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 -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그림 하나, 시 하나
신현림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가지 예술분야를 아우른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한 가지로도 일품요리로서 충분하지만, 어울리는 두 장르는 밥과 반찬인 듯 조화롭다. 예술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생각한다. 그림과 시는 분명 다른 장르이지만 표현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지도 모른다. 색과 색의 경계선을 구분 지을 수 없도록 채색한 스푸마토 기법의 <모나리자>처럼 내면세계를 그린다는 시각에서 보면 경계가 허물어진다.

작은 박물관 하나를 통째로 선물 받은 느낌이라는 이해인 수녀, 한 편 한 편의 글들이 주파수를 제대로 맞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한 점 잡음 없이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는 황인숙 시인, 미술은 말이 그친 자리에서 피어난다는 박영택 미술평론가의 추천 글을 보니 마음속에 설렘이 피어난다. 작가의 세계관을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한다. 자신이든 남을 위해서든 영혼의 쓸모 때문에 시를 쓰는 거라는 생각에 공감하며 이제부터 읽을 책의 분위기를 상상한다.

우리들은 무언가와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 이어짐이 사람과 사람일 때 더없이 따스하다는 서문의 문장이 모닥불처럼 온기를 준다. 명화와 시 속에서 깊고 뜨겁게 숨쉬기를 바란다는 그녀의 의도대로 책 장의 징검다리를 그런 호흡으로 건널 수 있을까.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는 그림과 시의 콜라보이다. 작가의 젊은 시절을 데워주었던 그림과 시를 연결한 에세이다. 책의 제목처럼 주 무대는 다섯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진 미술관이다. , 절망, 사랑, 고독, 위로 등 다섯 가지 주제에는 정서의 색채별로 나열된 그림과 시가 매칭 된다.

수록된 시의 종류는 다양하다. 화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감성과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 시가 연결되기도 하고, 동 제목의 시가 놓이기도 한다. 그림과 시를 양팔저울에 놓고 질량을 잰다면 그림 쪽으로 중심이 기운다. 시는 그림이 등장하는 순간에 흐르는 BGM 효과를 낸 달까. 작가가 고흐와 브뢰헬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이 두 화가의 작품은 두 점씩 수록되어 있다. 그림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사소한 요소에도 드러난다. 화가에 대해서는 출생과 사망이 표기되어있지만, 시인에 대해서는 푸시킨과 도연명을 제외하고는 이름만 실려 있다.

한적한 시골에 자그마한 미술관을 짓고 수집한 그림을 전시한 큐레이터가 우연히 들른 나그네에게 소장품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장면을 상상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책이다. 한 작품 한 작품을 지날 때마다 작가가 계속 말을 거는 듯하다. 나는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나는 이 작품에서 슬픔을 보았는데 당신에게도 그게 보이나요? 하고.

 

노랑, 분홍, 카키, 스카이블루, 보라색. 각 장을 시작하는 페이지의 색깔이다. 간지처럼 끼워진 색깔의 장을 다섯 손가락에 끼워 한꺼번에 바라본다. 조화를 이루는 파스텔 톤의 무지개가 떠올라 마음이 안정된다.

그림 한 쪽, 시 한 쪽에 더해진 짤막한 해설은 대부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그림과 시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 판단한다. 작가는 그림과 시를 연결 짓는 것으로 8할의 역할을 한다. 예술이 뿜어내는 향기를 호흡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때문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호흡을 멈추게 된다. 여운을 음미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게 만들어준다. 한 점의 작품에 네 쪽씩 할당된 느낌이랄까. 그림--작가-독자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김정희의 <세한도>에 숙연해지는 신경림 시인의 <다시 느티나무가>가 연결되며 누구나 인생의 세한도가 하나쯤은 있을 거라는 작가의 멘트가 이어진다. 그저 버틸 수밖에 없는 날들, 춥고 곤궁한 날들을 언급하는 말에 대학교 2학년 즈음의 장면이 불쑥 떠오른다. 식당 서빙을 하다 쓰러져 주방의 뒷방에 누워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날이다. 그때가 50대 어머니의 세한도가 아니었을까. 나의 세한도는? 그저 버틸 수밖에 없었던 30대 정도였던 듯하다.

 

칸딘스키의 <푸른 하늘>과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앞에서 오래 서성인다. ‘마음은 미래에 살고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라는 문장이 따스하다. 그림에 담겨 꿈틀거리는 대상에게서 자유로운 생명체가 연상된다. 마음이 산뜻해진다. 언젠가는 날아오를 수 있다며 토닥토닥 부드러운 깃털 같은 위로를 준다. 드넓은 하늘의 색채와 어우러지면서 풍선처럼 둥둥 미래의 행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편안해진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 없는 / 그런 길은 없다 // 나의 어두운 시절이 / 닮은 여행을 하는 / 모든 사랑하는 이들에게 / 도움 될 수 있기를’. 나의 글이 시의 문장과 같기를 바라며 베드로시안의 <그런 길은 없다>에 나오는 문장에서 위안을 받는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볼 때마다 설렌다.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쾅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중략)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중략)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언제 이토록 두근거리는 시를 쓸 수 있을까. 넘사벽의 시 앞에서 잠시 부러워한다.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보는 순간 마음이 정갈해진다. 산다는 건 번잡한 물건들, 온갖 감정의 피로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단순함에 그 본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해설에 공감한다. 요즘 물건을 하나둘씩 정리 중이다. 미련이 묻은 아름다운 쓰레기를 간택할수록 속이 시원해진다. 몸과 마음이 별개가 아니듯 감정도 마찬가지인가. 단순함에 깃든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낀다. 과학자들도 이런 심정으로 자연현상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겠지.

골비츠의 그림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는 보는 순간 전율이 인다. 흑백의 선들이 꿈틀거리면서 어머니의 절망을 뿜어낸다. 선의 음영만으로 이리도 절절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니! 파울클레의 그림 <황금물고기>는 빛나는 햇살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고흐의 붓 터치가 좋다. <자고새가 있는 밀밭><별이 빛나는 밤>.

클림트의 <키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감상의 목적으로만 곁에 두는 아이템이다. 모든 날들이 좋았던 도깨비님처럼 그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그저 좋다. 지인들에게 어필한 결과, 꽂지도 않는 머리핀, 쿠션, A4용지만한 종이액자그림, 2단 우산, 3단 우산, 머그컵을 선물 받아 소장중이다. 아이돌 굿즈를 모으는 심정이 이와 비슷할라나.

 

깊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처럼 읽히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림인 듯 생생한 풍경을 펼쳐 보여주는 시도 있었다. 화가와 연결되며, 시인과 연결되며, 작가와 연결되며, 때로는 과거의 나와 연결되며 따스한 시간을 호흡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흔들림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모든 예술은 자체로 경이로움이다. ‘어떤 시는 / 우주만큼 / 크다 // 어떤 / 그림은 / 연인만큼 / 다정하다는 뒤표지의 문구처럼 예술작품 너머의 마음들과 연결되다보니 한동안 잊고 있던 나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림들을 보니 사진과의 차이점이 보인다. 사진도 빛과 구도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는 장르이지만 그림은 내면세계를 보다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인 듯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을 연결하고 때로는 영혼의 안팎을 한꺼번에 겹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새로운 풍경을 보면 상쾌한 공기가 스며들어와 숨을 한껏 들이마시게 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건 고인 물처럼 꼼짝없이 마음이 정체될 때 그렇다. 차라리 한껏 흔들리고 나면 의외로 쉽게 정리될 때가 있다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예술작품을 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새로운 그림이나 글이나 음악은 가슴을 향해 이색적인 숨결을 불어넣어주니까. 예술작품은 그렇게 한껏 우리를 흔들어놓으며 영혼을 데워주는 게 아닐까.

 

 

p58 그림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의 색채: 보라색파란색

p15, p182의 작가 이름: 쿠스타프 클림트구스타프~

p269 1: 산모통이산모퉁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