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말하고 있잖아 ㅣ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읽고.
나는 지독한 말더듬이였다. 그것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지 못할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고등학생 때,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나, 말을 더듬었었지? 그것도 아주 심하게.’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서늘하게 박혔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말을 더듬었던 어릴 적의 공포가 순식간에 엄습해왔고, 동시에 이 끔찍한 기억을 어떻게 잊고 살 수 있었는지 충격을 받았다. 그랬다. 그때까지 나는 그 시절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시절의 내 상태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멍한 채로 옆에 있던 친구에게 “나 어릴 때 말더듬었다?”하고 중얼거렸다. 친구는 “네가?”하고 웃었다.
경기도에 살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던 것 같다. 한동안 심하게 말을 더듬어서 가족들과 지인들이 많이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그 한동안이 얼마일까. 아마 일 년쯤. 내게 돌아온 기억은 장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감각에 관한 것이다.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은 기억해냈지만, 정작 떠오르는 장면은 단 한 장면이다. 거실에서 부모님을 앞에 두고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나오지 않는 말을 뱉으려 애쓰던 장면. 아마 부모님은 말더듬이 아들을 세워두고 한 마디라도 온전히 해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걱정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에 화도 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던 그 감각만은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분명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목구멍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다. 꼭 목구멍에 프로펠러나 물레방아가 세차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나올 듯 말 듯 소리가 가파르게 맴돌았다. 한 음절도 내뱉지 못했다. 애써 봐도 고작 아아, 어어, 으으, 이랬을 뿐이었다. 그 소리마저 다시 목 속으로 삼켜져 들어올 것만 같았다. 소리를 목구멍에서 입까지 올리는 것만도 드문 일이었는데, 입 안으로 올라온 소리들로 언어의 형태를 꾸리는 것은 더 고역이었다. 그때는 꼭 물이 가득 찬 투명하고 얇은 비닐봉지가 이빨 뒤에 붙어서 모든 걸 막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말은 결국 숨의 형태로 해체된 채 헐떡이며 다시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말 끔찍한 감각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완치됐다. 어떻게 치료가 되었는지, 얼마나 앓았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다. 나는 완치된 채 그때의 기억을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의식 저편에 처박아두고 말끔히 잊었다. 이렇게나 완벽하게 잊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등학생 때 다시 그 기억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약간도 기억하지 못했고, 당연히 내가 말을 더듬었을 거라는 의심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러나 기억이 돌아오고 난 후엔 종종 다시 내가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졌다. 언어를 잃고 소리를 잃고 숨만 남은 채 헐떡이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까. 그 시절이 다시 나를 찾아오진 않을까. 그리고 실제로, 종종 발작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지거나 겁을 집어먹으면 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원래도 그랬으나 기억이 돌아오자 예민하게 인지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유폐된 기억이 한 손에 저주처럼 그때의 상태를 움켜쥐고 나를 찾아온 걸까. 어느 쪽이든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어릴 때부터 은연중에 말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던 것은 분명하다. 관계와 언어소통을 중요시하는 것도, 또 반대로 종종 철저히 혼자 격리되는 것도 절반쯤은 그때의 감각에서 비롯한 것일지 모른다. 줄곧 언어의 질감과 무게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그 이유일지 모른다. 모르고, 모르고, 모르는 것투성이지만 언어라는 것에 평생 절박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니, 이런 자기연민 껄끄러운데, 끔찍한 시절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등 돌려 그 기억을 잠가버린 꼬마를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도 조금 든다.
그래서 이 책을 샀다. 정용준 소설가의 작품은 사실 단편소설 두 편 읽은 것이 전부인데, 좋아하는 소설가를 꼽으라면 말하게 되는 작가이다. 그 두 편이 내가 쓰고 싶은 주제와 너무 맞닿아 있었다. 작품의 무게와 색채도. 언젠가는 정용준 작가의 모든 책을 꼭 사서, 각 잡고 읽어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너무 오래 미뤄뒀다. 그러다 이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말더듬증을 앓는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말에 꼭 읽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구절 하나하나가 치기어리고 세상을 멸시하고 냉소 짓던, 많이 아프고 사랑받고 싶어 하던 십 대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거기서 몇 발짝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고. 슬프고 아름다운, 마음 따뜻해지는 소설이었다.
한동안 책과 글쓰기에 멀어져 있었다. 좀 긴 글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는데 이 책을 읽자 다시금 글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하고, 윤재언 너는 정용준 찾아 읽자 이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