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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 1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평점 :
철학자 강신주는 「에피소드 철학사」특강에서 철학의 정의를 설명하며 “아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알게 된다.”고 하였다. 저자 인터뷰 글에서 원효를 가리켜 ‘내가 가장 강력하게 사랑하는 한 남자’라 표현한 작가의 말에서 나는 얼마 전에 인터넷 강의로 들었던 ‘철학’의 정의를 떠올렸다. 3백 쪽이 훨씬 넘는 두 권의 책을 단 이틀 만에 완독하게 하는 힘, 그것은 작가의 아름답고 세밀한 문체를 넘어 ‘원효’라는 남자에 대한 앎의 깊이가 주는 흡인력이었다. 학문적인 접근을 넘어서 대상에 대한 사랑이 전해져왔다.
‘요석 그리고 원효’라는 부재가 붙어있지만, 소설이 담고 있는 것은 남녀의 사랑을 뛰어넘는 광범위한 사랑이다.
요석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로서 행복했을까? 소설에서 그려진 요석의 사랑은 헌신적이었지만, 그녀에게로 향한 원효의 사랑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 선택이 파계이기는 했지만, 결과만으로 모든 과정이 덮어지지는 않는 거니까.
요석이 행복했을 것 같기는 한데, 원하는 사랑에 대한 ‘범위'의 문제일까? 세상에 바람직한 ‘사랑’이라는 것은 없으니. 사랑은 저마다 주관적인 것이니 누구든 자신이 하는 사랑이 정답인 것이다. 사랑하면 늘 같이 있고 싶고, 만지고 싶기 마련인데 좁은 범위에서 바라보면 1% 아쉬운 사랑이다. 그렇다면 요석이 바랐던 사랑은 좀 더 넓은 범위의 것이었을까?
요석에게서도 원효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세상에 대하여 드넓게 펼쳐지는 사랑.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보인다. 원효를 계기로 그녀의 사랑이, 더 나아가서 삶이 업그레이드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사랑, 사랑……. 나는 어떤 사랑을 바라고 있는 걸까?
‘아름다움 중 제일이 당당한 아름다움이다.’(p22)
나를 돌아본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늘 곤혹스러웠다. 어색함에 얼굴도 빨개지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를 주눅이 들어있었다. 지금도 말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많이 없어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면 되는 것이었는데 무에 그리 어려웠을까? 내 위에 덧칠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은연중에 있던 걸까? 실제의 나와 다른 모습을 표현하려니 어색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내 목소리를, 야신은 야신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p113)
나도 내 목소리를 따라가면 되는 거겠지. 나에 대해서, 주변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당당한 삶을 살고 싶다. 꾸미지 않고 나의 생각을 당당하게 표현하며 살아가고 싶다.
중학교 때 생각했던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였다. ‘법칙’에 대한 정의와는 모순되는 생각이지만 ‘변화’는 ‘변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생각이다. 변화된 내 생각처럼.
‘변화하기 때문에 흘러가는 것인가, 흘러가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인가.’(p76)
나는 흘러가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처럼 그저 변화하면서 흘러가는 것이 이제껏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다.
‘나는 이제 머무르지 않음에 머문다, 그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머문다.’(p209)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선명한 어둠이 만들어지듯이 정반대의 것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 가진 매력일까?
매월 1일이 되면 그 달의 실천목표를 세운다. 올해부터 세운 계획이다. 이번 달은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이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많이 웃느니만 못하다. 많이 아는 것은 많이 느끼느니만 못하다. 많이 안다고 줄기차게 떠드는 사람은 둥실 뜬 달을 보고 한 번 웃는 사람보다 허무하다.’(p216~217)
지난달은 글을 잘 쓸 수 없었다. 생각이 뒤엉켜버린 느낌이었달까? 책을 읽고 리뷰를 많이 쓰거나 시를 많이 쓰리라 결심했던 연초의 계획이 살짝 무너진 시기였다. 그런데, 말을 많이 하지 않다보니 내 내면을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다. 뭔가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리뷰부터 시작해야겠어.’책장을 둘러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책이 『발원』이었다. 다시 돌아본 문장들은 어질러진 내 집 마당에 쓱싹쓱싹 비질을 하는듯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가끔 새벽에 잠을 깰 때가 있는 데, 얼마 전 깨었던 새벽에도 이 책이 함께 했다. 멍하니 누워있다 시를 지었다.
‘ 새벽 3시, 갑자기 눈이 떠졌다/ 가만히 누워있다 방을 쓸어본다/ 어느새 길어진 손톱을 깎아본다/ 바삭 마른 빨래를 곱게 개켜본다/ 검푸른 바다를 지나는 파도처럼/ 다가왔다 멀어지는 자동차 소리
어제 본 눈물이 떠오른다/ 환하게 쏟아지던 웃음도 스친다/ 책 안에서 마음속으로 흘러넘치던/ 요석과 원효의 사랑을 생각한다/ 군데군데 네모난 별인 듯/ 아직 잠들지 않은 창문이 따뜻하다
점점 깊어가는 시간 속으로/ 다른 이의 모습이 하나 둘 사라지면/ 짙게 덧입혀진 공간 속으로/ 잔잔해지는 감성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오롯이 나만을 돌아보는 고요의 순간/ 새벽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오늘이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오늘/ 어제가 아님에도 어제를 바라보게 하는/ 누군가의 끝이며 시작이 되는 새벽은/ 새로운 오늘을 건네며 나를 깨운다’
‘영원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현재로구나. 깨어 있는 현재만이 영원이구나.’(p283)
늘 깨어있는 사람이고 싶다. 과거만을 돌아보며 지나간 시간만을 붙들고 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 않다. 나의 생각이 언제나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기를.
‘너도 꽃이고, 나도 꽃이고, 모두가 꽃처럼 아름다운 존재’‘모두가 자신 안의 부처를 발견하고 꽃피워야 한다.’는 원효의 사상을 접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정지원 시, 안치환 노래)도 가사를 음미하며 다시 한 번 들어보았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 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음-- //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3년 전에 지었던 어설픈 시도 찾아보게 되었다.
‘너희는 모두 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봄/ 노릇노릇 점을 찍는 개나리/ 쨍쨍한 여름/ 햇살을 향해 생명을 뿜어내는 신록/ 바람 부는 늦가을/ 서리 속에서 고고한 국화/ 새하얀 겨울/ 눈 이불을 덮고 있는 동백꽃이다// 누군가에게 부드러운 휴식을 주며/ 당당하게 하늘을 마주하고 누워있는 잔디/ 물고기를 자유롭게 팔딱거리게 하며/ 연못 위에 둥둥 떠 있는 개구리밥/ 장난꾸러기 성호의 코를/ 살랑살랑 간지럽히는 강아지풀이다// 세상 모든 꽃이 한순간에 피어난다면/ 얼마나 어지러운 현란함이 될 것인가/ 세상 모든 꽃이 한순간에 져버린다면/ 얼마나 삭막한 쓸쓸함이 될 것인가// 따스한 햇살의 속삭임에 깨어나는 꽃/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내는 꽃/ 반가운 단비를 흠뻑 맞으며 고개를 내미는 꽃/ 저마다 피어나는 시기가 다를 뿐이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면/ 그 끄트머리에서는/ 눈부신 생명력이 서서히 움튼다// 너희는 모두 꽃이다// 세상에 이름 없는 잡초가 어디 있나/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지/ 세상에 의미 없는 꽃이 어디 있나/ 그 의미를 보지 못하는 마음만이 있을 뿐이지// 너희는 모두 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피어나려는’
초반에는 신라의 골품제도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가 부족해서 신분에 대한 용어를 찾아보느라 읽는 걸음이 더뎠다. ‘골.품’이라는 말이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골제(성골, 진골)와 귀족과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두품’제를 합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학창 시절에 무조건 암기만 했던 용어였건만. 역시 스스로 알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의미 있는 공부이다.
당시의 역사적인 사건들과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김춘추’나 ‘선덕여왕’이라는 역사적 인물도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없어진 신분 제도가 과연 없어졌다고 볼 수 있는가 생각도 해보았다. ‘역사’라는 것이 ‘가진 자’의 주관적인 기록임을 새삼 절감하였다.
『발원』은 소설이다.‘원효’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역사적인 지식은‘해골 물’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 얼핏 주워들은 얕은 풍월로 요석 공주와 연관 검색어로 뜨는 스님이라는 것, 하지만 그 공주와 뭐를 했는지는 별 관심이 없던 인물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소설이라는 장르가 나타내는 특성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한 사람을 중심으로 묘사된 글은 사랑에 대해서, 내 자신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얻게 된 마음의 울림은 ‘원효’에 대한 접근이 얼마나 사실적이었냐 여부를 의미 없게 만든다.
원효(元曉). 으뜸 원, 새벽 효. 새벽까지 이어진 독서에서 이 책이야말로 새벽에 읽기에 적당한 책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점이 좋았다.
‘길을 만들 수 있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는지요, 길이란 게 어차피 본래부터 있던 건 아니니까요.’(p336~337)
다른 사람을 생각 없이 따라가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가고 싶다.
‘발원'. 책의 제목이 내게 묻는다. 네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혜공 스님이 원효에게 했다는 말도 생각난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게냐, 너를 바꾸고 싶은 게냐?’(p334)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바로 답을 하기에 어려운 질문이다. 일단 나는 나를 바꾸고 싶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기에는 뭔가 아쉽다. 존재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넘어 세상에 내가 태어난 이유가 한 가지쯤은 더 있을 것 같기에. 그렇다고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너무 묵직하다. 그저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스스로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작은 도화선 같은 계기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다, 이 책이 내게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