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웃 높은 학년 동화 30
박효미 지음, 마영신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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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는 나라라 들었다.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던 나라, 인도는. “근데 거기는 자주 씻기 어려워. 벌레도 무지 많고.” 이런! 간절한 바람이 순식간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외출하지 않으면 잘 씻지 않을 정도로 청결을 중요시하는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맘대로 씻지 못한다는 사실은 마음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상상만 해도 찜찜했다.

일주일간의 블랙아웃이 그려진 동화를 읽으면서 인도를 떠올렸다. 땀이 삐질삐질 나는 여름의 한복판에서 씻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식수뿐 아니라 변기 물도 내리지 못하는 장면이 묘사될 때, 몸에서 작은 벌레가 슬금슬금 기어가는 듯 소름이 돋았다.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학교일이 대폭적으로 많아졌다. 편리하라고 도입된 기기이니 일이 줄어야 정상일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수작업으로 채점을 하거나 생활기록부를 쓰던 때보다 일이 늘어났다. 예전에는 학년 초와 학년말에 집중적으로 바쁘고 간간이 한적한 시기도 있었건만 지금은 일 년 내내 일이 끊이지 않는다.

언젠가 학교에서 한 시간 정도 정전된 적이 있다. 정적이 감돌았다. 가쁘게 호흡하던 일들이 한순간에 숨을 멈추었다. ‘어둠은 모든 할 일을 삼켜 버렸다.(p37)’ ‘전기가 나가고 나니 별안간 할 일 없는 시간이 용도를 모르는 선물처럼 던져졌다.(p92)’ 빠르게 달리는 기차 속에서 멈추지 않고 달려왔던가 싶었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니 업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해방감조차 들었다. 삶속에 이런 시간들을 간지처럼 끼워도 괜찮을 듯싶었을 정도로. 전기 없는 시간을 만든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동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인간의 이기심이다. ‘블랙아웃은 끝내 미제의 사건으로 마무리되지만 일부 이기적인 인간들의 의도된 행위가 아니었을까 의심할만한 정황이 곳곳에 드러난다. ‘이런 와중에도 몰래몰래 자기들끼리 사는 인간들이 있다는 거야.(p187)’ 블랙아웃으로 인해 생필품을 독점으로 공급하게 된 에이마트. 그곳에만 환히 켜진 전기불 앞에 개미떼처럼 줄을 서는 사람들을 바라보자니 체한 것처럼 가슴이 막혔다.

게다가 동화 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왕자님도 아니고 현실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비슷한 상황들이라니! 뭉쳐야 힘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장면들은 중간 중간 또 나를 답답하게 했다. 교회 신도들에게만 몰래 주는 물이라든가, 물건을 도둑맞았다고 호소하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적으라고 종이를 내미는 경찰관이라든가, 아이들에게서 쌀을 빼앗아가는 이웃집 아줌마라든가, 새벽에 몰래 열어 생필품을 비싸게 파는 시장 안 슈퍼라든가. 뉴스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몇몇 사실들을 떠올리니 화가 치밀었다. 어린이의 시선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어른들의 이기심이 동화 밖에도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일곱째 날에 독점 마트를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촛불을 생각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처럼 잠잠하다가 순식간에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지다가 쓰나미가 될 수도 있거든. 그게 바로 민심이라는 거야.(p104)’ 내내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지만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래도 희망을 찾아보려는 작가의 마음을 엿본다.

블랙아웃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2011915일에 전국 대규모 정전사태가 5시간 정도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태양의 흑점 활동이 활발해지면 태양풍 입자가 급증하여 정전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지진이나 화산 폭발처럼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인 것이다. 하지만 이 동화에서 그려진 블랙아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블랙아웃의 형태든 또 다른 형태로든 답답한 상황들이 현실 속으로 툭 던져질 것 같은 느낌에 며칠 씻지 못한 사람인양 다시 찜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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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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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알. 표지를 펼치기 전에 더듬어보았던 고등학교 때의 기억은 두 글자였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p110)’ 책을 읽지 않아도 지식의 바다에 동지 팥죽 새..심으로 동동 떠있는 문구이다. 왠지 간지 나는 문장, 이게 다인 줄 알았다.

소설 초반에는 주인공 싱클레어가 프란츠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내용이 전개된다. 학교 폭력을 다룬 청소년 소설이었던가. 이런 내용이 있었나. 새삼스러웠고 이게 다인 줄 알았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몽롱함으로 정신이 몽롱해질 때 알았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좀 더 심오한 차원이었음을.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구나! 요즘 퇴근길에 하는 생각이다. 수업을 주로 들어가는 3학년의 마지막 시험이 지난 1121일에 끝났다. 겨울방학은 117일에 시작한다. 교사라면 앞의 문장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 제대로 수업 듣는 인간이 한 명일 때도 있다. 수업 시작종과 동시에 심호흡을 할 때, 힘이 되어준 문장이 있다.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자기를 지배할 힘을 내주었기 때문이야.(p48)’ 두렵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이 간혹 훅 들어올 때가 있다. 그들의 당당한 행동을 보면서 내 안에 있는 마그마가 불끈 올라오려할 때, 마인드컨트롤을 하게 해준 문장이다.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 법이니까.(p136)’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관찰자의 입장이 되기도 했다. 올해가 지나면 사리 몇 개는 어딘가에서 만들어져있을 거라며,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 편안함으로 나머지 한 달을 맞이할 지경에 이르렀다.

 

싱클레어라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포장되어있으나 <데미안>은 인간이 품고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동시에 열어 보이며 존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철학과 윤리학과 심리학이 문학과 어우러진 모습. 두 번째 읽으면서 나는 홀로그램을 떠올렸다. 평면적이다가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이중적이고 입체적으로 보이는 묘한 느낌의 이미지. 그 세계에 나를 대입해보며 인간이란 존재와 내 자신의 무의식에 대하여 생각했다.

 

무의식에 접근하는 통로가 꿈이라는 게 신기하다. 날마다 꿈과 현실을 오가며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니! 의식 세계보다 훨씬 크다고 알려져 있는 무의식의 세계. 내안에 있지만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 두렵다.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무의식이란 말이 다시 떠오른다. 거울 속으로 보이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이다. 바로 선 상과 거꾸로 선 상. 거울의 상은 거꾸로 맺히는 것을 실상, 바로 맺히는 것을 허상이라 한다. 선과 악, 의식과 무의식, 두 세상을 경험하며 갈등하는 싱클레어를 보면서 거울을 떠올렸다. 무의식의 세계가 꼭 거울 속에 거꾸로 선 실상인 것만 같아서. 거울 밖에서 내가 느끼는 의식 세계와 거울 속에 거꾸로 서서 실존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점점 가까워지는 상상을 했다.

 

드라마 <남자친구>의 박보검이 가진 매력은 솔직함이다. 느낀 대로 행동하고 내면이 원하는 바를 드러내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아닐 때만 두려움을 갖는 법이야.(p163)’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은 무의식 속 자신이 원하는 자아인지도 모른다. 작품 속 캐릭터의 힘이든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힘이든 드라마를 보면서 자주 설렘을 느꼈다. 남녀 관계를 떠나서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의 외로움을 어루만져 주려는 그 순수에 가슴이 뛰는 거다. 아마도 드라마 속 박보검은 의식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와 가장 근접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바라보는 나는 홀로그램처럼 이중적일 때가 있다.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들이 구석구석에 숨어있음을 간혹 느낀다.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p9)’ 나란 인간을 해석하고 싶어졌다.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때론 에둘러가려는 유혹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더욱 먼 길이 될 지도 모르지만, 소설 <데미안>이 나에게 용기를 준다. 그 모습까지 받아들여야 진짜 를 만날 수 있다고. ‘바깥 세계가 처음으로 나의 내면세계와 순수하게 일치하는 울림을 냈다.(p166)’ 말하던 주인공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작가는 이 문장을 쓰면서 스스로 얼마나 공감했을까. 의식과 무의식이 일치하여 공명을 하는 순간의 희열을 내 것으로 경험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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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0주년 기념 특별한정판)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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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가늠할 수 없는 심해의 깊이라든지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는 우주의 넓이라든지 아이를 출산하는 고통이라든지. 첫 아이를 낳던 순간을 기억한다. 심호흡을 고르고 준비했던 두근거림이 무색하게도 예상을 훌쩍 뛰어넘던 경험의 느낌표를. 고통과 희열이 미묘하게 겹쳐지면서 몸 전체로 스며들었다. 극과 극을 안는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침대 맡에 두고 겉표지만 바라보며 두 주를 보냈다. 인공의 첨가물이 묻지 않은 한지를 연상시키는 표지가 마냥 좋아서, 하얀 바탕에 쓰인 제목의 글씨체가 그저 좋아서, 책안에 담겨있을 2020일의 시간이 감히 무거워서, 2016년에 찍힌 신영복 선생님의 마침표가 불현듯 아쉬워서. 섣불리 첫 걸음을 떼기가 두려웠다.

 

1988, 대학 1학년 때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p396)’는 문장이 남았다. 그로부터 30년 후, 50세가 된 나. 다시 펼쳐보니 이번에는 다른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교도소의 우리들은 (중략)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중략)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p396)’

그 때의 나는 왜 이 문장을 보지 못했을까. 같은 책을 읽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생소했다. 486페이지에 차곡차곡 담긴 문장들을 곱씹어보며 불쑥 불쑥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20세의 내게는 가난하게 살던 자신만 보였지만, 이제는 주변과의 관계가 보였다. 30년이란 시간은 내 영혼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나보다.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렇게나 많은 사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마술사의 좁은 봉 안에서 화들짝 나오는 꽃다발인양 당신의 생각은 좁은 공간에서 쉴 새 없이 피어났다. 아버님께, 어머님께, 형님께, 동생에게, 형수님께, 계수님께 보내는 서간문은 단순한 안부 편지를 넘어서는 장르였다. 몸이 담긴 공간만큼이나 제한된 지면에는 인간과 자연과 세상과 삶과 관계가 진하게 묻어있었다. 인간의 사유는 몸이 담긴 공간의 크기에 제한되는 대상이 아님을 알았다.

소소하게 발견한 기쁨과 웃음과 행복을, 스스로의 숨결로 당신을 데우며 느꼈을 고통과 번민과 슬픔의 흔적을 진솔한 색채로 보여주는 글이었다. 내내 먹먹했다. 수인이라서 답답했겠다, 불쌍하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되레 감옥 밖의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당신은 매순간 당당했고, 따뜻했고, 여유가 있었고, 깊었다. 그 모습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의 삶을 돌아보고 나태함이 섞여있던 시간들을 반성했다.

 

1cm의 토양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80년에서 400년 가까이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간간이 삽입된 엽서에 친필로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보면서 토양을 떠올렸다. 커다란 영혼에서 부스러진 흙 알갱이들이 낮은 곳으로 겸손하게 놓였다. 한 글자도 허투루 쓰이지 않은 또박또박한 글씨체는 보는 것만으로 찡했다.

몇 년 전부터 카카오 톡 배경 화면으로 걸린 노란 바탕의 처음처럼’. 휴대폰을 열어 물끄러미 네 글자를 바라보았다. 드라마 중간에 삽입되는 광고처럼 50세의 삶에 등장하던 소심함과 나약함이 작아지는 듯했다. 다시 처음처럼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영혼에도 물리량이 있다면 어느 만큼일까. 줄줄 이어진 천 조각처럼 당신에게서 나오던 사색의 길이라든지, 시야의 넓이라든지, 마음에 담긴 세상의 부피라든지, 체감하는 생명의 무게라든지, 심장에 담긴 열정의 온도 같은 거 말이다. 2020일의 사색을 덮는 순간, 첫 장을 열던 순간과의 온도차로 인해 뭉클했다. 왠지 알 것 같았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을 통해 당신의 문장들이 강물처럼 나의 심장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그 물방울들이 온통 영혼을 그득하게 채워 바다처럼 깊이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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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2-07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다섯 번 읽었어요. 제 머리속에 그림을 그리시네요.

나비종 2018-12-07 18:09   좋아요 0 | URL
어떤 느낌의 그림이었을지 궁금한데요?^^
 
내몸안의 지식여행 인체생리 - 신비롭고 놀라운 몸의 원리를 찾아 떠나는 호기심 탐험!, 재미있는 교양 과학 산책
다나카 에츠로 지음, 황소연 옮김 / 전나무숲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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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이란 끝도 없이 외워야하는 암기 과목에 불과했다. 해면동물, 환형동물, 편형동물, 극피동물, 절지동물, 강장동물, 연체동물,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균류, 양치식물, 선태식물, 종자식물, 균류, 원핵생물, 원생생물, 고세균, 진정세균... ,, 헝클어진 머릿속을 진정시켜도 방앗간 가래떡 나오듯 희한한 이름들은 줄줄이 이어졌다. 뭔 생물이 이리도 수없이 꿈틀거린단 말인가. 세포 내 소기관들의 명칭은 또 어떤가. 리보솜, 리소좀, 미토콘드리아, 골지체, 중심체, 중심립, 소포체, 방추사, 액포는 그나마 나은 축에 속했다. 아밀라아제(아밀레이스), 리파아제(라이페이스), 펩티다아제(펩티데이스), 말타아제(말테이스), 락타아제(락테이스). 아제 아제 시리즈에서 남아있던 미련의 찌꺼기가 싸악 설거지되었다. 하아, 생물과는 맞지 않아, .

 

생물을 이해과목이라 주장하시는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을 연수 때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대변이 왜 황금색인 줄 아세요?” 내 선입견을 깨뜨려버린 운명의 질문이다. 산소를 잃은 적혈구의 찌꺼기로 만들어진 쓸개즙이 소화 과정에서 분비되어서 그렇다고 하셨다. 찌꺼기까지 남김없이 활용하는 인체의 신비에 반해버렸다. 몇 가지 사례를 더 들면서 생물 과목의 재미를 어필하신 선생님은 나를 생물 마니아로 포획하는 데 성공하셨다. 아하! 몰입도가 확 높아지면서 전공인 물리보다 더 좋아져버렸으니. 방학 때 연수를 받고 난 후, 수업 시간에 신이 나서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당시 많은 아이들은 내 전공이 생물인 줄 알았다고 했다. 몰랐으니 여기 저기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를 했고, 공부하다보니 점점 더 생물의 매력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의 일이다. 여전히 나는 별자리 다음으로 생물 단원을 가르칠 때 가슴이 뛴다.

 

이 책에서 나는 두 번째 운명의 기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휘리릭 넘겨보았을 때에는 교과서 같은 냄새가 풍기더니, 정독할수록 재미있는 거다. “이거 너무 재밌다!” 지나가던 고2 딸에게 말하니, “엄마도 역시 이과 체질이네.” 한다. 어떤 부분은 소설보다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니 이과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과와 이과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배합되었다. 몰랐던 점도 많이 알게 되었다. 씹던 껌이 풍선껌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느낌이랄까. 책을 향해 숨결을 불어넣으니 상식이 확 부풀어 올랐다.

1부는 <인체 생리>로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서 한 번씩은 얕은 지식으로 언급되는 내용들이다. 혈액, 소화, 호흡, 순환, 배설, 내분비, 신경, 감각, 대뇌, 반사, 근육, 피부, 생식 등. 수업 시간에 해당 단원을 가르칠 때 투입하면 살짝 깊이 들어가면서 흥미를 끌만한 요소가 담겨있다. 두고두고 읽어보려 한다.

2부는 <임상 생리>로 현대 과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줄기세포, 한방치료, , 항생물질, 기생충, 프리온, 외인성 내분비 교란 화학물질, 프리라디칼, 방사선, 전자파 등. ‘과학책 읽어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학업에 대한 의지가 바닥을 드러내는 요즘의 중 3교실에서 매시간 한 쪽씩 읽어주고 싶다.

 

몇 주 전, 어깨 도수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도수 치료>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다.

맨손으로 / 몸을 치료받는다는 것은 / 매번 뭉클하고 / 벅차오르는 일이다 // 금속성의 날카로움이나 / 화학물질의 건조한 치유에는 /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 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든다 // 아픔에 반응하는 몸이 / 정직하게 움츠러들면 / 정성스레 조절되는 / 세심한 강약의 다독임 // 36.5도를 품은 경계가 / 나의 경계와 맞닿을 뿐인데 / 따뜻한 물에 뿌려지는 소금인양 / 나의 고통은 서서히 녹아든다 // 손과 몸 사이 / 그 미세한 간극을 통해 /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 건네어지는 걸까

이 책을 통해 시에서 언급한 존재하지 않는,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아이가 상처를 입었을 때, 엄마가 달려가서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 통증이 누그러진다. 통증은 대뇌에서 감지하는데,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행위가 뇌에서 엔돌핀이라는 물질을 분비시켜, 그 결과 통증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p147~148)’

 

문학은 고전을, 과학은 최신판을 읽으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발전되고 변화하는 과학계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어 보인다. 아이들에게 종종 말한다. 과학교과서에 실린 지식들은 교과서가 출판되기 직전까지의 진리이지 고정 불변의 것은 아니라고. 이 책이 나온 2003년으로부터 15년이나 지난 책이기에 새로이 발견되었거나 변경되어야 할 지식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일부 번역서에서 보이는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몰입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적혈구의 찌꺼기가 쓸개즙의 형태로 남김없이 활용된다는 점, 사구체에서 걸러진 포도당이 세뇨관에서 재흡수 되어 단 한 분자의 포도당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고, 우리의 몸은 스스로를 소중하게 아끼는 방향으로 시스템화 되어있음을 깨닫는다.

표현방식은 달라도, 지식의 깊이가 세월에 따라 달라지더라도 인체에 대하여 변하지 않는 사실들은 선명하게 존재함을 알았다. 몸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을, 정신 못지않게 소중히 여겨야한다는 것을, 이유 없는 변화는 없으므로 몸이 하는 말에 세심하게 마음을 기울여야함을, 방대한 지식을 훌쩍 넘어 신비한 매력을 지녔음을. 이런 이유로 인체는 세상에 존재하는 감동스런 대상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하려 한다.

 

 

p50, 그림 : 글리세린 글리세롤

p60, 9째줄 : 암모니아로 암모니아를

p99, 1째줄 : 차단하더라고 차단하더라도

p268, 3째줄 : 전자파 전파

p269, 그림과 본문 : 양자 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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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12-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죠?
생물이 워낙 문과와 이과적 요소가 섞여 있는 과목이기도 해요 (저, 생물 전공자 ^^).

나비종 2018-12-04 22:54   좋아요 0 | URL
예!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생물의 매력이 흠씬 묻어나는. . 지식이 업그레이드 되었어요ㅎㅎ
 

<제목> 도수치료사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떡 드세요" 들으며 출근길 자동차 시동을 거는 청취자입니다. “떡 드세요와 음악 한 곡 정도 듣는 시간은 자동차 쓰나미가 밀려오기 전이라 직장까지 5분 정도면 도착을 해요. 어쩌다보니 거의 매일 방송을 청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몇 주 전부터 방송을 들으면서 생각했어요. 나도 사연을 보내면 될까? 에이, 저런 건 특별하거나 행운이 많은 사람이나 채택되겠지 하구요. 오늘, 드디어 결심을 했습니다. 제 마음을 전하고 싶은 분이 생겼거든요. 사연을 쓰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망설여져 손끝이 주춤거리지만 그분에 대한 고마움이 제게 용기를 주네요.

 

저는 올해로 오십 세가 되었습니다. 반백에 남들 한다는 거 다 해 보려나 제게도 오더군요. 한 달 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이요. 충돌 어쩌구 하며 무슨 전문용어로 설명해주시던 의사선생님의 친절함에도 불구하고 병명은 도통 못 알아듣겠더라구요. 제 왼팔이 저 하늘의 별을 당당하게 가리킬 그날을 위해, 퇴근 후 정형외과와 물리치료실로 일주일에 서너 번씩 출근하고 있습니다.

 

어깨 주사, 팔 꺾기, 충격파, 전기 치료, 약 등 고통의 나날을 안고 지낸지 3주쯤 지났을 때, “도수치료라는 것을 받게 되었어요. 전문 물리치료사 선생님께서 손으로 통증 부위를 마사지하고 운동시켜주시는 거라더군요. 오늘까지 다섯 번을 받았는데요, 제게는 그 어떤 첨단 기계로 하는 치료보다 훨씬 효과가 있더라구요. 치료가 끝나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저를 맡아주시는 OOO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시도 지었어요. 제목은 <도수치료>예요.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이 환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글에 담아보았어요. ^^;;

 

도수치료

 

 

맨손으로

몸을 치료받는다는 것은

매번 뭉클하고

벅차오르는 일이다

 

금속성의 날카로움이나

화학물질의 건조한 치유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든다

 

아픔에 반응하는 몸이

정직하게 움츠러들면

정성스레 조절되는

세심한 강약의 다독임

 

36.5도를 품은 경계가

나의 경계와 맞닿을 뿐인데

따뜻한 물에 뿌려지는 소금인양

나의 고통은 서서히 녹아든다

 

손과 몸 사이

그 미세한 간극을 통해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건네어지는 걸까

 

앞으로 몇 달은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겠지만, 조금씩 당당해지는 왼팔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을 꼭 전하고 싶더라구요. OOO 선생님! 부족한 저의 시가 선생님 손끝의 고단함을 0.1그램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부록으로 배달되는 떡을 직장동료 분들과 기분 좋게 나누어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내주시는 팔 운동 숙제도 부지런히 해 갈게요.

 

 

*2018.11.21. 인터넷 게시판에 사연 올림, 내일 소개된다고 함, 신기하고 재미있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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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11-27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방송인지 알 것 같아요 ^^
그나저나 치료 열심히 받으셔서 불편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수치료 효과가 좋은 것 같더라고요.

나비종 2018-11-27 09:37   좋아요 0 | URL
가끔 들으시는군요. 출근 시간과 맞아들어가서 5분 내외로 듣고 있습니다.
옷을 입고 벗는 데 큰 불편함은 없어졌어요. 초기에만 해도 항상 왼팔 먼저 끼고 오른팔이 거들었거든요.^^;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퇴근 후 시간을 병원에서 많이 보내고 있지만, 몸이 말을 하는 거라 생각하고 성실하게 치료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