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숲에서 길을 찾다 - 농부 시인 봄날샘과 산골 아이들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12
서정홍 엮음, 산골 아이들 시감상 / 단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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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었고?” 친정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들려오는 첫마디이다. <밥 문나>를 읽은 순간, 엄마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좀 더 젊었을 때에는 이 질문이 얼마나 식상해보였던지.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아이도 아닌데 매번 물으신다며 참 싱거우시다 했다. 그런데, 갈수록 밥이 소중해진다. 밥이 감사하고 밥을 물어보는 순간이 행복해진다. 소박하고 따뜻한 여러 편의 시 중에서 <밥 문나>가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다.

 

이 책에는 봄날 샘으로 불리는 농부 시인이 지은 67편의 시와 그 시를 읽고 느낀 11명 산골 아이들의 짧은 글이 담겨있다. 식구, 동무들, 목숨, 생태, 더불어 사는 삶, 농부, 농사를 그려낸 정겨운 시와 이에 못지않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솔직 담백한 감상평이 조화롭다. 각각의 콜라보는 때론 유쾌하게 때론 먹먹한 느낌으로 가슴 한 복판을 조용히 두드린다. 초등학생은 초등학생대로, 19세는 그 나이에 걸 맞는 시각으로 자신과 사람들과 세상을 돌아보고 문장으로 표현한다.

 

<겨울 문턱에서>를 읽은 고2 민호는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드리지 못한 자신을 반성한다. ‘아버지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p23) 라 말하는 마음이 울컥하고 대견스럽다. 민호를 바라보며 고2 때의 나를 떠올린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다니시느라 고생하셨던 그때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후회는 늘 시간을 지난 후에 따라오는가. 좀 더 도와드렸더라면 좋았을걸. 불현듯 아쉬움이 올라온다.

농사를 짓고 생명과 더불어 사는 시는 자연스레 생명과 밥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를 생각한다. 작은 생명에게조차 저절로 머리를 숙이는 <아내는 언제나 한 수 위>.

넉넉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차이>는 김혜진의 소설 어비에 실린 단편 <치킨 런>를 연상시킨다. 죽기보다 살기가 두려운 사람들.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이 아리다.

<손금을 보면서>에서는 여러 갈래로 나 있는 손금을 사람이 사는 길도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p122)라 표현한 시인의 발상이 놀랍다. 손금을 고작 잎맥으로나 비유하며 아이들에게 말하는 나를 본다. 같은 손바닥을 보면서도 이렇게나 차이가 나다니! 표현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임을 절감한다.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를 묻어주면서 좋은 일을 한 거 같았는데 오히려 죄책감이 들었다.’(p79)는 민호, ‘친구들에게 따뜻함을 주는 친구를 인간 난로’(p81)라 표현한 경락이, ‘잘난 것들보다 못난 것들에게 눈길을 주는 시인의 체온은 몇 도쯤 되는 걸까’(p89) 궁금해 하는 심정이, ‘어른들한테 꼭 배워야만 하는 것은 어른들처럼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p91)이라 하신 봄날 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시가 나를 부끄럽게 하고 불편하게 한다.’(p173)고 말하는 기범이, ‘시가 길이 되고 위로가 된다.’(p123)는 수연이는 시인 못지않게 시를 쓰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나와 함께 모든 것이>에 나온 나와 살던 모든 것이 / 나와 함께 늙어가나니’(p130)라는 문장은 깊은 중년으로 향해가는 나에게 토닥토닥 위로의 말이 되었다. 햇볕이 잘 드는 시골길을 천천히 걷는 듯했다. 함께 하는 내내 느린 화면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갓 지은 밥을 입 안에 넣고 꼭꼭 씹어 먹는 기분이었다. 세상을 바라본 시인은 그 마음을 시로 표현하고, 그 시를 바라본 아이들은 그 마음을 감상평으로 표현하고, 그 글들을 바라본 나는 그 마음을 또 다른 글로 표현하니, 도미노처럼 마음이 전달되면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마자 엄마께 전화를 걸었다. “엄마! 그냥 했어요.” 싱겁게 웃으며 말을 꺼내니, “밥은 먹었고?” 오래도록 듣고 싶은 소중하고 찡한 말이 귓가로 느리게 흘러들어왔다.

 

 

*오타

p150, <이름 짓기>12행에서

아침부터 아침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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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0-21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수록 혼자 사려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정말 가족 없는 1인 시대가 된다면 ‘밥 묵고 다니냐?’라는 사소한 말 한 마디 나누면서 전화 통화하는 모습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암울한 상상을 해봅니다.

나비종 2016-10-22 06:10   좋아요 0 | URL
이어폰을 꽂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만의 세상을 생각합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혼자 있는 것 같은. 세상의 소리보다 스스로 선택한 소리를 듣고 싶은 거겠죠.
저 역시 자주 그러고 다니지만^^; 갈수록 대화없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아 삭막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뭐라도 되겠지 - 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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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불이 있다. 10여 년 전 생일 선물로 받았던 이불이다. 맨질맨질한 표면과 피부에 닿는 부드러운 면의 감촉에 보는 순간 마음에 쏙 들었다. 여름에는 보송보송한 느낌에 좋았고, 겨울에는 내 체온이 고스란히 맴돌아 보온병 안에 들어앉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10년이라는 기간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여름이나 겨울이나 줄곧 덮어대니 어느덧 너덜너덜해졌다. 가장자리가 터져 솜이 삐져나온 부분을 꿰매고, 중간에 타진 곳을 또 기워 이제는 보수의 한계를 넘어서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덮고 싶은 이불이다. 뭐라도 되겠지가 딱 이 느낌이다. 포근하고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이불처럼 책을 읽는 내내, 읽고 난 후에도 여운처럼 남아있는 온기가 마음을 감싸준다.

 

사람의 일상이란 그게 그거라는 생각에 한동안 수필을 멀리 했다. 내 삶을 돌아보기에도 벅찬 시간을 굳이 남의 넋두리나 자랑 질을 구경하는 데에 쏟고 싶지 않았는데 이 책은 달랐다. 통통 튀는 간결한 문체가 꿍얼꿍얼 괄호 안에 적힌 문구와 잘 버무려져 있다. 각주까지도 매력적인, 한 마디로 웃긴 책이다. 차례부터 일반적인 체계를 벗어나더니 352페이지의 제법 두꺼운 분량의 책장이 만화책을 읽듯 술술 넘어간다. 하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삶과 사람과 세상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있다. 쉬는 코너처럼 끼어있는, 작가가 직접 그린 발명가 김씨의 카툰은 생크림 케이크에 놓인 미니사과처럼 상큼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낼까. 기발한 아이디어에 절로 마음이 환해진다.

 

요즘 보는 드라마 <판타스틱>에는 암에 걸린 여주인공과 역시 암에 걸린 그녀의 주치의가 등장한다. 겉에서 보기에는 우울한 분위기에 눈물만 질질 짤 것 같은데 예상외로 유쾌하다. 죽음에도 준비가 필요함을, 삶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의미 있는 드라마이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글 중에서 삶에 대한 문장이 유달리 마음에 들어온다. 소제목 <낭비해도 괜찮아>는 소설쓰기에 있어 선택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데, 삶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소설 속의 선택과 현실 속의 선택은 분명 다르지만 선택하기 위해 결정하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버린 것은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취한 것은 아껴 써야 한다.(p40)’

소설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다. 삶이란 것도, 나를 주인공으로 인물만 주어지고, 사건과 배경은 끊임없는 선택의 결과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배경은 있지만, 본인의 의지에 따라 환경 역시 변화를 시킬 수 있으니.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인생을 써내려가는 소설가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을 포기하는가의 문제다. 선택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포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p103)’

포기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무언가를 선택을 해놓고 그 절실한 결과물의 소중함을 등한시하고, 버린 것이 못내 아쉬워 자꾸만 돌아본 순간이 많았다. 어정쩡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까.

죽음을 앞둔 주인공에게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조차 너무나 소중하다. 소중함이란 이렇게 별거 아닌 것 같은 작은 순간에도 담겨있음을. ‘, , ㄷ …’10칸 공책에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 글씨 쓰던 정성스런 시간도 있었건만, 언제부터 삶을 헐렁하게 듬성듬성 보내게 되었을까.

작은 스티커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수백만 명의 마음을 뒤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건은 스티커처럼 작은 공간에서 시작되는 법이다.(p65)’

얼마 전, 강연에서 들었던 말처럼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는 것을. 작은 순간도 작은 마음도 작고 소외된 사람들도 외면하지 않고 소중한 감동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기를 스스로에게 바란다.

 

작가는 뭐라도 되겠지라는 제목이 체념처럼 들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내게는 그럴 염려가 없었다. 제목만으로 충분한 위안이 되었다.

웅크린 사람은, 뛰려는 사람이다.(p18)’

이 짧은 문장에 왜 그리 울컥했던지. 가장 감동을 받았던 문장이다. 따뜻한 책이었다. 쌀쌀한 거리를 홀로 걷는 기분이 들었을 때, 시도한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우울했을 때,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로 마음이 복잡했을 때, 쏟아지는 일거리를 감당하기 버거웠을 때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내 삶의 순간들을 책장 켜켜이 끼워 넣으며 읽다보니, 몸만큼이나 마음이 지쳤던 내게 빈티지 이불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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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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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글씨일까. 며칠 동안 책표지만 바라보았다. ‘’? 아니다. 한글이라 하기엔 오른쪽의 획이 다소 어색하다. ‘’? 이번에는 왼쪽 획이 짧고 경사가 심하다. ‘’? 그나마 이 한자가 제일 비슷한데, ‘작을 소가 책의 내용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는다.

한 번 더 책을 읽어본다. 이번에는 3명의 주인공으로 구성된 팀 이름 알렙이 눈에 들어온다. 실제로 있는 이름일까. 검색해본다. 한글로 검색하고, 알파벳으로 검색하면서 드디어 며칠 동안 안고 있던 궁금증이 풀린다. ‘aleph(알레프)’.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자, 숫자로는 1에 해당하는 글자란다. 이 발견이 뭐라고! 은근히 뿌듯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답답함이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이 글씨가 책의 내용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한 번 더 책을 읽어야했다. 세 번째 읽고 나서야 글씨가 상징하는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하게 된다.

 

독일 나치스 정권의 요제프 괴벨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 다가왔던 오묘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인간의 의지가 과연 조작하는 대로 움직여질 정도로 나약할까.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로 행동했다 하기에는 비인간적인 기록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한꺼번에 움직였던 거대한 군중의 힘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바보스럽게 각인된 채로 내 관심에서 잊혀졌다.

세 편의 영상을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다른 자료를 검색하다 알게 된 사회과학 실험이었다. 나치에 의해 움직였던 이들이 바보스러웠던 것도 아니고, 나약한 의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중을 교묘하게 움직이는 상황의 힘은 섬뜩한 전율로 다가왔다.

첫 번째는 <환상적인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지식채널e를 통해 방영된 영상이다. 미국의 고등학교 교사 존 론스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세 번째 물결이라는 실험이다. 10%의 나치로 홀로코스트를 일으킬 수 있었던 집단의 힘을 보여준다. 어딘가 소속되고 싶은 본능과 그 속에서 찾게 되는 안정감을 이용한 무서운 힘이다.

두 번째는 <상황의 힘>이라는 소제목으로 EBS <인간의 두 얼굴>에 소개되었다. 1971, 스탠포드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가 실시한 가짜 교도소 실험이다. 교도관과 수감자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인간의 행동이 얼마나 상황의 지배를 받는지 알아보는 내용이었는데, 6일 만에 실험을 중단했다고 한다. 권위에 쉽게 무너지고 상황에 지배되는 인간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세 번째는 <3의 법칙>과 관련된 실험이다.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한다. 역시 지나치는 사람들은 반응이 없다. 세 사람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그제야 지나가던 사람들이 세 사람의 행동에 반응을 보이며 하늘을 바라본다는 내용이다. 세 명으로부터 출발되어 집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은 2세대 댓글부대 시대의 시작을 보여주는 인터넷 심리전에 관한 소설이다. 작가가 차례에 적힌 문장을 언급하면서 요제프 괴벨스를 말한 순간, 예전에 보았던 세 편의 영상들이 바느질을 하듯 차례로 꿰어지며 떠올랐다. ‘부대전쟁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이제는 빛의 속도로 달리는 댓글들이 예리한 칼날이 되어 인간의 마음을 공격하는 시대이다. 그 댓글들은 ‘3의 법칙에 따라 의도를 품고 접근하는 3명에 의해 적절한 순간에 조작된다. 그리고 움직여진 대중은 묵직한 파도가 된다.

모두 가슴에 단도 한 자루씩 숨기고 있다가 기회만 생기면 팍! 그런데 저희들은 언제 사람들이 미쳐서 그 칼을 휘두르는지 그 타이밍을 알아낸 거죠. (중략) 그게 언제인데요? 자기가 다수가 됐을 때요. (중략) 비아냥거리는 댓글이 세 개만 연속으로 달리면 돼요.’(p77~78)

바닷물 싱겁게 만들겠다고 물을 퍼부을 수는 없어. 백만 명, 2배만 명을 한꺼번에 움직여야 해.’(p159)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걸 건드려야 해. 두려움과 죄의식. 백만 명, 이백만 명을 한꺼번에 공략하는 방법은 그것뿐이야.’(p164)

 

첫 번째 읽었을 때에는 오아시스처럼 군데군데 심어져있는 야한 장면이 집중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침을 꿀꺽이며 하이틴 로맨스를 몰래 읽는 청소년처럼 숨을 죽였다. 당최 뭐가 빠르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땀 한 땀 박음질을 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오아시스만 바라본 나는.

상당히 빠른 소설이라는 것은 두 번째 읽었을 때 알게 되었다. 이제는 스르륵 움직여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나타나는 사막의 사구가 보였다. 가까이서 본 모래 알갱이의 미세한 움직임은 숨 막힐 듯 긴박했다. 임상진과 찻탓캇의 인터뷰 내용과 적절하게 어우러진 이야기의 흐름은 현실감을 주는 상황과 버무려져 속도감 있게 흘러갔다. 치밀하면서도 깔끔했다.

세 번째는 다시 느리게 읽혔다. 아니, 느리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촘촘하고 묵직했다고나 할까. 그 사이로 영화 <베테랑>이 주던 시원함이 느껴졌다. 장면의 구성과 배치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악의 무리를 무찌르는 통쾌함이 아니라 전율이 일만큼 적나라하게 투영된 현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후련함이었다. 소설로 포장된 다큐 느낌이랄까.

 

인터넷 뉴스나 알라딘 서재에 올라온 글을 읽을 때, 본문만큼 댓글에도 관심을 가진다. 그런데 은밀하게 숨어있는 메시지에 의해 나의 의지가 조작된 방향으로 흐를 지도 모른다니! 순간 소름이 돋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n분의 1의 댓글로 무수하게 매달리는 이들도, 그로 인해 삶 전체가 흔들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글로 인해 상처를 받는 시대라니! 세 번째로 읽었을 때, ‘aleph’를 바라보며 소설 <주홍 글씨>에 나오는 ‘A’를 떠올렸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댓글처럼, 현실에서 올리는 수많은 댓글이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투명한 주홍 글씨로 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무서워졌다. 댓글은 무거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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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30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도 폐쇄적인 성향이 있어서 어떻게 보면 우물 같은 공간이 될 수 있어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문제가 `친목질`입니다. 서로 친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경향이 심해지면, 소수의 의견이 무시당합니다. 그리고 서로 상반된 의견이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편을 갈라서 행동할 수도 있어요. 이런 상황을 노리는 사람들이 더 무서워요. 갈등을 부추기면서 자신은 슬그머니 빠져 나와서 구경해요.

나비종 2016-09-30 20:16   좋아요 1 | URL
이 소설에서도 그런 상황들이 등장합니다. 여러 사례에서 어찌나 절묘한 타이밍을 포착해서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자극하던지 몇 번이나 감탄하면서 읽었어요.
다름과 틀림을 명확히 구분하고, 말을 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알며,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더 깊고 넓은 내공을 쌓아야겠죠? 언제쯤 그런 날이 올까요?^^;

cyrus 2016-10-1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종님, 리뷰대회 당선 축하합니다. ^^

나비종 2016-10-19 12: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cyrus님도 2배로 축하드립니다ㅎㅎ
 
어비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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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눗방울 같기도 하고, 풍선 같기도 한 파스텔 톤의 색깔이 예뻤다. 책 표지를 보고 내용을 상상해 보았을 때, 동화적인 분위기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만 같았다. 책 표지를 유심히 잘 살펴보는 편이다. 표지의 그림이 내용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책을 읽고 다시 표지를 바라본다. 이번에도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표지의 색에 끌려 드러난 핵심 내용을 미처 보지 못했을 뿐.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풍선 사이에 끼어있다. 오도 가도 못하고 질식할 것처럼 갑갑해 보인다. 동영상 촬영 중인데 배터리는 이제 한 칸 밖에 남지 않았다. 책 안에 담긴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삶은 계속 흘러가는데, 그 삶을 감당할 에너지는 거의 바닥이 난 사람처럼.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소설이다.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향하고 있는 주제는 일과 삶이다.

등장인물들이 하고 있는 일은 비정규직 노동자, 인터넷 방송 진행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통신 회사 상담원, 치킨 배달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 광장에서 물건 파는 사람 등이다. 주류보다는 비주류에 속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 절반도 훨씬 넘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차라리 이것이 주류라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삶은 위태위태하고 암울하다. 구질구질하고 앞으로 연장한다고 해도 희망조차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막막한 기분을 자아낸다. 살아야할 이유보다 죽어야 할 이유가 더 많은 전 재산 50만원을 가진 자살시도자, 교황이 방문한 광장에서 눈에 띄지 않게 소외되는 사람들, 공중에 매달린 채 삶을 외치며 투쟁하는 사람들, 지진으로 가족을 잃고 한국으로 온 베트남인의 삶은 도시의 빛나는 조명 아래 드리워진 배경처럼 어둡기만 하다.

그 중 <아웃포커스>라는 단편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단순명료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제목이다. 20년간 일한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무더위 속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엄마의 삶은 단편 소설의 제목처럼 <아웃포커스>되어 있다. 그림자처럼 드리워지고, 도려내지고, 외면당하고 있는 삶의 모습에 읽는 내내 답답하고 마음이 아팠다.

 

유쾌하지 않은 책을 읽으면 한동안 그 분위기에 빠져 우울해진다. 어느 드라마 주인공의 멘트처럼 로코 로코 멜로 멜로한 이야기, 밝고 유쾌한 내용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일이다. 소설이지만 다큐임이 분명한 삶들이 후텁지근한 더위처럼 마음에 훅 끼얹어져 짜증이 났다. 한숨 끝에 살짝 지겹다는 생각도 하다가 <광장 근처>에 나온 문장을 보고 가슴이 덜컹했다. ‘보고 계속 보고 또 보다 보면 결국엔 보나마나가 되고 나중엔 아예 안 보이게 된다는 건 그가 거기서 지겹도록 봐온 거였다.’(p149) 이런 삶의 장면에 대해 처음보다 무감각해진 나를 돌아보았다. 책을 통해 혹은 현실에서 주변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을 보고, 또 보고 하다 나중에는 외면하는 인간이 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다 그들이 안 보이게 될까봐 또 두려웠다. 그래도, 우울해져도 이렇게 무거워져도 봐야한다. 계속 보고, 또 보다 보면 아웃포커스 된 누군가의 삶에서 한 귀퉁이의 무게라도 덜어줄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 테니까. 보고 또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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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 코 소년 -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어느 소년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 둘레책방 1
로버트 호지 지음, 안진희 옮김 / 노란상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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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걸었다. 발바닥과 발가락에서 느껴지는 바닥의 감촉이 오늘따라 생경하다. 거울을 본다. 두 눈, , 입을 바라본다. 점이 있다며 투덜거리고 입술이 두껍다고 불만이던 20대의 철없음이 생각난다. 괜히 부끄러워진다.

 

로버트 호지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임신 사실을 모르던 어머니가 복용한 우울증 약 때문에 장애를 갖고 태어난 저자. 출생에서 현재까지의 성장 과정이 담담하게 담겨있다. 양 다리를 절단했기에 의족 두 개로 생활하며, 잘라낸 발가락으로 코를 만들어야 했던 소년. 입장 바꿔 상상조차 어려운 상황임에도 결코 어둡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과 주변을 바라본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정갈해진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당당하고 치열하게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그 앞에서 드는 생각은 보다 복잡하다.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들면서 톨스토이의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제목을 떠올린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그의 현재와 과거, 어쩌면 미래의 삶까지 보여줄 때가 있다. 찡그리거나 웃음 짓는 표정으로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 같은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보다 못생겼다. 또 자신의 생각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흉터가 있다.(p252)’

마지막에 나온 저자의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한 눈에 보기에도 평범함과 거리가 먼 얼굴인데 자꾸 시선이 간다. 못생겼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장애가 있는 부분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한 채 미소 짓는 표정은 맑고 편안하다. 표정 뒤에 담겨있을 많은 이야기들이, 책에 미처 담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들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이러한 것들에도 불구하고지금의 내가 된 게 아니다. 나의 못생긴 외모와 내가 가진 장애 때문에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p252~253)’

자신만의 흉터를 비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힘껏 껴안은 당당한 용기가 뭉클하다.

 

현재를 돌아본다. 멀쩡한 두 다리를 두고 가끔 엘리베이터나 차로 꾀를 부렸던 나태함을 반성한다. 거울로 얼굴을 본다. 평범한 얼굴이다. 점점 눈가 주름만 늘어간다며 한숨 쉬던 때가 생각난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인간의 DNA를 가졌다면 누구에게나 당연한 신체 구조가 어떤 이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평범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이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음을. 평범하게 걷는 것이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어 판화를 찍듯 선명하고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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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서 거동이 잠시 불편할 때 농담으로 ‘장애인’ 같다고 하는데, 이건 장애인들에게 모욕 주는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도 있어요. 제가 초딩 때 이런 농담을 많이 했어요. 멀쩡한 신체로 움직일 수 있는 것에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나비종 2016-09-04 14:44   좋아요 0 | URL
어린이 독서모임을 위해 읽은 책입니다. 초딩용 도서는 시와 비슷해요. 짧고 단순해보이는데 어른이 읽으면 많은 생각을 안겨줍니다.
멀쩡한 몸, 감사하죠. 공기 중에 있는 산소의 존재처럼 종종 당연히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