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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밝은 곳 ㅣ 쏜살 문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평점 :
바닥이 가늠되지 않는 싱크 홀에 빠져드는 꿈을 꾸다 깨어난 느낌. 질척이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는 것 같은 여운에 속이 울렁거린다. 글에서 맡아지는 익숙하지 않은 냄새, 이런 기분 별로다.
학창시절, 유일하게 읽었던 『노인과 바다』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푸르고 화창한 바다가 아니라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잿빛 바다의 모습이 어쩐지 인간 삶의 모습과 중첩된다고 생각했었다. 사투를 벌이며 겨우 잡은 청새치가 해안에 이르러서는 뼈다귀만 남는다는 귀결은 허무의 극치를 달렸지. 그 거대한 물고기와 직접 대면했던 오직 한 사람, 자신만이 기억하는 성취라니!
<깨끗하고 밝은 곳>,<살인자들>,<병사의 집>,<킬리만자로의 눈>,<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 이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단어는 죽음과 허무, 두 가지이다.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표제작의 제목은 차라리 모순에 가깝다. 책 표지에 훤한 달덩이도 떠있고 제목도 밝아서 가볍게 읽으려고 집어든 책이었건만. 나는 거대한 빙산에 갑자기 부딪혀버린 타이타닉호가 되었다.
1차 시도. 뭐 이런 책이 있나 싶었다. 당최 뭔 말을 하려는 지도 모르겠고, 이국적인 정서라고 치부하기에는 마음에 남은 것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실질적인 내용이 수록된 분량만을 따지면 다섯 편을 모조리 합쳐도 130여 쪽이나 될까. 이 작은 책에 매달린 메시지가 어찌나 무겁고 오리무중이던지. 작은 몸집으로 어마 무시한 초강력 자기력을 자랑하는 네오디뮴 자석이 따로 없다.
2차 시도. 두 번째는 오기로 읽었다. 베스트셀러라고 다 나에게 좋은 것은 아니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의 작품이 매번 엄청나게 좋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헤밍웨이’앞에서 이리도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
3차 시도. 세 번을 읽고 나서야 희미하게나마 작가의 감성을 따라잡는다. 이조차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은 없지만. 이리도 강한 이질감이 느껴졌던 것은 작가의 서술 관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흔히 밝은 곳을 말할 때에는 밝은 곳에 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마련이다. 내가 본 작가는 어둠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밝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사람이다. 이토록 질척이는 곳에 있으니, 봐! 빛이 그립지? 뭐 이런. 여백의 미로 풍경을 강조하는 수묵화처럼,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말한다. 허무를 그려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니게 되는 무언가를 표출하려한다. ‘모든 것이 오직 허무뿐, 필요한 것은 밝은 불빛과 어떤 종류의 깨끗함과 질서야.(p15,<깨끗하고 밝은 곳>) 마구 흐트러뜨린 퍼즐 속에서 질서를 찾아낼 테면 찾아보라며 툭 던져놓는 듯한, 이런 면에서 헤밍웨이는 불친절한 작가다.
다섯 편의 작품 중에서는 <킬리만자로의 눈>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작가로서의 재능에 대해 언급한 문장들이 시선을 붙든다.
‘그는 확실히 파악한 뒤 훌륭하게 쓰고 싶은 생각에 안 쓰고 아껴 두었던 작품들을 이제는 영원히 쓰지 못할 것이다.(p51)’예상치 못한 죽음을 앞둔 주인공을 묘사한 글이다. 글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겪게 되는 많은 관계나 어떤 종류의 시도도 마찬가지일터이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은 지금이다. 다음은 없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불완전하고도 불안정한 삶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으므로 무엇이든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미련한 행동일지 모른다.
‘그의 재능이란 그가 단 한 번이라도 실제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면 이룰 수 있다는, 잠재적 가능성이었다.(p62)’물리학 용어 중에 위치에너지( potential energy)가 있다. 기준점으로부터 일정 높이에 있는 물체가 지닌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는 물체가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순간을 시작으로 언제라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잠재적인 에너지라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포텐은 터져야 발휘된다는 점이다. 가능성만 지닌 채 평생 공중에 매달려있는 물체는 결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무능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깨끗하고 밝은 곳>에서 모든 것이 오직 허무뿐이라는 나이 많은 웨이터도,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방안에서 기다리는 <살인자들>속의 올레 안드레슨도, <병사의 집>에서 삶은 어느 것 하나 감동을 주지 않았다는 크레브스도,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얘기할 만한 진실이 별로 없었다는 해리도,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에서 섬광처럼 스쳐간 기쁨 끝에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매코머도, 나는 그들의 깊이와 정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 삶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할 뿐이다.
우울증, 알코올 중독증에 시달리다 63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엽총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헤밍웨이. 그의 마지막이 어떠했을지, 마지막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글을 쓴다는 것은 최상의 경우일지라도 고독한 삶입니다.(p6)’라며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밝힌 것처럼 그가 많이 고독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진정한 작가에게 작품 한 편 한 편은 성취감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다시 시도하는 새로운 시작이여야 합니다.(p6)’작가 헤밍웨이의 성취감 너머에 있던 그 무엇은 무엇이었을까. 그 무엇이 이루어졌기에 그는 새로운 시작을 스스로 마감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