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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동 사람들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르막길」이라는 노래(윤종신 작사)가 있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종종 이 노래의 앞부분 가사가 생각났다. 노래 후반부에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 곳’이 나오지만, 소설 속 현실에서의 정상은 어디쯤일까 가늠되지 않는다.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글에 묘사된 상황을 금방 끄집어내 다큐라 칭한다 해도 전혀 과장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나를 짓누른다.
누가 주인공이랄 것도 없이 소제목으로 등장하는 16명의 사람들이지만,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가장 많이 나오는 지환엄마 수정이라 생각한다. 그녀에게서는 ‘경계’가 연상된다. 잠실동에 살지만 대치동을 바라보고, 잠실동과 빌라 촌 사이에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안정된 소속을 갖지 못한 인간처럼 불안정한 모습은 그녀의 이름처럼 금방이라도 깨질 듯 ‘수정’을 닮아있다. 지환의 담임교사 미화를 겨냥한 집단 시위에 완전히 동조하지도 못하고, 강하게 거부하지도 못하는 모습은 우리 주변 흔한 엄마들의 모습이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서도 독자적으로 행동하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기만 하다.
누구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보다 많은 엄마들은 이렇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주류에 휩쓸려 간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스프링 벅의 질주처럼 씁쓸한 현실이다.
3월 들어 미니의 두통이 벌써 두 번째다. 오후 3시 55분에 7교시 수업이 종료되면 청소, 종례를 마치고 4시 반 정도에 집에 도착한다. 저녁인지 간식인지 애매한 식사를 하고 5시 반에 학원가는 버스를 탄다. 저녁 8시 40분에 집으로 와서 출출해진 배를 다시 채우고 만만치 않은 학원 숙제를 마치면 밤 11시가 넘는 건 다반사다. EBS로만 집에서 공부하다 올 초부터 달라진 일과이다. 병원에서는 감기라고 하지만 엄마가 보기에는 심리적인 요인도 다분히 섞인 듯하다. “학원가기 힘들어서 아픈 거 아냐? 힘들면 그만 다녀도 돼.”“정말 아픈 거야. 힘들지만 다니긴 다녀야지…….”무조건 학원을 강요하진 않지만, 말끝을 흐리며 힘없는 답하는 아이의 말 속에 소설 속 아이들의 모습이 느껴진다. 마음이 무겁다.
어디서부터 잘못 꿰어진 걸까?
지난 해 전국 4년제 대학의 한 학기 평균 등록금이 318만원이라 한다. 대학 5학년생들이 급증하고 있는 이유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대학생 서영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래서 낯설지 않다.
교육 현장은 ‘교육 시장’이라는 용어가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 되어버렸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고 팔 듯 최상의 가치를 얻기 위해 사람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몰아치는 분위기에 아이들의 영혼이 휩쓸리듯 쓰러진다.
지환아빠 인규를 통해 묘사되는 조직 사회의 먹이사슬, 어학원 상담원 윤서와 과외교사 승필, 원어민 강사 지미, 학습지 교사 현진이 보여주는 사교육의 현장은 구석구석이 적나라하다.
어디부터 되돌려져야 할까?
허구라 밝힌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초등교사 미화를 둘러싼 사건들은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알고 보면 나름의 이유들이 있지만, 때로는 목적을 상실한 채 무모한 방향으로 거침없이 진행되어가는 일들에게서는 두려움조차 느껴진다. 소설보다 더한 현실은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처음부터 끝까지 갑갑한 마음이 들던 책. 결코 유쾌하지 않음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그들의 부모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대로 살게 할 수는, 이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끝도 모를 오르막길을 강요당하는 어린 영혼들이 하루 빨리 평평한 곳에 앉아 바람 부는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expensive’의 비교급은 몰라도 다친 비둘기를 안아 따뜻한 체온을 느낄 줄 아는 초등학생 지환의 모습에서 희망의 빛줄기를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