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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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이라고 생각했다. 벽지나 무늬가 있는 건물 벽에서 보이는 것처럼 몇 가지 유형의 복사본이라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멍하니 책을 바라본다. ! 이건 뭐야? Ctrl + C, Ctrl + V 가 아니잖아. 미니어쳐처럼 나열된 남자, 여자, 남자와 여자의 표지 그림. 미세한 차이를 두고 조금씩 다르다. 뒷면도, 단편이 구분되어 있는 여덟 장의 속지도 어느 것 하나 같지 않다. ! 표지에서부터 작가가 표현하려 했던 주제가 묻어있던 거다. 우리 모두의 사랑은 다르다.

 

연애 소설이라는 말을 듣고 읽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등장한 단어, ..! 으흣~세다! 나의 동공은 머릿속에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와 함께 커진다. 조용히 삼켜지는 침과 함께 속독을 하듯 바빠지는 눈동자.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예상은 점점 빗나가고, 이제 막 시작하나 했더니 벌써 마지막 마침표에 도달한다.

이게 무슨 연애 소설이야? 당최 뭔 얘긴지, ‘소매치기라는 뜻을 가진 두 번째 소설픽포켓은 더 황당하다. 단단한 줄 알고 막상 머리를 뉘었는데, 푹 꺼져버린 베개를 베고 난 듯한 느낌은 여덟 편을 글을 다 읽을 때까지 점점 더 업그레이드되며 뒤틀린다.

 

일요일마다 본방 사수하는 <복면가왕>이 불현듯 떠올랐다. 편견을 깨고 노래를 부르는 이의 목소리에만 집중해야 하는, 그동안 노래를 눈으로도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프로그램이. 문학작품이든 그 무엇이든 편견을 버려야 본질이 보인다.

주인공 남녀의 뜨거운 사랑, 안타까운 인연의 고리, 아름답게 그려지는 무지갯빛이거나 폭풍우 몰아치듯 처절하거나. 연애 소설하면 으레 이런 상상을 했더랬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예상을 깨는 파격적인 전개는 이제껏 글로 그려지는 사랑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나의 편견을 가차 없이 깨뜨린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하고 접할 수 있는 연애의 모습이 아닌가. 키 크고, 인간성 완벽하고, 능력 출중하고, 잘생기고, 매너 좋고, 노래 잘하고, 동굴 목소리를 가진 재벌 남은 TV에 박제되어 길거리를 다닐 수 없는 드라마 인간인 것을.

실제 연애는 허탈하고 시시하고 무모하고 시작과 끝이 애매할 때가 많다. 놀라운 것은 어느 것 하나 똑같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슷한 사랑을 꿈꾸며 상대방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럴 때는 이런 반응을 보여야 해, 분명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착각하며 섣불리 판단해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다시 한 번 천천히 소설을 읽어본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문장들이 들어온다. 등장인물들 의 다양한 대화 속에서 섬세한 감정이 모습을 드러내며 흘러나온다.

 

상황과 비율에 나타나 있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

모든 상황엔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엔 의미가 있습니다.’(p22)

소설에서 그려지는 상황을 그대로 음미해본다. 여주인공의 입장에서 묘사되는 상황을 상상해본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데이터가 필요한 거죠..(중략)..다들 외로운 거예요, 그렇죠? 외로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다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거겠죠. 외로운 걸 거예요.’(p41)

포르노와 관련된 상황들을 걷어내고 나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새하얀 탁구공과 아릿하게 닮아있는 사랑의 시작이 보인다.

 

소설 속에 ‘feat. 찰스 디킨스라니. 노래에나 등장하는 용어가 왜? 이 문구가 찰스 디킨스의 문장을 인용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픽포켓이라는 제목처럼 독특한 접근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사랑이 보이는 걸까? , 제목과 내용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훔침과 연관된 상황들이 깨알 같다. 엄마의 돈을 훔쳐 부산으로 가는 고등학생이 있고, 가방을 소매치기당하는 상황은 주인공 여가수를 동네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심지어 곡명조차 <안녕을 훔치다>이다. 훔치다, 훔치다, 무엇을? 한참을 뒤적이며 담겨있는 사랑을 찾아본다.

여주인공이 사귀고 있는 남자, 스캔들 대상이 된 남자는 모두 다른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 그녀는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고 있는 남자를 모른 척하기도 하고, 창문을 통해 나타난 실루엣을 보고 별 감정이 없던 남자에게는 근원 모를 질투를 강렬하게 느낀다. ‘창문은 질투의 시작이었다. 창문에 어른거리는 것들을 갖고 싶었다.’(p86)

모든 창문에는 비밀이 있었고, 기민지는 그 비밀이 늘 부러웠다. 비밀을 가질 수 있다면 누군가 바깥에서 자신의 창문으로 돌을 던져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을 쌓는 것보다 창문을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다.’(p87)

보여 지는 사랑과 실제 사랑은 다르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일 듯 말 듯한 상황은 더 큰 상상력을 부른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 만든 창문을 세워두고 비춰지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사랑을 지레 상상하고 쉽게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라는 제목에는 슬픔이 있다. 서로를 안는다는 것은 따스함을 공유하는 일인데, 가짜 팔이라니.

사랑에도 소설처럼 완결이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해피엔딩은 결혼이거나 환하게 웃는 모습들이지만, 결혼 이후에도 삶은 지속되는 거니까. 이별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사랑의 완결은 이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다만 시기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고.

지그소 퍼즐을 보면 아주 신물이 난다는 규호는 2천 조각짜리 퍼즐을 맞추고도 오히려 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림을 다 맞추고 나면 새로운 걸 완성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고, 그냥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제자리에 놓아둔 기분이야.’(p93)

완벽하게 결합된 지그소 퍼즐에서 나는 이별을 연상했다. 나만의 시각이지만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퍼즐 조각처럼 잠시 내게서 떨어져 나온 감정의 조각들이 다른 조각들과 마주치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라고. 사랑에서 이별까지의 과정도 이런 것이 아닐까?

6월에 지었던 이별이란 시가 떠오른다.

있던 자리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각자 다른 공간을 바라보고/ 다른 꿈을 꾸게 되었을 뿐입니다// 나의 기쁨이 더 이상 그에겐/ 아무 상관없어졌을 뿐입니다/ 아프고 시린 순간을 기대며/ 나눌 수 없게 되었을 뿐입니다// 다가오지 않은 시간들을/ 더 많이 공유했을 지 모른다며/ 아쉬워하지 말기로 합니다// 단지 여기까지였을 뿐입니다/ 처음으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시선이 고정되었던 장면은 이별의 고통을 외치는 부분이다. ‘이별에 관한 것이라 정확히 지칭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러리라 짐작해본다.

고통 같은 것은 말입니다, 절대 얼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그게 다 어디 붙는지 아십니까? 알코올에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살에도 붙고, 조각조각 나서 뇌에도 붙고, 또 내보내려고 해도 손톱 발톱 그렇게 안 보이는 데 숨어살면서요, 조용히 있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요,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요, 그러는 겁니다.’(p117)

맺힌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중략)..이것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p117)

주인공 규호는 이미 헤어졌던 여자 친구를 향해 이야기들을 읊조리며 한 번만 안아주고 가라는 말을 반복한다.

안는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은 적이 있다.

하루를 지내는 동안/ 몇 명이나 안아보았던가// 몸과 몸이 닿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전해지는 온기를 넘어/ 마음과 마음이 닿는다는 것// 나를 향해 열려있는 가슴/ 그거 하나면 충분한 날에/ 먹먹하게 퍼지는 영혼의 전율/ 따스하게 담기는 편안한 위로// 안는다는 것은 사실/ 이런 의미인지도 모르지// 시린 가슴 몇이 만나/ 위로해주고 기대어가며/ 서로의 눈물을 덜어내는 건지도// 버거워지는 시간의 귀퉁이를/ 잠시나마 가벼이 들어주는 것/ 누군가를 안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안고 있는지도

가짜 팔은 애정 없이 안는 팔이다. 그래도 그것조차 의미 있는 포옹이라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그거 알아?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랐는데, 네 등만 봤다고. 등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고.’(p96)

 

뱀들이 있어는 좋아하던 여자가 자신의 친구와 결혼해버린 상황에 있는 남자의 질투어린 심리에 관한 소설이다. 그는 구슬점으로 운세를 점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프로그램의 선택 상황처럼 끊임없이 모순된 감정의 갈등을 경험한다.

세상의 모든 일을 기록하는 기분이었다..(중략)..때로는 폭력이 구원이 되기도 하고 실수가 정답이 되기도 하며 우연이 지름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p139)

어느 날 그는 지진으로 친구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평화로운 풍경은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 그 풍경이란 얼마나 연약한 고요함인지..(중략)..현재의 시간을 유심히 보았다. 바꿀 수 없는 시간이었다. 다른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현재의 시간이 비웃는 것 같았다.’(p140)

좋아했던 여자를 찾아간다. 그들의 대화에서 게임 프로그램은 다시 등장한다. 여자는 선택할 수 있는 구슬의 수가 줄어드는 게임 방식을 남은 구슬로 매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얼마나 기습적인가. 그런 상황을 맞게 되는 우리는 끊임없는 갈림길에서 고민을 한다. 사랑과는 별개로 나의 눈길은 선택에 관한 서술에 오래 머무른다.

새로운 일이 벌어질 때마다 운세대로 행동할 것인지, 운세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p137)

 

종이 위의 욕조에서는 화가와 큐레이터 사이에 막 움트려고 하는 사랑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들의 공감은명사 분실증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결정적이고 자극적인 문장이 서술되어 있지도 않고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화체의 문장은 지극히 단답형이다. 그런데도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면 사랑이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슬금슬금 타고 가다보니 어느 순간 정상에 도달해버린 케이블카에 있던 것처럼. 딱히 어느 부분부터라 지칭하기 애매하지만 그라데이션처럼 서서히 변해가는 감정의 흐름이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평면은 무한한 입체이다.’(p192)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끊임없이 이어진 면을 따라가다 보면 경계가 하나 밖에 없는 2차원 도형이 되어버리는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되었다.

 

보트가 가는 곳은 사랑의 시작과 죽음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참 묘한 것이 사랑의 시작은 대부분 지나간 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확실하지 못할 때도 많고, 이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하며 막연한 추측으로 어림잡아질 뿐이다.

주인공은 과거에서 미래에 이르기까지 1년 단위의 같은 날을 보여주는 앱을 개발한다.

시간을 다른 식으로 엮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을 붙잡는 것 같아서 좋았다. 매년 11일이 되면 몇 년 동안의 11일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p220)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중략)..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p222)

검은 구멍으로 한순간 빨려 들어가버린 그녀의 죽음은 사랑의 시작에 대한 남자의 고찰을 만들어낸다. 끝에서 바라보는 시작이라니.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p228)라 되뇌는 남자의 말은 죽음 앞에서 허무하기만 하다.

 

힘과 가속도의 법칙에는 실연당한 남자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인스턴트식품처럼 빨리 시작되고 가볍게 끝나버리는 요즘 사랑과 대조적이다. 자동차에 뛰어들기 직전까지의 상황은 엑셀을 밟아 점점 빨라지는 자동차처럼 긴장된 속도감을 안겨준다. ! 힘과 가속도의 법칙이라니! 제목 한 번 기가 막히다. 고통에 대한 마지막 부분의 서술은 점묘화를 보듯 세밀하다.

현수는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모조리 분리시키고 싶었다..(중략)..다시 짜맞출 수 없대도 일단 해체하고 싶었다. 삐걱거리는 육체를, 가누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진 심장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고통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중략)..모든 게 텅 비길 원했다..(중략)..거대한 얼음판 한구석에서 작은 금이 시작되듯 자동차와 충돌한 몸의 부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p261)

 

요요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관계의 시작, 그것이 이어지는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소설 속에는 시간시계라는 말이 수시로 등장하는데, 어쩐지 그 말들은 내 눈에 관계라는 말과 겹쳐져 보인다. 독립시계제작자가 된 남자가 첫 번째로 만든 작품 <시간은 흐른다><관계는 흐른다>, ‘시간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p286)라는 문장도 관계는 어디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로 해석되는 식이다. 그가 만들려고 했던 시계 <Station> 속에서 거꾸로 움직이며 흘러가는 기차마저 과거를 거슬러 추억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Station>에 끝내 시간을 불어넣지 못한 것은 과거에 붙잡고 싶었던 그녀와의 관계가 그대로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었을까?

선택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진다. 결과를 되짚어 선택을 선택할 수는 없다.’(p295)는 문장은 선택을 후회하며 만약에를 반복하게 되는 순간으로 냉철하게 다가간다.

시침과 분침이 겹쳤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걸까. 난 생각했어. 나쁘지 않아. 그래, 나쁘지 않아.’(p300)

그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은 그녀와의 시간에 원을 그려 넣으며 <요요>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그래, 요요로 하자.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중략)..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아.’(p300)

 

처음으로 접하게 된 김중혁 작가의 글은 상식을 파괴하는 전개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주었다. 첫 번째 읽었을 때 2점과 3점 사이를 오갔던 나의 별점은 그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지는 마음과 함께 4점과 5점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 허무한 결말은 도대체 뭐야 라며 황당해했던 처음의 기억은 잘 짜인 옷감을 본 것 같은 느낌에 덮여버리고 만다.

이 책은 연애 소설이 맞다. 관계가 Ctrl + C, Ctrl + V 가 될 수 없듯이 표지에 그려진 제각각의 사람들처럼 어느 것 하나 똑같을 수 없는 연애에 관한 글이다.

치밀하고 치열하기까지 한 8편의 작품들 사이에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했던 시간’. 그것은 관계라는 실을 꽁무니에 매단 채 작품들을 묘하게 이어붙이는 바늘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관계에 대한 소설이라 이름 붙여 본다. <작가의 말>에 나열된 수많은 등장인물들에서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가가 엿보인다. 제목을 바꾸어 읽어본다. <작가의 마음>이라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다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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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 1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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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강신주는 에피소드 철학사특강에서 철학의 정의를 설명하며 아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알게 된다.”고 하였다. 저자 인터뷰 글에서 원효를 가리켜 내가 가장 강력하게 사랑하는 한 남자라 표현한 작가의 말에서 나는 얼마 전에 인터넷 강의로 들었던 철학의 정의를 떠올렸다. 3백 쪽이 훨씬 넘는 두 권의 책을 단 이틀 만에 완독하게 하는 힘, 그것은 작가의 아름답고 세밀한 문체를 넘어 원효라는 남자에 대한 앎의 깊이가 주는 흡인력이었다. 학문적인 접근을 넘어서 대상에 대한 사랑이 전해져왔다.

 

요석 그리고 원효라는 부재가 붙어있지만, 소설이 담고 있는 것은 남녀의 사랑을 뛰어넘는 광범위한 사랑이다.

요석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로서 행복했을까? 소설에서 그려진 요석의 사랑은 헌신적이었지만, 그녀에게로 향한 원효의 사랑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 선택이 파계이기는 했지만, 결과만으로 모든 과정이 덮어지지는 않는 거니까.

요석이 행복했을 것 같기는 한데, 원하는 사랑에 대한 범위'의 문제일까? 세상에 바람직한 사랑이라는 것은 없으니. 사랑은 저마다 주관적인 것이니 누구든 자신이 하는 사랑이 정답인 것이다. 사랑하면 늘 같이 있고 싶고, 만지고 싶기 마련인데 좁은 범위에서 바라보면 1% 아쉬운 사랑이다. 그렇다면 요석이 바랐던 사랑은 좀 더 넓은 범위의 것이었을까?

요석에게서도 원효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세상에 대하여 드넓게 펼쳐지는 사랑.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보인다. 원효를 계기로 그녀의 사랑이, 더 나아가서 삶이 업그레이드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사랑, 사랑……. 나는 어떤 사랑을 바라고 있는 걸까?

 

아름다움 중 제일이 당당한 아름다움이다.’(p22)

나를 돌아본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늘 곤혹스러웠다. 어색함에 얼굴도 빨개지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를 주눅이 들어있었다. 지금도 말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많이 없어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면 되는 것이었는데 무에 그리 어려웠을까? 내 위에 덧칠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은연중에 있던 걸까? 실제의 나와 다른 모습을 표현하려니 어색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내 목소리를, 야신은 야신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p113)

나도 내 목소리를 따라가면 되는 거겠지. 나에 대해서, 주변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당당한 삶을 살고 싶다. 꾸미지 않고 나의 생각을 당당하게 표현하며 살아가고 싶다.

 

중학교 때 생각했던 변화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였다. ‘법칙에 대한 정의와는 모순되는 생각이지만 변화변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생각이다. 변화된 내 생각처럼.

변화하기 때문에 흘러가는 것인가, 흘러가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인가.’(p76)

나는 흘러가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처럼 그저 변화하면서 흘러가는 것이 이제껏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다.

나는 이제 머무르지 않음에 머문다, 그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머문다.’(p209)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선명한 어둠이 만들어지듯이 정반대의 것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 가진 매력일까?

 

매월 1일이 되면 그 달의 실천목표를 세운다. 올해부터 세운 계획이다. 이번 달은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이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많이 웃느니만 못하다. 많이 아는 것은 많이 느끼느니만 못하다. 많이 안다고 줄기차게 떠드는 사람은 둥실 뜬 달을 보고 한 번 웃는 사람보다 허무하다.’(p216~217)

지난달은 글을 잘 쓸 수 없었다. 생각이 뒤엉켜버린 느낌이었달까? 책을 읽고 리뷰를 많이 쓰거나 시를 많이 쓰리라 결심했던 연초의 계획이 살짝 무너진 시기였다. 그런데, 말을 많이 하지 않다보니 내 내면을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다. 뭔가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리뷰부터 시작해야겠어.’책장을 둘러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책이 발원이었다. 다시 돌아본 문장들은 어질러진 내 집 마당에 쓱싹쓱싹 비질을 하는듯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가끔 새벽에 잠을 깰 때가 있는 데, 얼마 전 깨었던 새벽에도 이 책이 함께 했다. 멍하니 누워있다 시를 지었다.

새벽 3, 갑자기 눈이 떠졌다/ 가만히 누워있다 방을 쓸어본다/ 어느새 길어진 손톱을 깎아본다/ 바삭 마른 빨래를 곱게 개켜본다/ 검푸른 바다를 지나는 파도처럼/ 다가왔다 멀어지는 자동차 소리

어제 본 눈물이 떠오른다/ 환하게 쏟아지던 웃음도 스친다/ 책 안에서 마음속으로 흘러넘치던/ 요석과 원효의 사랑을 생각한다/ 군데군데 네모난 별인 듯/ 아직 잠들지 않은 창문이 따뜻하다

점점 깊어가는 시간 속으로/ 다른 이의 모습이 하나 둘 사라지면/ 짙게 덧입혀진 공간 속으로/ 잔잔해지는 감성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오롯이 나만을 돌아보는 고요의 순간/ 새벽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오늘이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오늘/ 어제가 아님에도 어제를 바라보게 하는/ 누군가의 끝이며 시작이 되는 새벽은/ 새로운 오늘을 건네며 나를 깨운다

영원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현재로구나. 깨어 있는 현재만이 영원이구나.’(p283)

늘 깨어있는 사람이고 싶다. 과거만을 돌아보며 지나간 시간만을 붙들고 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 않다. 나의 생각이 언제나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기를.

 

너도 꽃이고, 나도 꽃이고, 모두가 꽃처럼 아름다운 존재’‘모두가 자신 안의 부처를 발견하고 꽃피워야 한다.’는 원효의 사상을 접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정지원 시, 안치환 노래)도 가사를 음미하며 다시 한 번 들어보았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 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 //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3년 전에 지었던 어설픈 시도 찾아보게 되었다.

너희는 모두 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봄/ 노릇노릇 점을 찍는 개나리/ 쨍쨍한 여름/ 햇살을 향해 생명을 뿜어내는 신록/ 바람 부는 늦가을/ 서리 속에서 고고한 국화/ 새하얀 겨울/ 눈 이불을 덮고 있는 동백꽃이다// 누군가에게 부드러운 휴식을 주며/ 당당하게 하늘을 마주하고 누워있는 잔디/ 물고기를 자유롭게 팔딱거리게 하며/ 연못 위에 둥둥 떠 있는 개구리밥/ 장난꾸러기 성호의 코를/ 살랑살랑 간지럽히는 강아지풀이다// 세상 모든 꽃이 한순간에 피어난다면/ 얼마나 어지러운 현란함이 될 것인가/ 세상 모든 꽃이 한순간에 져버린다면/ 얼마나 삭막한 쓸쓸함이 될 것인가// 따스한 햇살의 속삭임에 깨어나는 꽃/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내는 꽃/ 반가운 단비를 흠뻑 맞으며 고개를 내미는 꽃/ 저마다 피어나는 시기가 다를 뿐이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면/ 그 끄트머리에서는/ 눈부신 생명력이 서서히 움튼다// 너희는 모두 꽃이다// 세상에 이름 없는 잡초가 어디 있나/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지/ 세상에 의미 없는 꽃이 어디 있나/ 그 의미를 보지 못하는 마음만이 있을 뿐이지// 너희는 모두 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피어나려는

 

초반에는 신라의 골품제도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가 부족해서 신분에 대한 용어를 찾아보느라 읽는 걸음이 더뎠다. ‘.이라는 말이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골제(성골, 진골)와 귀족과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두품제를 합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학창 시절에 무조건 암기만 했던 용어였건만. 역시 스스로 알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의미 있는 공부이다.

당시의 역사적인 사건들과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김춘추선덕여왕이라는 역사적 인물도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없어진 신분 제도가 과연 없어졌다고 볼 수 있는가 생각도 해보았다. ‘역사라는 것이 가진 자의 주관적인 기록임을 새삼 절감하였다.

 

발원은 소설이다.‘원효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역사적인 지식은해골 물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 얼핏 주워들은 얕은 풍월로 요석 공주와 연관 검색어로 뜨는 스님이라는 것, 하지만 그 공주와 뭐를 했는지는 별 관심이 없던 인물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소설이라는 장르가 나타내는 특성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한 사람을 중심으로 묘사된 글은 사랑에 대해서, 내 자신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얻게 된 마음의 울림은 원효에 대한 접근이 얼마나 사실적이었냐 여부를 의미 없게 만든다.

원효(元曉). 으뜸 원, 새벽 효. 새벽까지 이어진 독서에서 이 책이야말로 새벽에 읽기에 적당한 책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점이 좋았다.

길을 만들 수 있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는지요, 길이란 게 어차피 본래부터 있던 건 아니니까요.’(p336~337)

다른 사람을 생각 없이 따라가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가고 싶다.

 

발원'. 책의 제목이 내게 묻는다. 네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혜공 스님이 원효에게 했다는 말도 생각난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게냐, 너를 바꾸고 싶은 게냐?’(p334)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바로 답을 하기에 어려운 질문이다. 일단 나는 나를 바꾸고 싶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기에는 뭔가 아쉽다. 존재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넘어 세상에 내가 태어난 이유가 한 가지쯤은 더 있을 것 같기에. 그렇다고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너무 묵직하다. 그저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스스로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작은 도화선 같은 계기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다, 이 책이 내게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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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춘향과 이도령이 만났다는 16세. 그들 사이에 꽃으로 피어났던 사랑처럼, 알라딘과 우리 사이에도 많은 책들이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알라딘은 사랑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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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인문학 - 공부하는 엄마가 세상을 바꾼다
김경집 지음 / 꿈결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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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영화 마징가제트에는아수라 백작이 등장한다. 좌우가 다른 얼굴과 목소리를 지닌 괴상한 악당이다. 책의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막상 행동으로 하자면 망설이는 마음, 보여지는 세상과 감추어진 세상. 쓰고 있는 글과 써야 할 글과의 경계에 있는 나를 느끼면서 책을 읽는 내내 이 캐릭터와 함께모순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몇 주 전,‘416, 세월호, 아이들, 416, 세월호, 아이들...’며칠 동안 한참을 고민한 적이 있다. 지난 3월 독서 모임, 같이 참여하시는 분이 416일에세월호 추모 행사를 주관하는데, 추모시가 필요하다 했다. ’혁명, 노동, 민주이런 말에 여전히 낯선 나는 손사래를 쳤다.

제 시의 주제는 대부분 사랑이예요. 저는 그런 글 못 써요.” “그냥 써주세요. 할 수 있을 거예요, 충분히.”몇 분간 뜸을 들인 끝에 그럼 한 번 써볼께요.”라 했지만, 여전히 자신감은 없었다. 도대체 그런 어마어마한 소재를, 더군다나 그토록 먹먹한 소재에 어떻게 접근을 한단 말인가!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416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내 감성대로 한 번 써보자!’ 결국 <416>이란 제목의 시가 만들어졌지만, 시를 쓰면서 깨닫게 된 것은 이제껏 나는 ‘416의 변두리에 있던 방관자였다는 것이었다. 마음 한 켠 부족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416

 

1997/ 벚꽃 한 가득 펼쳐지던 날/ 눈부신 세상을 만났습니다/ 하늘과 만나 짙푸른 바다는/ 구름 같은 꿈들을 한껏 담았습니다/ 점점 더 번져가는 따스한 봄날에

2014/ 하늘 향해 벚꽃 흩날리던 날/ 새하얀 꿈들이 가라앉았습니다/ 검게 변한 바다는 침묵 속에서/ 그들의 미래를 조용히 삼켰습니다/ 마음을 도려내 듯 차가운 봄날에

2015/ 흐드러진 벚꽃만큼 먹먹해지는 날/ 하늘하늘 꽃잎들도/ 그 많던 꿈들도/ 봄처럼 화사했을 언젠가의 사랑도/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스러지는 영혼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나는/ 어루만지지 못한 바다를 생각합니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봄날이/ 묵직하게 심장을 잡아당깁니다/ 매달린 리본이 바늘처럼 시큰거립니다

 

<엄마 인문학>역사, 예술, 철학, 정치, 경제, 문학분야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엄마들의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책이다. 각 분야의 흐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그리 어렵지 않은 문장으로 재구성하여 보여주고 있다.

독서 모임에서 3예술분야의 발표를 맡았다. 이 장의 주제는 한 마디로 예술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것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음악가와 미술가들이 당시 시대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고, 어떻게 시대의 영향을 받았는지 적혀있다. 베토벤, 백남준, 피카소 등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친숙하게 접했던 예술가부터 생전 처음 들어본 현대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가장 인상 깊었던 예술가는장샤오강이었다. 그림에 빛을 나타낸다는 중국의 화가. 대표작은 <대가족>이란 작품인데, 삼삼오오 짝을 지어 표현된 인물들에게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얼굴에 그려진 문양처럼 독특한 빛의 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인터넷으로 그의 작품과 이력을 찾아보면서 그가 중국 현대 미술의 사대천왕으로 불린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 매체와 인터뷰를 한 기사를 보았다. “빛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나타내고, <대가족>에 표현되어 있는 얼룩 같은 빛은 시간의 흔적을 의미한다.”고 했다. 인물들에게 드리워진 빛들은 오랫동안 나의 시선을 끌었다.

내 글에도 빛을 담고 싶었다. 내면에 채색되고 싶은 사랑을 향하여. 오랜 고민의 흔적, 감정의 울림,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감성과 아픔, 그 먹먹한 그리움들이 빛으로 드러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를 짓기 위해 고민했던 몇 주 전이 떠올랐다. 예술이 시대를 반영해야 하는 것이라면 문학도 마찬가지겠지. 남녀 간의 사랑만을 표현한 시가 과연 빛이 될 수 있을까. 사랑의 영역을 좀 더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세월호에 대한 시도 결국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니. 사회와 시대를 외면한 글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제껏 나는낯섬을 가장하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니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던 것을.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세상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보면아수라 백작과 다르지 않다. 너무 많이 먹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며칠 동안 한 끼조차 먹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연탄 한 장이 아쉬워 추위를 껴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겨울에도 집안에서 반팔만 입고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깊어지면 행복한 만큼 아픔이 되기도 하니까. 늘 양면적인 세상. 그래서 제대로 표현하려 한다면, 그 빛과 어둠을 다 드러내야 할 것이다. 빛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면서 정작 어둠은 바라보지 않는다면 반쪽짜리 불완전한 글이 될 것이다. 어둠과 함께 드러나는 빛이 가장 선명한 것처럼.

우선은 내 자신부터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려 한다. 밝은 이면에 감추어 놓은 모순적인 어둠을. 다음에는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하지만 내가 표현하고 싶은 어둠은 온전한 어둠은 아니다. 빛을 바라보는 어둠이라 할까.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누군가는 나의 글을 통해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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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4-30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호 유족들, 을 방송을 통해 보면서 열 번 넘게 눈물 흘렸던 것 같아요.

나비종 2015-04-30 19:16   좋아요 0 | URL
정말 마음아픈 일입니다. . 지금까지도. .

2015-04-30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5-04-30 19:45   좋아요 0 | URL
그렇죠. .어쩔 수 없는 일은 비난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쩌지 못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
 
잠실동 사람들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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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이라는 노래(윤종신 작사)가 있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종종 이 노래의 앞부분 가사가 생각났다. 노래 후반부에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 곳이 나오지만, 소설 속 현실에서의 정상은 어디쯤일까 가늠되지 않는다.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글에 묘사된 상황을 금방 끄집어내 다큐라 칭한다 해도 전혀 과장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나를 짓누른다.

 

누가 주인공이랄 것도 없이 소제목으로 등장하는 16명의 사람들이지만,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가장 많이 나오는 지환엄마 수정이라 생각한다. 그녀에게서는 경계가 연상된다. 잠실동에 살지만 대치동을 바라보고, 잠실동과 빌라 촌 사이에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안정된 소속을 갖지 못한 인간처럼 불안정한 모습은 그녀의 이름처럼 금방이라도 깨질 듯 수정을 닮아있다. 지환의 담임교사 미화를 겨냥한 집단 시위에 완전히 동조하지도 못하고, 강하게 거부하지도 못하는 모습은 우리 주변 흔한 엄마들의 모습이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서도 독자적으로 행동하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기만 하다.

누구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보다 많은 엄마들은 이렇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주류에 휩쓸려 간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스프링 벅의 질주처럼 씁쓸한 현실이다.

 

3월 들어 미니의 두통이 벌써 두 번째다. 오후 355분에 7교시 수업이 종료되면 청소, 종례를 마치고 4시 반 정도에 집에 도착한다. 저녁인지 간식인지 애매한 식사를 하고 5시 반에 학원가는 버스를 탄다. 저녁 840분에 집으로 와서 출출해진 배를 다시 채우고 만만치 않은 학원 숙제를 마치면 밤 11시가 넘는 건 다반사다. EBS로만 집에서 공부하다 올 초부터 달라진 일과이다. 병원에서는 감기라고 하지만 엄마가 보기에는 심리적인 요인도 다분히 섞인 듯하다. “학원가기 힘들어서 아픈 거 아냐? 힘들면 그만 다녀도 돼.”“정말 아픈 거야. 힘들지만 다니긴 다녀야지…….”무조건 학원을 강요하진 않지만, 말끝을 흐리며 힘없는 답하는 아이의 말 속에 소설 속 아이들의 모습이 느껴진다. 마음이 무겁다.

 

어디서부터 잘못 꿰어진 걸까?

지난 해 전국 4년제 대학의 한 학기 평균 등록금이 318만원이라 한다. 대학 5학년생들이 급증하고 있는 이유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대학생 서영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래서 낯설지 않다.

교육 현장은 교육 시장이라는 용어가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 되어버렸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고 팔 듯 최상의 가치를 얻기 위해 사람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몰아치는 분위기에 아이들의 영혼이 휩쓸리듯 쓰러진다.

지환아빠 인규를 통해 묘사되는 조직 사회의 먹이사슬, 어학원 상담원 윤서와 과외교사 승필, 원어민 강사 지미, 학습지 교사 현진이 보여주는 사교육의 현장은 구석구석이 적나라하다.

어디부터 되돌려져야 할까?

허구라 밝힌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초등교사 미화를 둘러싼 사건들은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알고 보면 나름의 이유들이 있지만, 때로는 목적을 상실한 채 무모한 방향으로 거침없이 진행되어가는 일들에게서는 두려움조차 느껴진다. 소설보다 더한 현실은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처음부터 끝까지 갑갑한 마음이 들던 책. 결코 유쾌하지 않음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그들의 부모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대로 살게 할 수는, 이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끝도 모를 오르막길을 강요당하는 어린 영혼들이 하루 빨리 평평한 곳에 앉아 바람 부는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expensive’의 비교급은 몰라도 다친 비둘기를 안아 따뜻한 체온을 느낄 줄 아는 초등학생 지환의 모습에서 희망의 빛줄기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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