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되겠지 - 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된 이불이 있다. 10여 년 전 생일 선물로 받았던 이불이다. 맨질맨질한 표면과 피부에 닿는 부드러운 면의 감촉에 보는 순간 마음에 쏙 들었다. 여름에는 보송보송한 느낌에 좋았고, 겨울에는 내 체온이 고스란히 맴돌아 보온병 안에 들어앉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10년이라는 기간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여름이나 겨울이나 줄곧 덮어대니 어느덧 너덜너덜해졌다. 가장자리가 터져 솜이 삐져나온 부분을 꿰매고, 중간에 타진 곳을 또 기워 이제는 보수의 한계를 넘어서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덮고 싶은 이불이다. 뭐라도 되겠지가 딱 이 느낌이다. 포근하고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이불처럼 책을 읽는 내내, 읽고 난 후에도 여운처럼 남아있는 온기가 마음을 감싸준다.

 

사람의 일상이란 그게 그거라는 생각에 한동안 수필을 멀리 했다. 내 삶을 돌아보기에도 벅찬 시간을 굳이 남의 넋두리나 자랑 질을 구경하는 데에 쏟고 싶지 않았는데 이 책은 달랐다. 통통 튀는 간결한 문체가 꿍얼꿍얼 괄호 안에 적힌 문구와 잘 버무려져 있다. 각주까지도 매력적인, 한 마디로 웃긴 책이다. 차례부터 일반적인 체계를 벗어나더니 352페이지의 제법 두꺼운 분량의 책장이 만화책을 읽듯 술술 넘어간다. 하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삶과 사람과 세상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있다. 쉬는 코너처럼 끼어있는, 작가가 직접 그린 발명가 김씨의 카툰은 생크림 케이크에 놓인 미니사과처럼 상큼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낼까. 기발한 아이디어에 절로 마음이 환해진다.

 

요즘 보는 드라마 <판타스틱>에는 암에 걸린 여주인공과 역시 암에 걸린 그녀의 주치의가 등장한다. 겉에서 보기에는 우울한 분위기에 눈물만 질질 짤 것 같은데 예상외로 유쾌하다. 죽음에도 준비가 필요함을, 삶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의미 있는 드라마이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글 중에서 삶에 대한 문장이 유달리 마음에 들어온다. 소제목 <낭비해도 괜찮아>는 소설쓰기에 있어 선택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데, 삶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소설 속의 선택과 현실 속의 선택은 분명 다르지만 선택하기 위해 결정하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버린 것은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취한 것은 아껴 써야 한다.(p40)’

소설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다. 삶이란 것도, 나를 주인공으로 인물만 주어지고, 사건과 배경은 끊임없는 선택의 결과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배경은 있지만, 본인의 의지에 따라 환경 역시 변화를 시킬 수 있으니.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인생을 써내려가는 소설가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을 포기하는가의 문제다. 선택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포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p103)’

포기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무언가를 선택을 해놓고 그 절실한 결과물의 소중함을 등한시하고, 버린 것이 못내 아쉬워 자꾸만 돌아본 순간이 많았다. 어정쩡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까.

죽음을 앞둔 주인공에게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조차 너무나 소중하다. 소중함이란 이렇게 별거 아닌 것 같은 작은 순간에도 담겨있음을. ‘, , ㄷ …’10칸 공책에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 글씨 쓰던 정성스런 시간도 있었건만, 언제부터 삶을 헐렁하게 듬성듬성 보내게 되었을까.

작은 스티커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수백만 명의 마음을 뒤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건은 스티커처럼 작은 공간에서 시작되는 법이다.(p65)’

얼마 전, 강연에서 들었던 말처럼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는 것을. 작은 순간도 작은 마음도 작고 소외된 사람들도 외면하지 않고 소중한 감동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기를 스스로에게 바란다.

 

작가는 뭐라도 되겠지라는 제목이 체념처럼 들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내게는 그럴 염려가 없었다. 제목만으로 충분한 위안이 되었다.

웅크린 사람은, 뛰려는 사람이다.(p18)’

이 짧은 문장에 왜 그리 울컥했던지. 가장 감동을 받았던 문장이다. 따뜻한 책이었다. 쌀쌀한 거리를 홀로 걷는 기분이 들었을 때, 시도한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우울했을 때,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로 마음이 복잡했을 때, 쏟아지는 일거리를 감당하기 버거웠을 때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내 삶의 순간들을 책장 켜켜이 끼워 넣으며 읽다보니, 몸만큼이나 마음이 지쳤던 내게 빈티지 이불이 되어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