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0주년 기념 특별한정판)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가늠할 수 없는 심해의 깊이라든지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는 우주의 넓이라든지 아이를 출산하는 고통이라든지. 첫 아이를 낳던 순간을 기억한다. 심호흡을 고르고 준비했던 두근거림이 무색하게도 예상을 훌쩍 뛰어넘던 경험의 느낌표를. 고통과 희열이 미묘하게 겹쳐지면서 몸 전체로 스며들었다. 극과 극을 안는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침대 맡에 두고 겉표지만 바라보며 두 주를 보냈다. 인공의 첨가물이 묻지 않은 한지를 연상시키는 표지가 마냥 좋아서, 하얀 바탕에 쓰인 제목의 글씨체가 그저 좋아서, 책안에 담겨있을 2020일의 시간이 감히 무거워서, 2016년에 찍힌 신영복 선생님의 마침표가 불현듯 아쉬워서. 섣불리 첫 걸음을 떼기가 두려웠다.

 

1988, 대학 1학년 때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p396)’는 문장이 남았다. 그로부터 30년 후, 50세가 된 나. 다시 펼쳐보니 이번에는 다른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교도소의 우리들은 (중략)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중략)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p396)’

그 때의 나는 왜 이 문장을 보지 못했을까. 같은 책을 읽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생소했다. 486페이지에 차곡차곡 담긴 문장들을 곱씹어보며 불쑥 불쑥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20세의 내게는 가난하게 살던 자신만 보였지만, 이제는 주변과의 관계가 보였다. 30년이란 시간은 내 영혼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나보다.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렇게나 많은 사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마술사의 좁은 봉 안에서 화들짝 나오는 꽃다발인양 당신의 생각은 좁은 공간에서 쉴 새 없이 피어났다. 아버님께, 어머님께, 형님께, 동생에게, 형수님께, 계수님께 보내는 서간문은 단순한 안부 편지를 넘어서는 장르였다. 몸이 담긴 공간만큼이나 제한된 지면에는 인간과 자연과 세상과 삶과 관계가 진하게 묻어있었다. 인간의 사유는 몸이 담긴 공간의 크기에 제한되는 대상이 아님을 알았다.

소소하게 발견한 기쁨과 웃음과 행복을, 스스로의 숨결로 당신을 데우며 느꼈을 고통과 번민과 슬픔의 흔적을 진솔한 색채로 보여주는 글이었다. 내내 먹먹했다. 수인이라서 답답했겠다, 불쌍하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되레 감옥 밖의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당신은 매순간 당당했고, 따뜻했고, 여유가 있었고, 깊었다. 그 모습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의 삶을 돌아보고 나태함이 섞여있던 시간들을 반성했다.

 

1cm의 토양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80년에서 400년 가까이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간간이 삽입된 엽서에 친필로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보면서 토양을 떠올렸다. 커다란 영혼에서 부스러진 흙 알갱이들이 낮은 곳으로 겸손하게 놓였다. 한 글자도 허투루 쓰이지 않은 또박또박한 글씨체는 보는 것만으로 찡했다.

몇 년 전부터 카카오 톡 배경 화면으로 걸린 노란 바탕의 처음처럼’. 휴대폰을 열어 물끄러미 네 글자를 바라보았다. 드라마 중간에 삽입되는 광고처럼 50세의 삶에 등장하던 소심함과 나약함이 작아지는 듯했다. 다시 처음처럼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영혼에도 물리량이 있다면 어느 만큼일까. 줄줄 이어진 천 조각처럼 당신에게서 나오던 사색의 길이라든지, 시야의 넓이라든지, 마음에 담긴 세상의 부피라든지, 체감하는 생명의 무게라든지, 심장에 담긴 열정의 온도 같은 거 말이다. 2020일의 사색을 덮는 순간, 첫 장을 열던 순간과의 온도차로 인해 뭉클했다. 왠지 알 것 같았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을 통해 당신의 문장들이 강물처럼 나의 심장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그 물방울들이 온통 영혼을 그득하게 채워 바다처럼 깊이 출렁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8-12-07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다섯 번 읽었어요. 제 머리속에 그림을 그리시네요.

나비종 2018-12-07 18:09   좋아요 0 | URL
어떤 느낌의 그림이었을지 궁금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