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 -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그림 하나, 시 하나
신현림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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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예술분야를 아우른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한 가지로도 일품요리로서 충분하지만, 어울리는 두 장르는 밥과 반찬인 듯 조화롭다. 예술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생각한다. 그림과 시는 분명 다른 장르이지만 표현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지도 모른다. 색과 색의 경계선을 구분 지을 수 없도록 채색한 스푸마토 기법의 <모나리자>처럼 내면세계를 그린다는 시각에서 보면 경계가 허물어진다.

작은 박물관 하나를 통째로 선물 받은 느낌이라는 이해인 수녀, 한 편 한 편의 글들이 주파수를 제대로 맞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한 점 잡음 없이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는 황인숙 시인, 미술은 말이 그친 자리에서 피어난다는 박영택 미술평론가의 추천 글을 보니 마음속에 설렘이 피어난다. 작가의 세계관을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한다. 자신이든 남을 위해서든 영혼의 쓸모 때문에 시를 쓰는 거라는 생각에 공감하며 이제부터 읽을 책의 분위기를 상상한다.

우리들은 무언가와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 이어짐이 사람과 사람일 때 더없이 따스하다는 서문의 문장이 모닥불처럼 온기를 준다. 명화와 시 속에서 깊고 뜨겁게 숨쉬기를 바란다는 그녀의 의도대로 책 장의 징검다리를 그런 호흡으로 건널 수 있을까.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는 그림과 시의 콜라보이다. 작가의 젊은 시절을 데워주었던 그림과 시를 연결한 에세이다. 책의 제목처럼 주 무대는 다섯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진 미술관이다. , 절망, 사랑, 고독, 위로 등 다섯 가지 주제에는 정서의 색채별로 나열된 그림과 시가 매칭 된다.

수록된 시의 종류는 다양하다. 화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감성과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 시가 연결되기도 하고, 동 제목의 시가 놓이기도 한다. 그림과 시를 양팔저울에 놓고 질량을 잰다면 그림 쪽으로 중심이 기운다. 시는 그림이 등장하는 순간에 흐르는 BGM 효과를 낸 달까. 작가가 고흐와 브뢰헬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이 두 화가의 작품은 두 점씩 수록되어 있다. 그림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사소한 요소에도 드러난다. 화가에 대해서는 출생과 사망이 표기되어있지만, 시인에 대해서는 푸시킨과 도연명을 제외하고는 이름만 실려 있다.

한적한 시골에 자그마한 미술관을 짓고 수집한 그림을 전시한 큐레이터가 우연히 들른 나그네에게 소장품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장면을 상상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책이다. 한 작품 한 작품을 지날 때마다 작가가 계속 말을 거는 듯하다. 나는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나는 이 작품에서 슬픔을 보았는데 당신에게도 그게 보이나요? 하고.

 

노랑, 분홍, 카키, 스카이블루, 보라색. 각 장을 시작하는 페이지의 색깔이다. 간지처럼 끼워진 색깔의 장을 다섯 손가락에 끼워 한꺼번에 바라본다. 조화를 이루는 파스텔 톤의 무지개가 떠올라 마음이 안정된다.

그림 한 쪽, 시 한 쪽에 더해진 짤막한 해설은 대부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그림과 시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 판단한다. 작가는 그림과 시를 연결 짓는 것으로 8할의 역할을 한다. 예술이 뿜어내는 향기를 호흡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때문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호흡을 멈추게 된다. 여운을 음미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게 만들어준다. 한 점의 작품에 네 쪽씩 할당된 느낌이랄까. 그림--작가-독자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김정희의 <세한도>에 숙연해지는 신경림 시인의 <다시 느티나무가>가 연결되며 누구나 인생의 세한도가 하나쯤은 있을 거라는 작가의 멘트가 이어진다. 그저 버틸 수밖에 없는 날들, 춥고 곤궁한 날들을 언급하는 말에 대학교 2학년 즈음의 장면이 불쑥 떠오른다. 식당 서빙을 하다 쓰러져 주방의 뒷방에 누워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날이다. 그때가 50대 어머니의 세한도가 아니었을까. 나의 세한도는? 그저 버틸 수밖에 없었던 30대 정도였던 듯하다.

 

칸딘스키의 <푸른 하늘>과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앞에서 오래 서성인다. ‘마음은 미래에 살고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라는 문장이 따스하다. 그림에 담겨 꿈틀거리는 대상에게서 자유로운 생명체가 연상된다. 마음이 산뜻해진다. 언젠가는 날아오를 수 있다며 토닥토닥 부드러운 깃털 같은 위로를 준다. 드넓은 하늘의 색채와 어우러지면서 풍선처럼 둥둥 미래의 행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편안해진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 없는 / 그런 길은 없다 // 나의 어두운 시절이 / 닮은 여행을 하는 / 모든 사랑하는 이들에게 / 도움 될 수 있기를’. 나의 글이 시의 문장과 같기를 바라며 베드로시안의 <그런 길은 없다>에 나오는 문장에서 위안을 받는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볼 때마다 설렌다.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쾅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중략)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중략)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언제 이토록 두근거리는 시를 쓸 수 있을까. 넘사벽의 시 앞에서 잠시 부러워한다.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보는 순간 마음이 정갈해진다. 산다는 건 번잡한 물건들, 온갖 감정의 피로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단순함에 그 본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해설에 공감한다. 요즘 물건을 하나둘씩 정리 중이다. 미련이 묻은 아름다운 쓰레기를 간택할수록 속이 시원해진다. 몸과 마음이 별개가 아니듯 감정도 마찬가지인가. 단순함에 깃든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낀다. 과학자들도 이런 심정으로 자연현상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겠지.

골비츠의 그림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는 보는 순간 전율이 인다. 흑백의 선들이 꿈틀거리면서 어머니의 절망을 뿜어낸다. 선의 음영만으로 이리도 절절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니! 파울클레의 그림 <황금물고기>는 빛나는 햇살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고흐의 붓 터치가 좋다. <자고새가 있는 밀밭><별이 빛나는 밤>.

클림트의 <키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감상의 목적으로만 곁에 두는 아이템이다. 모든 날들이 좋았던 도깨비님처럼 그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그저 좋다. 지인들에게 어필한 결과, 꽂지도 않는 머리핀, 쿠션, A4용지만한 종이액자그림, 2단 우산, 3단 우산, 머그컵을 선물 받아 소장중이다. 아이돌 굿즈를 모으는 심정이 이와 비슷할라나.

 

깊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처럼 읽히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림인 듯 생생한 풍경을 펼쳐 보여주는 시도 있었다. 화가와 연결되며, 시인과 연결되며, 작가와 연결되며, 때로는 과거의 나와 연결되며 따스한 시간을 호흡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흔들림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모든 예술은 자체로 경이로움이다. ‘어떤 시는 / 우주만큼 / 크다 // 어떤 / 그림은 / 연인만큼 / 다정하다는 뒤표지의 문구처럼 예술작품 너머의 마음들과 연결되다보니 한동안 잊고 있던 나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림들을 보니 사진과의 차이점이 보인다. 사진도 빛과 구도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는 장르이지만 그림은 내면세계를 보다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인 듯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을 연결하고 때로는 영혼의 안팎을 한꺼번에 겹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새로운 풍경을 보면 상쾌한 공기가 스며들어와 숨을 한껏 들이마시게 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건 고인 물처럼 꼼짝없이 마음이 정체될 때 그렇다. 차라리 한껏 흔들리고 나면 의외로 쉽게 정리될 때가 있다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예술작품을 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새로운 그림이나 글이나 음악은 가슴을 향해 이색적인 숨결을 불어넣어주니까. 예술작품은 그렇게 한껏 우리를 흔들어놓으며 영혼을 데워주는 게 아닐까.

 

 

p58 그림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의 색채: 보라색파란색

p15, p182의 작가 이름: 쿠스타프 클림트구스타프~

p269 1: 산모통이산모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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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식물상담소 - 식물들이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
신혜우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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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짚은 어르신인양 시들시들하다가도 좋아하는 환경을 만나면 금세 청춘 모드로 돌변해버리는 존재. 식물만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교감하는 대상이 있을까. 거대한 녹색 날개를 펼친 공작새처럼 창밖에서 하늘거리는 나무를 바라본다.

커피숍의 2층에 있는 이 자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다. 글을 쓰다 간간이 고개를 들면 초록빛이 바로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햇살이 묻은 양 군데군데 노랑이 눈에 띈다. 머지않아 갈색비가 내리면 겨울잠을 자겠지.

동물이 직진의 삶을 살아간다면 식물은 원형의 삶을 반복한다. 극서의 열대지방이나 극한의 냉대지방에서는 삶의 방식이 다르겠지만 나는 사계절 속에서 살아가는 다이내믹한 식물들이 좋다. 새눈이 트고 잎이 자라고 꽃을 피우다 잎을 떨구고 다시 삶을 준비하는 과정은 인간의 일생의 축소판 같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식물의 삶은 반복된다.

삶의 사이클을 품은 채 몇 천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는 나무를 보면 경외감을 느낀다. 장수하는 거북이나 여타 동물들도 인간의 수명을 넘어선다지만 식물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하는 듯싶다. 어쩌면 식물은 그 옛날 진시황도 이루지 못한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이웃집 식물상담소는 식물을 사랑하는 식물학자의 에세이다. 식물학자라면 당연히 식물을 사랑하는 게 아니냐고? 모든 학자가 연구대상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냉철하게 학문적인 대상으로만 보거나 그 분야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신혜우 작가에게 식물은 더불어 살아가는 친구에 가깝다. 객관적인 독자로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중간 중간에 그려진 식물 그림 몇 장만 보면 절로 알게 된다. 작가의 마음이 투영된 그림에 초코파이 CF가 겹쳐진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진다. 화가이기도 한 그녀의 그림에서 애정이 물씬 풍긴다.

4개의 부로 들어가는 각각의 출입문에는 덩굴처럼 그려진 표지 그림의 변주가 있다. 1부는 열매, 2부는 꼬투리와 꽃, 3부는 단풍과 잎, 4부는 무로 돌아간 식물과 다시 초록 잎이다. 오른쪽과 왼쪽 아래 부분의 그림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알아채며 섬세한 표현력에 미소를 짓는다.

겉표지에 드러난 첫 인상은 결이 고운 아름다움이었다. 따스하고 잔잔한 동화를 연상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서문> 직전에 그려진 도깨비쇠고비였다. 말라비틀어진 이파리를 어찌나 정성스레 그려놓았던지. 이 책에서는 아름다움을 넘어 흙냄새, 땀 냄새를 맡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이 맞았다. 그림에 끌려서 들어갔다가 내용에도 못지않은 매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책의 제목처럼 이 책에는 식물을 소재로 하여 찾아온 사람들과 상담한 이야기가 주로 담겨있다. 그들의 대화는 식물로 시작하여 삶으로 마무리된다. 소재가 식물일 뿐이다. 상담에서 오고가는 주된 정서는 대상에 대한 올바른 사랑이다.

사랑에 바르고 틀린 게 있겠냐마는 과도한 사랑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식물은 우리에게 잘못된 사랑의 결과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과하게 물을 주었을 때 썩어가는 뿌리로, 과하게 편안한 장소에서는 아름다운 꽃을 절대 피우지 않는다.

집에만 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는 식물을 보며 나의 똥 손을 탓했으며 꽃이 피지 않아도 원래 그러려니 했다. 집에 놔두었다가는 말라비틀어질 거라는 생각에 식물을 위한답시고 아파트 화단 한 구석에 슬그머니 심어둔 적도 있다. 추운 바깥에서 얼어 죽으리라는 걸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원래 더 자랄 수 있는 열매 식물이 많다는 작가의 말에 주춤한다. 맞지 않는 환경에 머물 때, 식물은 시크한 초록만을 반복한다. 근근이 버티다 삶을 마감한다. 생명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삶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꽃이 피지 않을 때는 이유가 존재함을 언제부터 잊고 있었을까.

 

신혜우 작가의 글에서는 풀 냄새가 느껴진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 같기도 하고 연약한 듯 보이면서도 강한 내면이 보인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글쓰기를 목표로 한다는 작가의 말이 따스한 이불 같다. 나의 글로 누군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책에서는 어린이 상담자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과의 대화를 보며 교육의 본질을 생각했다. 적합한 환경에서는 모든 식물이 무럭무럭 자란다고 한다. 아이들 안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는 게 교육의 본질이니까. 이제껏 나는 얼마나 그들에게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던가. 식물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생각이 많아졌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에 작가는 좋아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어떤 일이나 대상을 좋아하는 게 자연스럽고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두 갈래 길에서 굳이 한 가지를 억지로 선택하려 고민하지 말라고 한다. 접힌 꿈은 언젠가 다시 펼치면 된다고, 접힌 채로도 더 멋진 무엇이 될지 모른다며 긍정적인 희망을 품게 만들어준다. 화가와 식물학자.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하지 않은 작가는 결국 독자에게 두 가지를 다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책을 선물한다.

 

책을 읽으며 철렁했던 건 절화에 대한 언급이다. 뿌리가 잘린 식물이 살아갈 수 없다는 건 조금만 더 생각하면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을. 잘린 꽃이 한 번도 살아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문장이 새삼스러웠다.

꽃집을 지나치다 뿌리가 잘린 꽃을 보면서도 예쁘다는 생각만 해왔다. 관점의 차이가 놀라웠다. 식물을 가까이에 둔 사람의 시선에는 꽃이 그렇게 보이는 거였구나. 식물을 인간이라 상상하며 절화에 대입하니 섬찟하다. 하얀 빛과 연두 빛이 어우러진 소국을 좋아하는데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나 갈등이다. 알고 나서도 마냥 모르는 듯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숟가락일까요, 젓가락일까요. 단감 씨앗을 버리기 전에 상담 샘께서 물으신다. 그게 뭔 소리예요? 여유 있게 미소 지으신 샘은 감 씨를 반으로 가르신다. ! 숟가락 모양의 배가 보인다. 싹이 터서 장차 식물로 자라날 부분을 라고 한다. 교과서에 그려진 종자의 구조를 실제로 처음 보았다.

종자의 구조를 얼마나 많이 가르쳤던가.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느껴져 살짝 무안했다. 감 씨가 반으로 갈라진다는 사실을 새삼 인지한 순간 찌르르 전율이 일었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듯 학문적인 식물과 생명체로서의 그것을 인지한다는 건 분명 차이가 있으리라.

 

식물은 가구가 아니다. 꽤 오랜 시간, 은연중에 식물을 화장대나 침대와 별반 다름없는 사물로 인식해왔다. 식물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숨을 쉬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하늘거리는 초록 색종이로 만든 조형물정도랄까.

주방 창가에서 키우는 몇몇 식물들이 있다. 화분 안의 식물이 살아있는 생명이라 인지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설거지를 하는데 식물이 숨을 쉰다는 사실이 확 다가오는 거다. 엉뚱하게도 말이 없는 친구처럼 나를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데 희한하게도 생각이 바뀐 시점부터 서서히 식물들이 생기를 찾아가는 듯했다. 새끼 손톱만한 분홍빛이나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보랏빛이 주방 창가에서 흔들거리기도 했다. 갈색으로 다 말라비틀어지는 잎을 보아도 절망하지 않게 되었다. 그럴 때가 되었음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다시 연둣빛 잎을 보여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작가가 왜 시든 식물을 그렸는지 이해가 되었다. 식물은 정형화된 이론이 아니라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실제임을 알았던 게 아닐까. 생명으로서의 자연스러움은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있지 않음을. 검버섯이나 주름진 얼굴에 시간과 햇살과 바람과 우주의 기운이 고인다는 사실을.

 

 

p140, 2째줄: 대게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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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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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탐하는 늙음의 이야기. 소설 파우스터의 모티브는 괴테의파우스트이다. 회사 메피스토를 매개로 젊음을 구매하는 노인들이 삶을 조종당하는 젊은이들과 삼각구도로 연결된다. 회사에서 젊은이들의 뇌에 몰래 심은 칩이 안테나 역할을 하며 그들의 경험을 노인들의 장치에 전송한다. 노인들이 안마 의자에 헬멧과 같은 장치를 장착하면 젊은이들의 시각, 청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노인들은 자본과 권력을 이용해 의도적인 상황을 만들고 젊은이와 가까운 인물들을 포섭하여 모바일 애완견을 키우듯 젊은이의 삶이 흘러가도록 조종한다.

젊음을 착취하는 노인들을 파우스트’, 젊음을 빼앗기는 청년들을 파우스터라 칭한다. 소설은 파우스터가 파우스트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을 연다. 주인공이 야구선수라 용어가 생소하여 하나하나 검색해야 했지만 문장의 흡인력은 낯선 허들을 부드럽게 지나도록 만든다. 쫓고 쫓기는 두뇌싸움과 그들의 밀당이 블록버스터급 영화처럼 마지막까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묵직한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책이다. 탄탄한 구성과 두께의 중압감을 넘어서 진공청소기 같은 전개가 펼쳐진다. 무방비한 상태로 이런 책을 만나면 한동안 멍하다. 탁월한 문장력과 속도감이 느껴지는 내용에 압도당한다. 참 좋았다며 단순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 의욕적으로 노트북 앞에 앉는다.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편은 아니건만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나의 문장에 주눅이 든다. 며칠 만에 후다닥 읽어놓고선 멈칫거리기를 반복하니 리뷰는 보름이 넘도록 진척이 없다.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읽었을 때도 비슷했다. 그나마 짧은 분량에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그린 이야기라 낄낄대면서도 뭉클한 느낌을 가까스로 적었건만. 생과 사로 이어진 길목에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늙음이라는 심오한 주제라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걸까. 고민 끝에 늙음이 끄집어낸 신변잡기스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하기로 한다. 끝내 소설의 깊이를 포용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를 인정한다.

 

요즘 자꾸 예뻐지는 인간이 있다. 이미 충분하여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는 필요 없건만 30년은 더 젊어 보인다는 경이로운 말까지 듣는 지경에 이른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 나비종의 글을 몇 번 접해보면 이 인간이 종종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사실을 절로 알게 될 테니. ‘젊다예쁘다는 동의어가 아니라고? ~ 젊음은 자체로 아름다움임을 몇 십 년 후의 당신은 절감하리라. 사회성 멘트 10년을 DC 한다 해도 찬란한 청춘으로 돌아간 듯 마음이 통통 튄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퇴행성관절염에 고지혈증에 만성위염의 삼재를 짊어진 노인 모드였기에 최근의 변화는 자체로 경이롭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일상을 되감기한다.

첫째, 듣는 음악이 변했다. 이용권의 기한이 만료되는 바람에 연장과 신상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잠시 예전에 저장했던 음악을 듣고 있다. 30대 때 듣던 노래들이다. 재생될 때마다 각각의 음표는 지나간 장면들을 매달고 넘실거린다. 서툰 모습 그대로도 의미 있고 눈부시던 시절로 종종 타임 슬립 했다.

둘째, 입던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 옷을 입던 모습이 떠올랐다.

셋째, 아이들이 타지에 나가는 바람에 타발적 신혼부부모드가 되었다. 새삼스러운 어색함에서 조금씩 나아간 한 발의 효과가 서서히 쌓임의 미학을 펼치는 중이다. ‘사이좋은 부부 코스프레가 반복되니 코스프레가 빠져버렸다.

넷째, 몇 가지 일들이 BGM으로 깔리니 새삼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희끗한 소금이 올라와 축 늘어진 미역 줄기 같았던 모발 모발. 퇴근길에 불쑥 미용실에 들렀다. 어둑해질 때까지 텅 빈 위를 감당한 보람이 있었다. 볼륨 매직 셋팅으로 다시 부활했다.

다섯째, 이 여세를 몰아 지난 주말에는 몇 년 만에 26년 지기의 집에 놀러갔다.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 속상했던 에피소드, 예전에 함께 했던 추억들이 이틀 동안 우리를 둘러쌌다. 말줄임표와 침묵이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간들. 에너지를 완충하고 회춘이 되어 컴백했다.

 

몸이 변하면 마음이 변하는 걸까, 마음이 변하면 몸이 변하는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처럼 애매하다. 둘 다 명제를 증명할만한 사례가 어느 정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체중으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며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 다이어트 성공으로 삶이 180도로 바뀌었다는 경험담은 몸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진 예이다. 실체인 몸은 즉각적으로 변화를 만들거나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마음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몸의 변화는 발현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인다.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이 예뻐진다든가 마음이 즐거우면 표정이 온화해지는 것처럼 주로 얼굴을 통해 약간의 변화만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은 이러한 편견을 가볍게 깨뜨린다. 1979, 미국 하버드대의 심리학과 엘렌 랭어 교수는 70~80대 노인 8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한다. 20년 전의 환경을 재현한 고립된 공간을 노인들에게 제공한 다음,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집안일을 직접하고 생활하도록 주문한다. 1주일 만에 나타난 결과는 놀랍다. 마음만 청춘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그들 모두는 시력, 청력, 기억력, 지능, 악력 등 신체 나이가 50대 수준으로 변화한다. EBS<황혼의 반란> 에서도 왕년의 스타 5명을 대상으로 1주일 간 비슷한 컨셉으로 시간 여행을 한 결과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 BBC<더 영 원스>라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보여줬다고 한다.

시간을 되감기한 실험 결과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들을 검색해보았다. 수긍이 가는 해석이 눈에 띈다.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거다. 시간을 거슬러가는 과정에는 매번 함께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 그들과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최근 나의 젊음이 발현되기 전에도 오랜 친구와의 푸릇한 대화의 시간이 있었음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젊음과 늙음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니 독자에 따라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이다. 젊은이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의지에 의한 주체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지리라. 노인의 입장이라면 자유의지를 젊은이에게 투영하여 젊음을 맛보려는 삶이 마음에 남을 터이다. 그렇다면 나는? 50대는 애매하다. 젊음과 늙음 사이를 서성이는 어정쩡한 경계랄까.

나는 후자의 입장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파우스트로서의 삶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표면적으로는 파우스트가 파우스터를 노예인 듯 조종하지만 이는 실체 없는 거품처럼 허무하고 안쓰럽다. 대리만족하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나의 것이 아닌 젊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나. 스스로의 근육 없이 번듯한 목발에 의지하는 걸음으로 언제까지 갈 수 있는가.

책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몽환적인 표지 그림이다. 복잡한 나뭇가지 아래 인간들의 옆모습이 보인다. 그림자 작가라는 나현정 작가의 명칭이 생소하여 다른 작품을 찾아본다. 흑백의 뒤엉킨 선들이 시선을 붙든다. 컬러감보다 무채색이 어울리는 작품 세계를 지닌 작가이다. 갈수록 무채색에 끌린다. RGB 0,0,0255,255,255 사이의 그러데이션이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재현하는 것 같아서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 역시 무채색 못지않게 섬세하니 책의 내용에 적절한 그림이다.

몸과 마음은 본디 하나라서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며 나만의 결론을 내린다. 무엇이 먼저인지 구분 없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몸이 젊어지면 마음이 젊어지고 마음이 젊어지면 몸이 젊어지는 변화가 이어지니까. 그 둘은 쌍방향의 화살표 사이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삶의 흐름을 만드는 지도 모른다. 충전과 방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삶의 배터리가 줄어드는 것이리라.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는 건 과거에 얽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찬란했던 에너지의 불씨를 되살린다는 의미이다. 몸과 마음은 온전한 나의 것이어야만 삶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우리는 모두 아직 늦지 않았다. 마음이 늙을 때 육체는 마음에 동조하여 사그라지는 지도 모르니.

 

p109, 밑에서 8째줄: 움켜진 움켜쥔

p322, 밑에서 9째줄: 모르겠군요.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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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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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지 않는 나이가 있다. 13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장면들로 채워졌던 시간. 무에 그리 힘들었을까. 지금의 시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뚜렷한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건만.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와 잊힌 이유들이 중첩되어 서러운 감정들을 수증기처럼 머금었나.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지 현재의 마음이 과거에 담겼던 감정의 코팅지로 둘러싸인다. 손가락 끝으로 코팅된 비닐을 당기니 살갗이라도 벗겨지는 듯 아리다.

서른 언저리의 내가 눈가에 둔탁한 그림자를 탈피하듯 남기곤 후다닥 되돌아간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 선명해 보이는 선을 따라간다. 이내 끄트머리는 안개 자욱한 길로 이어진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 듯 옅은 꼬리를 흘리는 비행운이 된다. 선뜻 잡지도, 깔끔하게 돌아서지도 못한 채 매번 서성이는 오십 대가 현재의 나다.

 

상처는 상처를 여는 열쇠인가. 작가로부터 소설 속 주인공으로 이어지는 상처의 도미노 끝에 선 듯 덮어왔던 상처가 서서히 틈을 보인다. 소설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점점 투명해지더니 아득한 너머로 어정쩡한 삼십대의 내가 보인다. 다른 상황의 이야기건만 그 안에 담긴 익숙한 파편 몇 조각에 시선이 머문다.

소설밝은 밤은 상처의 외피로 둘러싸인 치유의 이야기이다. 서른둘의 지연과 외할머니의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다양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엄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와 그녀들 주변에 있는 세 명의 여인들은 결혼으로 이어진 관계, 이별, 가족, 죽음, 사회적 배경을 원인으로 각기 다른 상처를 품는다.

주요 시대적 배경에는 백정이 차별받던 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천주교 박해,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담긴다. 그 시대를 건너는 여인들은 위태위태한 음표로 보이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스스로의 삶을 향한다. 치열함을 넘어서는 숭고함을 뿜어낸다.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히는 건 무엇인가. 나의 경우, 관계가 주는 상처가 가장 아팠다. 커다란 아픔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된다. 책에서도 지연과 엄마, 엄마와 외할머니 등 모녀 사이의 뒤틀어진 관계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들의 갈등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와 맞물린다. 작가는 단단하게 꼬여있던 매듭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풀어지는지 밀도 있게 보여준다.

촘촘한 깊이로 스미는 문장에 주춤, 언젠가 심장에 새겼던 서러움을 담은 익숙한 문장들을 보며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멈칫한다. 밝은 밤을 건너는 동안 자주 아프겠구나. 마음에 고여 있던 물기가 철가루라도 된 듯 서서히 눈두덩을 향한다. 눈가가 뜨거워진다. 괜찮아져야만 했던 괜찮지 않은 나를 외면하며 괜찮아진 줄 알던 내가 보인다.

그럼에도 손가락은 새벽까지 이끌리듯 책장을 넘겼다. 외면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작가에게서 온 건지, 소설 속 그녀에게서 온 건지, 이제는 마주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간절함에서 온 건지, 혹은 이 모두의 공명으로 인한 건지 까닭 모를 중력에 이끌리듯 빠져들었다.

 

기쁨이나 즐거움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 반짝이는 햇살을 머금은 감정들은 크고 작은 강물로 존재를 돌다 증발한다. 반면 상처에서 배어나온 물기어린 감정은 찐득하다. 지쳐버린 정맥혈과 같아 스스로 흐르기에는 힘이 겹다. 마음의 혈관에는 거꾸로 흐르지 못하게 해주는 판막이 없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것은 종종 뒷걸음을 치다 심장 한 구석에 쌓인다. 차곡차곡 접힌 채로 딱딱하게 굳어진다. 일상의 박동이 시작되면 다른 감정의 물결에 가려져 아래로 가라앉는다.

책을 통과하는 내내 열병처럼 이십여 년 전의 나를 앓았다. 이해받지 못한 서러움이, 빛도 소리도 없는 우주공간을 오롯이 혼자 유영하는 듯했던 외로움이,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 원인을 따라가지 못한 채 덩그마니 남아있던 먹먹함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여겨왔던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있던 지층이 되어오니 태풍에 휩쓸린 듯 바닥이 드러났다.

훌훌 떨쳐내고 싶던 감정의 귀퉁이를 여전히 붙들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줄줄 올이 풀린 실오라기를 차마 놓지 못해 습관처럼 손가락에 감고 있었던 걸까.

 

누구나 마음으로 이루어진 행성을 가슴속에 품는다. 마음의 행성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있다. 사랑, 기쁨, 분노, 즐거움, 행복, 슬픔, 아픔, 그리움, 외로움 등이 모여 행성을 만든다. 감정들은 수시로 우리의 안팎을 들락거린다. 찰나로 스치는가 하면 눅진하게 눌러 붙다 영혼의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몰랑몰랑한 행성의 크기는 시시각각 변한다. 크기에 따라 다른 중력을 나타내는 행성처럼 마음마다 중력의 크기가 다르다. 다가오는 자극에 반응하며 상황과 사람을 다른 인력으로 끌어당긴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손수건이 다른 이에겐 물에 흠뻑 젖은 거대한 솜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이런 상상을 하면 다른 이의 상처가 조심스럽다.

다른 중력을 지녔으므로 동일한 무게감을 지닌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답했던 소설 속 인물의 행동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된다. 나의 무게감과 당신이나 가상의 인물이 느끼는 그것은 분명히 다를 터이다. 그러니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 매번 스스로 다짐한다.

 

밤하늘에는 오래된 과거가 있다. 허블 망원경이 찍은 사진울트라 디프 필드에는 백삼십억 년 전의 우주가 담겨있다던가. 빛의 속도가 유한하기에 지금 내가 올려다보는 별빛은 과거의 별에서 출발했으리라.

밤하늘은 왜 어두운가. 독일의 천문학자 올베르스는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성간 가스와 먼지가 별빛을 가로막아서, 빛의 속도가 유한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빛의 속도보다 우주가 빠르게 팽창해서 등 다양한 인물들이 타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과학적 진위를 떠나 나에게 밤하늘은 위안을 주는 마음의 안식처이다.

낮의 하늘보다 밤의 하늘은 강한 인력으로 나를 당긴다. 과학적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십대에도 밤하늘이 그저 좋았다. 잿빛 감정을 담은 채 터벅터벅 걷다가도 문득 올려다보면 나를 둘러싼 공기 위로 까마득한 우주까지 뻗어있는 이불이 부드럽게 마음을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어둠이 품고 있는 별이, 반짝이는 눈물 같은 별이 주는 위안에 서늘한 공간을 걸으면서도 따뜻했다.

 

밤은 어둡다. 어두우니 밤이다. 밝은 밤이라 했을까. 고운 비단으로 지은 옷감인 듯 환한 책표지를 가만가만 어루만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며칠간 밤의 하늘을 자주 쳐다보았다. 먼 하늘에서는 드문드문 별빛이 반짝였다.

별빛은 그 빛이 출발한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온다. 결국 밤하늘을 빛나게 해주는 건 과거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 속성을 지니는 건 아닐까. 고통스럽던 과거는 아직까지 내게로 도달하지 못한 별빛이다. 빛으로 다가와 눈으로 스며들어 나와 이어진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고통만을 안겨주지는 않으리라. 외로운 이들에게 위안의 빛으로 점점이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말이다.

작가의 상처가 환하게 빛나는 밤이 된 것도 그녀의 고통이 빛으로 닿았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별빛은 별을 향한 이에게만 보인다.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고개를 들고 눈을 뜨는 건 의지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과거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는 이에게 밤하늘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완전히 밝아진 건 아니다. 과거로 타임 슬립하면 매콤함이 남는다. 들숨과 날숨이 폐로 들락거릴 때 공기는 말끔하게 비워지지 않는다. 나의 삼십 대는 어정쩡하게 폐에 머물던 공기였나. 그래도 새벽에 가까워진 듯 서러움이 덜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실눈으로나마 상처를 마주하려는 마음이 생긴 걸까.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패턴으로 이어지는 줄기로 존재하는가 보다. 밝은 밤의 상처에 기대어 나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상처를 향해 손끝을 내밀어 가만히 더듬어본다. 최은영의 밤이 상처를 향해 한 뼘의 손을 내밀 용기를 건네주었나.

외면한 마음은 거기 그대로 머문다. 매순간 자라는 몸처럼 시간에 끌려가지 않는다. 스스로 보듬어 꺼내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는다. 치료를 하려면 상처를 들여다봐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 쓰라린 상처를 건드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금파리를 꺼내어 당신에게도 기꺼이 보여줄 순간이 언젠가는 올 것만 같다. 손끝이 뜨거워진다.


p12, 5째줄: 눈이 기화 → ~ 승화 or 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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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07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만큼 따뜻한 리뷰네요. 축하드려요 *^^*

나비종 2022-10-08 06: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축하의 말씀에 제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날이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romio 2022-10-1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늦었지만, 저도 리뷰를 읽고 잔잔한 여운을 느낌니다,, 저는 오십대 남자지만,,

나비종 2022-10-16 21:21   좋아요 0 | URL
따뜻한 책입니다. 혹시 읽지 않으신 책이면 읽어보세요. 남성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네요.^^
 
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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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바다에서 물방울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찰랑찰랑한 풍경 소리와 비슷할까. 다정한 숨소리인 듯 작은 알갱이들의 소리가 퍼져나갈까. 원자 단위의 입자들은 늘 진동하고 소리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의 에너지이니 황당무계한 상상은 아닐 터이다. 가시광선 바깥에 존재하는 적외선이나 자외선처럼, 가청주파수 너머로부터 울리는 크고 작은 소리들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검은 구멍에서 소리가 울려 퍼진다니! 지난 8, NASA는 블랙홀의 소리를 공개했다. 24천만 광년의 은하단에 있는 블랙홀은 57~58옥타브로 증폭시킨 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천상오싹의 상반된 평가를 받는 34초의 소리로부터 예술가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크고 작은 소리를 내는 삶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여 표현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음악가든 화가든 문학 작가든 공통적인 속성을 품는다. 섬세한 촉수로 들릴락 말락 존재감조차 어필하지 못하는 삶의 숨결을 증폭시킨다는 점이다. 선율이냐 색채냐 문장이냐 필터의 종류만 다를 뿐이다. 맥박인 듯 활어처럼 팔딱거리는 삶의 의미를 전하면서 스스로도 전율을 느끼는 순간을 상상한다. 이어폰으로 전해 듣는 블랙홀의 소리처럼 생경하면서도 묘하다.

 

음악을 먼저 들을까, 책을 먼저 읽을까. AKMU의 정규앨범 항해를 검색하니 10곡의 목록이 보인다. 앨범의 모티브라는 책의 소개 글. 잠시 고민하다 책을 먼저 펼친다. 예술과 연결된 문학은 어떤 느낌일까.

소설 물 만난 물고기는 음악을 통해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찾아가는 성장 일기이다. 주인공 은 여행을 하며 여러 인물들로부터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찾으려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망한다. 몽환적인 해야와의 만남은 그의 삶의 분기점이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공간 묘사,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캐릭터와의 대화는 4차원적인 분위기를 뿜어낸다. 그녀와의 사랑과 이별은 그에게 많은 깨달음을 남긴다.

픽션의 바탕에는 작가의 내면세계가 BGM처럼 펼쳐진다. 이야기의 흐름은 단지 거들뿐, 본질은 등장 인물간의 대화에 있다. 곳곳에 음악가로서의 열망과 고민이 묻어난다. 작가는 두 주인공이 함께 하는 풍경에 자신의 사유를 얹어 자유와 예술로서의 음악과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표현한 것이 곧 자신이 되는 사람,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 그리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 책 표지의 바다처럼 푸른 시선을 지닌 작가가 정의하는 예술가에게서 바다 냄새가 난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의 세상은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는 걸까.

 

삶의 모습에 대한 당위를 뱉어내곤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끔 버거웠다. 내 자신이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잘 아는 나는 종종 가라앉았다. 실제의 나와, 나를 돌아보는 나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혹은 물에 잠겨 짧아 보이는 두 다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뱉은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을 하면 된다는 문장에 뜬금없는 위로를 받는다. 예술과 삶의 싱크로율을 말하는 문장이지만 어쩐지 마음의 짐이 가벼워진다.

음악이 서랍인 듯 추억을 넣고 다닌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강한 인력으로 나를 당기던 음악은 종종 누군가를 담은 이야기와 함께 흘렀다. 함께 듣던 음악은 곁에 없는 그를 순식간에 불러왔다. 함께 먹던 음식은 더 이상 그 때의 맛이 나지 않았다. ‘라는 재료가 빠졌기 때문이다. 스치는 향기에 눈물이 나는가 하면 익숙했던 풍경이 의 부재로 낯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대상과 결합된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은 종종 환경으로부터 불현 듯 다가오는 호르몬을 경험한다. 특별했던 이를 공유한 음악은 공간 전체를 울리며 물처럼 심장을 향하여 스며든다. 흠뻑 젖은 마음이 마를 때까지 꿈인 듯 타임 슬립 하는 순간을 만든다. 감각할 수 있는 영역보다 드넓은 공간에 존재하기에 감각이 증폭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걸까.

 

앨범 수록곡의 노랫말을 하나하나 찾아본다. 모두가 책 속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문학적으로 서툰 몸짓이 음악과 겹쳐지니 책을 바라보는 시선이 몰랑해진다. 작가가 고민했던 예술가를 한 명 알게 된 것 같아서. 앨범에 실린 곡들의 탄생 배경을 음악가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기분이다. 큐레이터와 천천히 대화하며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온 느낌이랄까. 더불어 작가의 음악관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온 문장들을 통과하니 그의 음악을 보다 친근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전주만으로 공기가 물결치던 곡. 가수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벌써 좋아서 귀 기울이던 작품. 공간의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쨍쨍한 태양의 화살처럼 소리 없이 가슴에 꽂히던 순간. 선율을 쓰담쓰담하는 담담한 가사에 다시 반해버린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5분여 동안 나를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리고 이런 감각의 경험은 매번 현재진행형이다.

책을 덮고 곡을 다시 듣는다. 눈밭에 난 발자국을 따라 걷듯 흘러나오는 가사를 하얀 종이에 적는다. 시처럼 보였던 가사에 이야기가 얹어지니 이전보다 묵직해진다. 음표가 귓가에서 울릴 때마다 무심코 흘려보냈던 글자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품은 꽃잎으로 되살아난다.

책을 다시 펼쳐 휘리릭 넘기니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보이는 바다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잔잔한 물결 소리인 듯 착각이 인다. 노래하듯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바다 속 물방울처럼 살아간다면 삶이 얼마나 찰랑거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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