야하는 게 맞는 것이겠지. 가끔은 이런 고전작품에서 위안을 받는다. 읽다보면 내가 안고 있는 고민의 크기가 줄어들고 좀 더 커다란 인생의 그림이 그려진다.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에너지를 준다.

만약 그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 주변에서 가장 따뜻한 눈빛을 가진 이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p196)’ 지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없지만 조금씩 찾아보기로 한다. ‘오직 몸으로 행동해야만 삶은 바뀔 수 있다.(p313)’했으니. ‘우리 자신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보다 더 강하다.(p204)’는 작가의 말을 믿어보려고 한다. 317페이지에 담긴 작가의 위로에 기대보려고 한다. 내가 느끼는 우울과 상실감과 허무와 슬픔을 비슷하게 안고 있을 또 다른 누군가를 상상하며 당신만 그런 것은 아니라며말하고 싶다. 당신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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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바나나 2019-05-1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나비종 2019-05-17 23:40   좋아요 0 | URL
‘좋아요‘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척박한 불모지에 무려 댓글을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춤추는바나나 2019-05-18 0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와닿는부분이 많터라구요^^ 그리고 생각의 조각들을 멋진 글로 풀어서 쓰신게대단하고 부러웠어요^^ 앞으로 리뷰에서 자주뵈요 우리!!

나비종 2019-05-19 22:35   좋아요 0 | URL
위 댓글의 핵심어는 ‘우.리.‘인 거죠?ㅋㅋ
공감하신 부분이 많으셨다니 위안이 되는군요.^^ 멋진 글이라 여겨주시니 다소 민망하지만 계속 글을 써야겠다는 의지가 생깁니다. 불!끈!ㅎ 글 읽는 속도가 느려서 리뷰를 자주 올리지는 못하지만 자주 들러주시고 의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