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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평점 :
잔잔한 바다에서 물방울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찰랑찰랑한 풍경 소리와 비슷할까. 다정한 숨소리인 듯 작은 알갱이들의 소리가 퍼져나갈까. 원자 단위의 입자들은 늘 진동하고 소리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의 에너지이니 황당무계한 상상은 아닐 터이다. 가시광선 바깥에 존재하는 적외선이나 자외선처럼, 가청주파수 너머로부터 울리는 크고 작은 소리들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검은 구멍에서 소리가 울려 퍼진다니! 지난 8월, NASA는 블랙홀의 소리를 공개했다. 2억 4천만 광년의 은하단에 있는 블랙홀은 57~58옥타브로 증폭시킨 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천상’과 ‘오싹’의 상반된 평가를 받는 34초의 소리로부터 예술가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크고 작은 소리를 내는 삶에 담긴 의미를 발견하여 표현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음악가든 화가든 문학 작가든 공통적인 속성을 품는다. 섬세한 촉수로 들릴락 말락 존재감조차 어필하지 못하는 삶의 숨결을 증폭시킨다는 점이다. 선율이냐 색채냐 문장이냐 필터의 종류만 다를 뿐이다. 맥박인 듯 활어처럼 팔딱거리는 삶의 의미를 전하면서 스스로도 전율을 느끼는 순간을 상상한다. 이어폰으로 전해 듣는 블랙홀의 소리처럼 생경하면서도 묘하다.
음악을 먼저 들을까, 책을 먼저 읽을까. AKMU의 정규앨범 「항해」를 검색하니 10곡의 목록이 보인다. 앨범의 모티브라는 책의 소개 글. 잠시 고민하다 책을 먼저 펼친다. 예술과 연결된 문학은 어떤 느낌일까.
소설 『물 만난 물고기』는 음악을 통해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찾아가는 성장 일기이다. 주인공 ‘선’은 여행을 하며 여러 인물들로부터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찾으려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망한다. 몽환적인 ‘해야’와의 만남은 그의 삶의 분기점이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공간 묘사,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캐릭터와의 대화는 4차원적인 분위기를 뿜어낸다. 그녀와의 사랑과 이별은 그에게 많은 깨달음을 남긴다.
픽션의 바탕에는 작가의 내면세계가 BGM처럼 펼쳐진다. 이야기의 흐름은 단지 거들뿐, 본질은 등장 인물간의 대화에 있다. 곳곳에 음악가로서의 열망과 고민이 묻어난다. 작가는 두 주인공이 함께 하는 풍경에 자신의 사유를 얹어 자유와 예술로서의 음악과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표현한 것이 곧 자신이 되는 사람,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 그리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 책 표지의 바다처럼 푸른 시선을 지닌 작가가 정의하는 예술가에게서 바다 냄새가 난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의 세상은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는 걸까.
삶의 모습에 대한 당위를 뱉어내곤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끔 버거웠다. 내 자신이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잘 아는 나는 종종 가라앉았다. 실제의 나와, 나를 돌아보는 나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혹은 물에 잠겨 짧아 보이는 두 다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뱉은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을 하면 된다는 문장에 뜬금없는 위로를 받는다. 예술과 삶의 싱크로율을 말하는 문장이지만 어쩐지 마음의 짐이 가벼워진다.
음악이 서랍인 듯 추억을 넣고 다닌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강한 인력으로 나를 당기던 음악은 종종 누군가를 담은 이야기와 함께 흘렀다. 함께 듣던 음악은 곁에 없는 그를 순식간에 불러왔다. 함께 먹던 음식은 더 이상 그 때의 맛이 나지 않았다. ‘그’라는 재료가 빠졌기 때문이다. 스치는 향기에 눈물이 나는가 하면 익숙했던 풍경이 ‘그’의 부재로 낯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대상과 결합된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은 종종 환경으로부터 불현 듯 다가오는 호르몬을 경험한다. 특별했던 이를 공유한 음악은 공간 전체를 울리며 물처럼 심장을 향하여 스며든다. 흠뻑 젖은 마음이 마를 때까지 꿈인 듯 타임 슬립 하는 순간을 만든다. 감각할 수 있는 영역보다 드넓은 공간에 존재하기에 감각이 증폭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걸까.
앨범 수록곡의 노랫말을 하나하나 찾아본다. 모두가 책 속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문학적으로 서툰 몸짓이 음악과 겹쳐지니 책을 바라보는 시선이 몰랑해진다. 작가가 고민했던 예술가를 한 명 알게 된 것 같아서. 앨범에 실린 곡들의 탄생 배경을 음악가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기분이다. 큐레이터와 천천히 대화하며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온 느낌이랄까. 더불어 작가의 음악관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온 문장들을 통과하니 그의 음악을 보다 친근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전주만으로 공기가 물결치던 곡. 가수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벌써 좋아서 귀 기울이던 작품. 공간의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쨍쨍한 태양의 화살처럼 소리 없이 가슴에 꽂히던 순간. 선율을 쓰담쓰담하는 담담한 가사에 다시 반해버린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는 5분여 동안 나를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리고 이런 감각의 경험은 매번 현재진행형이다.
책을 덮고 곡을 다시 듣는다. 눈밭에 난 발자국을 따라 걷듯 흘러나오는 가사를 하얀 종이에 적는다. 시처럼 보였던 가사에 이야기가 얹어지니 이전보다 묵직해진다. 음표가 귓가에서 울릴 때마다 무심코 흘려보냈던 글자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품은 꽃잎으로 되살아난다.
책을 다시 펼쳐 휘리릭 넘기니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보이는 바다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잔잔한 물결 소리인 듯 착각이 인다. 노래하듯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바다 속 물방울처럼 살아간다면 삶이 얼마나 찰랑거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