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만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빵 냄새는 부드럽게 마음을 어루만진다. 내게 빵은 후각보다 온각을 자극하는 따스함이다. 간혹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오랜 기억 속 한 사람이 빵 위로 겹쳐지기에.
살아가다보면 지나고 나서야 무언가를 깨달을 때가 있다. 그렇게 알게 되는 마음은 흘러온 시간의 두께만큼이나 묵직하다. 이제야 알겠다.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그때 알았어야 했다. 아니 최소한 10년 후에라도 당신을 바라보는 마음에 얼마나 큰 고마움을 담아야 하는지 알았어야 했던 것을. 30여년의 시간을 건너와서야 겨우 깨달은 어리석은 제자는 빵을 바라볼 때마다 종종 당신을 생각한다.
빵만 보면 가끔 울컥한 제자의 이야기는 1983년에 시작된다.
영세민. 지금의 기초생활수급자 정도를 가리키던 용어였다. 교실 뒤에 말없이 걸려있는 게시판 같던 15세의 아이. 타고난 품성 탓이기도 했지만, 아이를 늘 주눅 들게 했던 건 날마다 이불처럼 덮고 자던 가난이었다.
가지 말라는 길은 절대로 안 가고, 누가 보지 않아도 맡은 구역을 청소했으며 수업태도가 매우 바른, 소위 모범생이었다. 80년대에는 정부반장을 선출하는 데 성적의 제한이 있었고 나는 학급의 부반장이 되었다.
우리 집 환경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담임 선생님께서는 학기 초, 반장을 부르셨다. 다음 날부터 반장에게는 매일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부반장에게 날마다 빵과 우유를 사주는 일. 다니던 학교에는 매점이 있었는데 근 1년 동안 2교시가 끝나면 내 손에는 빵과 우유가 들려졌다.
처음에는 고마웠다. 친구 따라 매점을 들락거릴 경제적 여유가 없던 나는 도시락이 아닌 다른 것을 학교에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2교시 째에는 이번 시간만 지나면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자주 설레곤 했다.
하지만 고마움도 반복되면 슬금슬금 내성이 생기는 걸까. 선생님은 쪽지 시험 채점이나 자료 정리 같은 일을 자주 시키셨는데, 어느 순간 내가 하는 자잘한 일들이 빵에 상응하는 수고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매일 감동적으로 울리던 고마움은 한두 달이 지나면서 점차 쪼그라들었다. 나중에는 고마워하는 마음조차 희미해졌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3학년에 올라가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치는 시간이 흘렀고 선생님의 존재는 희미해져가던 마음처럼 서서히 잊혀졌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9년 뒤였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나는 중학교 과학교사가 되었고, 담임을 맡았다. 학급 아이들은 대부분 평범했지만,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자연스레 그들과 나이가 같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학교에 다닐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직장을 잡고 돈을 벌게 되었어도 경제적으로 여유를 느낄 만큼 넉넉지는 않았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준 일이라곤 고작 한 달에 한 번씩 그 달에 생일인 아이들에게 직접 고른 천 원짜리 작은 인형을 선물해준 것이었다. 인형을 건네주는 내 마음을 환한 미소로 받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불현듯 선생님이 떠올랐다. 선생님도 이런 마음으로 내게 빵을 주셨던 걸까.
다시 10여년이 지났다. 엄마가 된 나는 직장일과 육아를 병행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초임 때보다는 다소 여유가 생긴 편이었다. 한창 일할 시기라 담임을 맡는 것은 당연했고,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은 여전히 있기 마련이었다. 가끔 문제집을 챙겨주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더 해주지는 못했다. 아니, 더 해주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리라. 다시 선생님이 떠올랐다. 한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했다. 그건 돈이 많고 적음의 차원이 아니었다.
다시 10여 년이 지나 교단에 선 지 어느덧 25년이 넘어간다. 간혹 교무실로 자주 오는 아이들이 있다.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상을 받은 듯이 뿌듯해하는 아이들이다. 심부름을 하고 “참 잘했구나!” 칭찬받을 때 의기양양해 하며 웃는 아이를 보며 다시 선생님을 떠올렸다. 소심했던 나는 자신감이 없었는데, 선생님께서 시키신 일을 해내고 당신의 칭찬을 들으며 점점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다. 일부러 일을 시키신 거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문제집도 변변하게 없던 나의 영어 실력이 늘은 것도 매일 영어로 일기쓰기를 시키셨던 선생님 덕분이었던 것을.
갑자기 선생님이 보고 싶었다. 스승 찾기 코너에 검색도 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후에 중학교 동창들로부터 서울 쪽으로 옮겨가셨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그만 두셨다는 불확실한 소문을 흘러듣기도 했다.
선생님이 계시던 그 자리에서 서서, 당신을 마주보던 어린 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늦어버린 깨달음에 베풀어주신 사랑을 되돌려드리지는 못했지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마음은 또 다른 나에게 이 마음을 건네야함을 알려준다.
커다란 베풂이 무엇인지,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신, 한 아이의 빵에 온기를 심어주신 J 선생님! 잊지 못할 나의 선생님이시다. 손에 들린 빵 봉지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함이 유난히 향긋하다. 코끝이 찡해지는 퇴근길이다.
* 2017. 4. D수기공모전(잊지 못할 나의 선생님),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