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300여 일간 탄생했던 무수한 나의 파일들이여, 폴더의 노예였던 파일들이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20223월 이래 차곡차곡 정리되었던 정보들이 한순간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 통재라, 오호! 애재라. 파일이여! 파일이여!”

1905,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던 거룩한 애국자의 외침을 이 시점에 떠올릴 일이더냐! <시일야방성대곡>을 부르짖으며 황당신문에라도 싣고 싶은 심정이었다.

 

꿈이라면 좋았을 사건 개요는 이렇다.

-언제: 202212

-어디서: 3학년 1반의 교탁과 전자칠판 사이

-내용: 묵직한 노트북의 자유낙하로 옆구리에 빌붙어 있다 미처 피신 못한 플라스틱 USB, 충격 흡수의 여파로 경추 탈골! 노트북은 찰과상.

운동신경의 반응속도는 그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의 시도들은 유경험자들이 거치는 흔한 단계이다. 몇 번이나 꽂았다 빼기, 해부 후 현실 자각, 파일 복구 업체를 알아보다 예상을 웃도는 가격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며 포기. USB의 거룩한 희생의 대가는 파일 0개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예상 못했던 건 아니다. 손실이나 분실이라도 되면 낭패이니 하드에도 백업받아놓아야지. 노트북 앞에서 생각한 적은 있다. 문제는 생각만 했다는 거다. 실행에 옮기기 전에 발등을 찍은 자, 바로 나다.

침착하자! 계획서 파일은 업무포털에 업로드되어있다. 아쉬운 건 사소한 양식들이다. 실험 실습일지, 실험보고서, 시약 목록 같은 것 말이다. 순식간에 RGB 255,255,255가 된 기억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다행인 건 프리웨어로 주변인들에게 투척했던 흔적이 존재한다는 거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한 나를 눈물 머금고 칭찬한다. 초고속 카메라의 영상을 거꾸로 재생하듯 흩어진 파일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지인이 위로한다.

업무는 거의 마무리되었잖아. 중요한 건 업무포털에서 다운받으면 되고. 학년말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봐.”

맞다. 마무리 업무 파일도 주무 부서에 제출한 상태이니까.

위로 끝에 지인은 한마디 덧붙인다.

근데, J 맞아?”

나의 MBTIINFJ이다. IN은 기분 내키는 대로 달라지지만 FJ는 변하지 않는다. 특히 확고부동한 영역은 J이다.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나는 100%에 가까운 위용을 떨친다. 무척 치밀한 인간⋯⋯...

 

정리의 기본 3단계는 모조리 꺼내기, 분류하기, 재정비하기이다. 염전에서 일하듯 파일 부스러기를 닥닥 긁어모아 다시 폴더를 만들고 정돈하는 중이다.

박웅현은 여덟 단어에서 리처드 파인먼의 말을 인용한다.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 ⋯⋯ 버릴 게 무엇인지 알아내라.’ 잃고 나니 본질이 보인다. 최소한의 필요와 없어도 아쉬울 게 없는 게 구분된다.

USB로 인해 긍정적인 트라우마가 생겼나. 일하다가도 수업 종이 나면 USB 탈착을 잊지 않는다. 수시로 자료를 백업한다. 새로운 USB는 강철 갑옷을 입고 있다. 지나가던 동료가 말한다. “부장님! 단단한 걸로 바꾸셨군요. .. 부러지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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