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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평점 :
젊음을 탐하는 늙음의 이야기. 소설 『파우스터』의 모티브는 괴테의『파우스트』이다. 회사 ‘메피스토’를 매개로 젊음을 구매하는 노인들이 삶을 조종당하는 젊은이들과 삼각구도로 연결된다. 회사에서 젊은이들의 뇌에 몰래 심은 칩이 안테나 역할을 하며 그들의 경험을 노인들의 장치에 전송한다. 노인들이 안마 의자에 헬멧과 같은 장치를 장착하면 젊은이들의 시각, 청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노인들은 자본과 권력을 이용해 의도적인 상황을 만들고 젊은이와 가까운 인물들을 포섭하여 모바일 애완견을 키우듯 젊은이의 삶이 흘러가도록 조종한다.
젊음을 착취하는 노인들을 ‘파우스트’, 젊음을 빼앗기는 청년들을 ‘파우스터’라 칭한다. 소설은 파우스터가 파우스트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을 연다. 주인공이 야구선수라 용어가 생소하여 하나하나 검색해야 했지만 문장의 흡인력은 낯선 허들을 부드럽게 지나도록 만든다. 쫓고 쫓기는 두뇌싸움과 그들의 밀당이 블록버스터급 영화처럼 마지막까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묵직한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책이다. 탄탄한 구성과 두께의 중압감을 넘어서 진공청소기 같은 전개가 펼쳐진다. 무방비한 상태로 이런 책을 만나면 한동안 멍하다. 탁월한 문장력과 속도감이 느껴지는 내용에 압도당한다. 참 좋았다며 단순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 의욕적으로 노트북 앞에 앉는다.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편은 아니건만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나의 문장에 주눅이 든다. 며칠 만에 후다닥 읽어놓고선 멈칫거리기를 반복하니 리뷰는 보름이 넘도록 진척이 없다.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읽었을 때도 비슷했다. 그나마 짧은 분량에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그린 이야기라 낄낄대면서도 뭉클한 느낌을 가까스로 적었건만. 생과 사로 이어진 길목에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늙음’이라는 심오한 주제라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걸까. 고민 끝에 ‘늙음’이 끄집어낸 신변잡기스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하기로 한다. 끝내 소설의 깊이를 포용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를 인정한다.
요즘 자꾸 예뻐지는 인간이 있다. 이미 충분하여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는 필요 없건만 30년은 더 젊어 보인다는 경이로운 말까지 듣는 지경에 이른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 나비종의 글을 몇 번 접해보면 이 인간이 종종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사실을 절로 알게 될 테니. ‘젊다’와 ‘예쁘다’는 동의어가 아니라고? 훗~ 젊음은 자체로 아름다움임을 몇 십 년 후의 당신은 절감하리라. 사회성 멘트 10년을 DC 한다 해도 찬란한 청춘으로 돌아간 듯 마음이 통통 튄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퇴행성관절염에 고지혈증에 만성위염의 삼재를 짊어진 노인 모드였기에 최근의 변화는 자체로 경이롭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일상을 되감기한다.
첫째, 듣는 음악이 변했다. 이용권의 기한이 만료되는 바람에 연장과 신상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잠시 예전에 저장했던 음악을 듣고 있다. 30대 때 듣던 노래들이다. 재생될 때마다 각각의 음표는 지나간 장면들을 매달고 넘실거린다. 서툰 모습 그대로도 의미 있고 눈부시던 시절로 종종 타임 슬립 했다.
둘째, 입던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 옷을 입던 모습이 떠올랐다.
셋째, 아이들이 타지에 나가는 바람에 타발적 신혼부부모드가 되었다. 새삼스러운 어색함에서 조금씩 나아간 한 발의 효과가 서서히 쌓임의 미학을 펼치는 중이다. ‘사이좋은 부부 코스프레’가 반복되니 ‘코스프레’가 빠져버렸다.
넷째, 몇 가지 일들이 BGM으로 깔리니 새삼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희끗한 소금이 올라와 축 늘어진 미역 줄기 같았던 모발 모발. 퇴근길에 불쑥 미용실에 들렀다. 어둑해질 때까지 텅 빈 위를 감당한 보람이 있었다. 볼륨 매직 셋팅으로 다시 부활했다.
다섯째, 이 여세를 몰아 지난 주말에는 몇 년 만에 26년 지기의 집에 놀러갔다.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 속상했던 에피소드, 예전에 함께 했던 추억들이 이틀 동안 우리를 둘러쌌다. 말줄임표와 침묵이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간들. 에너지를 완충하고 회춘이 되어 컴백했다.
몸이 변하면 마음이 변하는 걸까, 마음이 변하면 몸이 변하는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처럼 애매하다. 둘 다 명제를 증명할만한 사례가 어느 정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체중으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며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 다이어트 성공으로 삶이 180도로 바뀌었다는 경험담은 몸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진 예이다. 실체인 몸은 즉각적으로 변화를 만들거나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마음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몸의 변화는 발현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인다.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이 예뻐진다든가 마음이 즐거우면 표정이 온화해지는 것처럼 주로 얼굴을 통해 약간의 변화만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은 이러한 편견을 가볍게 깨뜨린다. 1979년, 미국 하버드대의 심리학과 엘렌 랭어 교수는 70~80대 노인 8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한다. 20년 전의 환경을 재현한 고립된 공간을 노인들에게 제공한 다음,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집안일을 직접하고 생활하도록 주문한다. 1주일 만에 나타난 결과는 놀랍다. 마음만 청춘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그들 모두는 시력, 청력, 기억력, 지능, 악력 등 신체 나이가 50대 수준으로 변화한다. EBS의 <황혼의 반란> 에서도 왕년의 스타 5명을 대상으로 1주일 간 비슷한 컨셉으로 시간 여행을 한 결과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 BBC의 <더 영 원스>라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보여줬다고 한다.
시간을 되감기한 실험 결과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들을 검색해보았다. 수긍이 가는 해석이 눈에 띈다.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거다. 시간을 거슬러가는 과정에는 매번 함께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 그들과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최근 나의 젊음이 발현되기 전에도 오랜 친구와의 푸릇한 대화의 시간이 있었음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젊음과 늙음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니 독자에 따라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이다. 젊은이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의지에 의한 주체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지리라. 노인의 입장이라면 자유의지를 젊은이에게 투영하여 젊음을 맛보려는 삶이 마음에 남을 터이다. 그렇다면 나는? 50대는 애매하다. 젊음과 늙음 사이를 서성이는 어정쩡한 경계랄까.
나는 후자의 입장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파우스트로서의 삶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표면적으로는 파우스트가 파우스터를 노예인 듯 조종하지만 이는 실체 없는 거품처럼 허무하고 안쓰럽다. 대리만족하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나의 것이 아닌 젊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나. 스스로의 근육 없이 번듯한 목발에 의지하는 걸음으로 언제까지 갈 수 있는가.
책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몽환적인 표지 그림이다. 복잡한 나뭇가지 아래 인간들의 옆모습이 보인다. 그림자 작가라는 나현정 작가의 명칭이 생소하여 다른 작품을 찾아본다. 흑백의 뒤엉킨 선들이 시선을 붙든다. 컬러감보다 무채색이 어울리는 작품 세계를 지닌 작가이다. 갈수록 무채색에 끌린다. RGB 0,0,0과 255,255,255 사이의 그러데이션이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재현하는 것 같아서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 역시 무채색 못지않게 섬세하니 책의 내용에 적절한 그림이다.
몸과 마음은 본디 하나라서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며 나만의 결론을 내린다. 무엇이 먼저인지 구분 없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몸이 젊어지면 마음이 젊어지고 마음이 젊어지면 몸이 젊어지는 변화가 이어지니까. 그 둘은 쌍방향의 화살표 사이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삶의 흐름을 만드는 지도 모른다. 충전과 방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삶의 배터리가 줄어드는 것이리라.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는 건 과거에 얽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찬란했던 에너지의 불씨를 되살린다는 의미이다. 몸과 마음은 온전한 나의 것이어야만 삶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우리는 모두 아직 늦지 않았다. 마음이 늙을 때 육체는 마음에 동조하여 사그라지는 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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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9, 밑에서 8째줄: 움켜진 → 움켜쥔
p322, 밑에서 9째줄: 모르겠군요. →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