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왜 공인가. 교양 체육에서 끝날 줄 알았다. 대학을 졸업해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체육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몸. 운동이면 운동, 춤이면 춤, 도무지 주인 말을 듣지 않는 몸치의 표본이다. 한데, 친목 피구라니! 마스크에 갇히기 전까지 체육은 직장에서도 피구, 배구, 족구, 때로는 듣도 보도 못한 공으로 둔갑해서 지긋지긋한 관절염처럼 나를 쫓아다닌다. 아! 정말 피!하고 싶다구!
공과 함께 한 기억 속의 나는 바보스럽기만 하다. 피구, 농구, 배구, 발야구, 테니스(...)…. 무슨 노무 구기 종목은 이리 많은지. 그 중 공 던지기는 공에 대한 흑역사의 정점을 찍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체력장 시험 종목. 구멍 뽕뽕 뚫린 시퍼런 공을 있는 힘껏 던지기만 하면 되었건만. 이론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멀리 뻗어나가는 45°의 포물선이 왜 실전에서는 적용이 안 된단 말인가. 마음만은 투포환 선수인 나를 가까이서 목격한 친구는 살며시 다가와 말한다. “공을 왜 땅으로 내리꽂냐?” 5m 간격으로 그려진 거리 라인의 두 번째 칸을 넘어보는 게 원이었던 나는 끝내 평균 5m, 최고 8m의 저질스런 기록으로 학창시절을 마무리한다.
동화 『소리 질러, 운동장』 (진형민, 창비, 2015.5.)에서는 막야구부 아이들이 등장한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아! 놀고 싶다! 빈곤의 악순환처럼 반복되던, 트라우마에 가깝던 공에 대한 거부감이 살살 부는 바람에 걷히는 아침 안개처럼 사라진다. 공을 두려워하기 훨씬 이전의 나를 불러온다. 친구들을 따라 원피스를 입고 철봉에서 거꾸로오르기를 해도 전혀 민망하지 않던 그 때로. 어느새 나는 정글짐에 올라 땀을 뻘뻘 흘린다. 힘껏 달리던 시절,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워 선을 긋고 사방치기를 하던, 비석치기를 하던 모습이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두루루 풀린다.
진형민 동화 속의 아이들은 탱탱볼을 연상시킨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발함과 투명함이 공존한다. 유리처럼 속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쉽게 깨어지지는 않는다. 차돌 같은 단단함과 맹랑함이 있다. 천방지축해도 짐짓 당당하고 슬기롭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수학 50점을 맞는 게 평생 소원인 아이들에, 자신이 속한 팀에 불리해도 아웃!을 외치는 솔직함에, 어디서든 당찬 모습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푸하! 웃음소리를 따라 찡한 감동이 배어든다. ‘원래 노는 데에는 큰 땅이 필요 없었다.(p143)’ 운동장을 넘어서는 자유가 있는 그들은 노는 것이 뭔지 뭘 좀 아는 놈들이다.
나른한 오후, 마스크를 쓴 아이들이 인조 잔디 운동장에서 공을 쫓는다. 교무실 창문을 열고 공을 쫓는 아이들을 좇는다. 뉴스 기사에 따르면 완벽한 운동장은 아직까지 없는 듯하다. 천연 잔디에서는 잔디의 마모와 배수 지연 및 미끄러움이, 인조 잔디에서는 유해 물질이, 친환경적으로 여겨지는 흙에서조차 석면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종종 들리는 걸 보면 말이다. 아이들의 운동장이 아무 걱정 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의 티 없는 마음을 하루 빨리 닮아가기를 바란다.
체육을 못했던 아이. 못했기에 안했고 안했기에 못했던 순환 고리를 맴돌았다. 어쩌면 나는 너무 복잡한 편견으로 체육을 어렵게만 바라봤던 건 아닐까.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놀면 되는 거였는데, 좀 더 재미있게 노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주최 측 줄바꾸기)
운동장에서 놀아본 지가 언제였더라. 어느덧 운동장에서 마음껏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나. 지나간 시간은 늘 아쉽다. 마음 한 켠 남아있는, 마음껏 뛰어놀지 못한 미련이 공처럼 운동장을 구른다. 추억을 더듬듯 운동장이라도 천천히 밟아보고 싶다.
* 2022. 2. 5. J교단만필 보냄, 2022. 4.15.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