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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지옥일 때
이명수 지음, 고원태 그림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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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렁 마음이 내려앉았다. 아이가 작성한 문장 완성 검사지를 우연히 보게 된 날이었다. 몇 개의 미완성된 문장에 대한 답변이 이토록 선명하게 심리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나온 엄마의 회색빛 시간들에 푹 적셔진 아이. 짧고 무심한 문장이 바늘인 듯 마음을 찔렀다.

직장일과 육아와 끊임없이 밀려드는 가사에 날마다 피곤했지만,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핸드폰 주소록을 아무리 뒤져도 선뜻 버튼을 누를 수 없던 외로움이었다. 주변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던 엄마를 아이는 어떤 눈망울로 바라보고 있던 걸까.프롤로그에서 문장 완성 검사에 얽힌 일화를 보며 그 때를 떠올렸다. 지나왔다기보다는 견뎌왔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간들. 책 제목과 자연스레 겹쳐지던 시기였다.

 

내 마음이 지옥일 때라니! 매일 매일이 아득한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한 제목인가. 정열적인 붉은 표지가 책을 만든 이의 심장인 듯 그 안에 담겨있을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제목만으로 위안이 되는 책이 있다. 이런 부류의 책을 읽기 전에는 긴장감이 앞선다. 간혹 제목만 번드르르하고 저자 혼자 떠들고 끝나버리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괜히 읽었다 마음에 더욱 커다란 구멍이 뚫린 적도 있었기에. 기대만큼의 내용이 담겨있는 책은 비교적 드물었다. 내용이 제목을 탄탄하게 뒷받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별 기대감 없이 첫 장을 펼쳤다.

 

짧은 문장 하나가 많은 내용을 포함할 때가 있다. ‘나는 가진 게 많다.’(p5)라는 첫 문장은 작은 충격이었다. ‘첫 문장의 중요성을 다룬 내가 사랑한 첫 문장(윤성근, 2015.7.)이 생각났다. 이토록 자신감 있게 가진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매력적인 첫 문장에 앞으로 나올 내용들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99칸의 방을 가졌어도 100칸을 채우고 싶어 1칸을 욕심 부리는 마음이 일반적이건만, 그가 가졌다는 무언가가 단순히 물질의 많고 적음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시간들을 지나와야 이런 마음에 이를 수 있을까.

 

이 책에는 82편의 시가 16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담겨있다. 주제별로는 5편 내외의 시가 소개된다. 저자는 시가 뿜어내는 치유적 공기에 매료됐다.’(p8)라 말한다. 그런 말을 하는 저자를 보며, 시를 해석하며 저자가 뿜어내는 치유력 또한 상당하다고 느낀다. 시를 음미하며, 저자의 생각을 음미하며, 부드럽고 포근한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시간 사이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토닥토닥, 토닥토닥. 소박하고 따스한 문장에 때론 울컥해하면서.

 

무엇보다 매력적이던 내용은 등장하는 많은 문장들이 하나같이 내 자신을 긍정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당신은 원래 스스로의 다리로 걸었던 사람이다.’(p72~73), ‘자기 몸과 마음이 기운 쪽으로만 움직이면 절대 안전해요.’(p75, <영웅>, 이원),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건/ 지금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나를 보호하고 다독여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야.’(p77)

종종 등장하는 옳다라는 문장은 사소한 망설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누군가의 꼭 한 사람이 되어주는 일은 언제나 옳다.’(p53~54), ‘내가 그렇게 선택한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필요해서다. 그러므로 모든 나의 끌림은 늘 옳다.’(p54)

 

힘들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소리 지르지 못하는 깊은 물이/ 어쩌면 더 처절한 비명인지도 몰라.’(p216, <아름다운 비명>, 박선희) 이불을 꿰맨 후 뒤집어서 구석에 접혀있던 귀퉁이를 빼듯이 마음 한 구석에 고여 있던 아픔이 후련하게 빠져나갔다. '얼었다 녹았다 겨울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p30, <겨울 풍경>, 박남준)란 문장도, 시 <살다가 보면>(p38, 이근배)도 위로가 되었다. 시인의 주는 공감의 힘이었다.

나희덕 시인의 <산속에서>를 읽고는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p84)이란 문장에서 시가 지닌 치유의 힘을 생각했다. ‘치유란 동굴 속에 숨은 사람을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그의 옆에서 어둠을 함께 감내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그가 동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된다.’(p311) 시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관통한 느낌을 문장으로 옮겨 담으며 나도 그래, 나도 그런 적 있어라 말하고 있었다.

 

<업어준다는 것>(p56~57, 박서영)은 다른 이들의 영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토닥일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에필로그제목 역시 인상적이었다. ‘함께, 충분히 기다려줄 것!’(p310) 다른 이를 대하는 자세일 수도 있고 스스로에게 거울처럼 되뇌어도 충분한 문장이다. 딸아이가 생각났다. 어쩌면 아이는 엄마와 함께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엄마를 충분히 기다려준 것은 아니었을까. 배려심이 깊고 어느 순간 단단한 심지를 지니게 된 아이. 아이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훌쩍 자라버린 22세의 딸. 내게 가장 힘이 되어 준 문장은 그토록 어려운 시간들을 함께 걸어와 준 나의 아이였다.

 

책표지를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강렬하게 보였던 색채가 주던 첫인상이 살짝 달라져있다. 따스하고 은은하다. 언젠가 시골에 가서 샀던 스카프가 연상된다. 천연 염료로 염색한 부드러운 거즈 같은 헝겊. 반짝이지 않아도 소박하고도 결 고운 느낌에 목에 두르면 은은한 따스함이 전해져오는 느낌에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캐롤 키드의 <When I Dream>처럼 그런 따스함이 뭉클한 책이다, 이 책은.

 

 

오타

p123, 웃다가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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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담 -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
박균호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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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 뚜 둥 뚱 띵 띠 딩 띵~ 그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피아노 밖에 없는 줄 알던 내게 가야금으로 울려 퍼지던 <Canon>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곰곰 생각하면 얼마나 고지식했던가. 느낌이야 비루하겠지만 첫눈처럼 그 놈에게 가겠다며 나도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을. 어떤 악기로든 그 음악을 연주하면 그만인 거다. 집요하게 인터넷을 뒤졌다. 단순한 주제에 입혀진 변화 자체로도 매력적인 곡이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플루트, 오보에, 색소폰에 이르기까지 여러 악기로 울리면서 미술에서의 20색상환을 보는 듯 달라졌다. 이토록 많은 악기로 연주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웠던 건 각각의 연주가 갖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캐논변주곡을 떠올렸다. 조금씩 변주되는 일상은 다양한 책을 소개하는 연결고리가 되어 통통 튀는 음악처럼 마음을 두드렸다.

 

1장은 책 수집과 서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의 책꽂이는 매혹적인 굿즈에 부록으로 딸려오는 책으로 주로 채워진다. 알라딘 중고 매장의 경이로운 가격을 직접 확인한 후로는 중고 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희귀본을 향한 열정의 깊이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학창시절 희귀한 껌 종이 수집을 위해 엄청나게 껌을 씹어댔던 마음과 비슷할까. 절판본 확보를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 속에서 생소한 책들과 그에 얽힌 일화를 많이 알게 되었다.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 걸맞게 삼면이 책꽂이인 서재라니! 안방의 한 면만 겨우 점령한 나는 거실 TV 주변으로의 영역 확장을 도모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버린 과거가 있다. 집안 곳곳에는 나의 책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명당이 이토록 많건만. 붙박이 신발장도 그렇고, TV를 보기 위해 앉아있는 자리 주변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얼마나 아늑할 건가 말이다. 이중으로 주차된 안방의 책꽂이를 올려다보며 그림의 떡을 보듯 저자의 서재 이야기에 입맛을 다신다.

 

2장에는 주로 아내와의 일상이, 3장에는 친구들, 딸아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담겨있다.

아내와 연결된 애정 어린 일화가 인상적이다. 자칫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을 풀어가는 방식이 경쾌하다. 침침한 장면은 저자를 통과하면서 가벼운 탁구공으로 변신하여 또르르 책을 향해 달려간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런 책 이야기를 끌어낼까 싶을 정도로 엉뚱한 방향이다. 아내와 고기의 결합에서는 어머니, 야구, 부탄, 세계사 이야기가 담긴 책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아내와 밥이 결합되니 위대한 패배자, 마사지법, 지위다툼에 관한 책이 등장한다. 날마다 먹는 밥이지만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이 밥과 얽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책과 연결 짓는 저자의 사유가 유쾌하다.

 

일상과 책 소개가 적절하게 버무려진 글이다. 책을 소개하는 책들이 시중에 많이 출간되지만 완전히 객관적일 수 있는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어차피 기술하는 자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가 펼쳐지듯이, 누가 소개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책으로 소개되기 마련이다. 엄청난 책이라며 각종 언론의 찬사가 쏟아진 책이라도 정작 읽으면 배신감을 느낀 적도, 별로 라는 평에 기대 없이 읽었다가 보물섬을 찾은 경우도 있다. 책 소개에 관한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 성석제, 천명관, 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뇌내혁명,최성애 박사의 행복수업,자식이 뭐라고,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행복한 책읽기,나의 레종 테트르등 읽고 싶은 생각이 들어 메모한 책이 10여 권이나 되니까.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이다. 읽고 나서 괜히 샀다 싶으면 중고 매장으로 냉큼 달려가기 위한 심산이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펜과 연습장을 옆에 둔다. 좋은 문장이나 연상되는 생각을 메모하여 독후감을 쓸 때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다 읽고 보니 책 제목과 작가 이름만 잔뜩 적혀 있다.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 좋은 문장이 있으면 종종 적곤 하는데, 이번에는 단 한 문장도 적지 않았다. 기발한 생각이 무더기로 많았는데, 문장이 괜찮았는데 왜 적지 않았을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이유를 알고는 피식 웃는다. 너무 많았던 거다. 적어도 이 책을 팔지는 않겠구나. 유려한 문장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어휘로 결합된 그의 문장은 본인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빛을 발한다. 흔히 일어나는 일상의 에피소드를 적은 글은 그 상황에서 누구나 생각할 법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생각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표현한다. 점진적인 감정의 변화를 세밀하고 유머러스하게 드러낸 글이 모여 지문과도 같은 저자만의 문체가 된다. 단편 소설을 써도 어울릴 듯싶다.

 

얼핏 지질하게 보일 수 있는 축축한 생각들을 따스한 양지로 끌어올려 봄날 햇살을 받은 것처럼 뽀송뽀송하게 만드는 것. 저자의 글이 가진 힘이다. 독서만담이라는 제목과 어울리게 수필의 향기가 나는 이야기였다. 미소를 지으며 그 향기를 따라가다 내용이 어떨까 궁금해지는 책을 여러 권 만났다. 이야기 자체로도 유쾌한데 좋아하는 책까지 잔뜩 담겨있는 책이라니! 즐거운 음악을 편안하게 감상하고 난 느낌에 행복해졌다.

 

 

p40, 밑에서 두 번째 줄, ” 빠짐

p144, 세 번째 단락, 티켓 사자의 서』→『 티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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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7-03-0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앞뒤 맥락을 이해하지 않았거나, 문해력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쓴 것이 느껴지는 호평과 악평은 모두 ‘저런 분도 있구나‘라는 정도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나비종님의 글은 따뜻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제 책을 칭찬해 주시기도 했지만 이 정도로 제 책을 철저하게 읽었고 사려가 깊은 분이라면 그 어떤 지적이라도 달콤할 것 같아서요.

오타를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판을 찍게 되면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특히 책 제목 오타를 냈군요. 고맙습니다.

리뷰를 읽다보면 대체 이 분들은 왜 책을 안 쓰는거야?라는 감탄이 나올 때가 있어요. 나비종님의 글이 딱 그렇네요. 제목에 변주곡이라는 말이 나와서 내 책이랑 변주곡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했는데요.

아귀가 딱 맞는 비유이시네요. 다만 과찬이라서 제가 좀 민망합니다. 언급하신 책 모두 좋아요.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뇌내혁명>은 당시 베스트셀러였어요. 오래된 베스트셀러라서 ‘이게 뭐야‘라고 지적하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지만(놀랍게도 실제로 있습니다) 좋은 책은 시기의 장단기, 판매여부와는 상관이 없다고 봐요

천년전의 책이건 오늘 나온 책이건 , 1천만권이 팔린 책이건, 수십권이 팔린 책이건 독자에 따라서 명저가 될 수 도 있죠. 읽은 지 20년이 훨씬 넘었지만 저에게 <긍정 마인드>의 중요성을 알려준 인생의 책 중의 하나에요. 리뷰 감동적으로 잘 읽었고 과찬은 질책으로 여기겠습니다. 저보다 글을 잘 쓰시는 것이 확실하니 기회를 봐서 출간하시길....

나비종 2017-03-05 12:09   좋아요 0 | URL
댓글이 거의 없는 황량한 이 공간에 이토록 성의있게 댓글을 달아주시다니요. 댓글을 쓰신 분이 무려 헉! 작가님이라 한 번 놀라고, 리뷰에 대한 리뷰를 쓰신 듯 막대한 분량에 두 번 놀란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ㅎㅎ

함무라비 법전의 원칙을 일상 뿐아니라 글에도 적용하는 편이라 댓글에 대한 댓글도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달아왔습니다. 가령 ‘잘 읽었습니다.‘란 글이 달리면, ‘감사합니다.‘라 적었다가 음, 한 글자가 모자라는군! 하며 ‘감사합니다, 훗!‘이런 식으로요. 어제 저녁, 책에 대한 리뷰를 쓰다 필이 꽂혀서 새벽녁까지 두 눈 시뻘겋게 뜨고 써대는 바람이 이제 겨우 멀쩡한 두 눈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좋은 느낌으로 리뷰를 읽어주셔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책읽는 속도가 느려터져서 읽다보면 다소 세밀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직업의 특성상 앞에 주어진 테이터를 분석하고, 특징을 파악하고,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들끼리 분류하고, 오타를 발견하는 일에 익숙해져있다보니 저도 모르게 치밀해지곤 합니다.^^; 책 제목에 대한 오타 앞에서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사후 세상으로 가는 내용을 소개하신 책이라 티켓으로 입장하는 것처럼 일부러 중간에는 제목을 바꿔쓰신 게 아닌가 하구요. 궁금한 마음에 적어놓았더니 답변을 주시네요.

캐논을 떠올린 이유는 전체적인 느낌 때문입니다. 정황상 분명 같은 사건이었을 것 같은데 조금씩 변화되는 내용과 문장들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거든요.

요즘에는 고전에 관심이 가서 책을 구입할 때 학창시절에 읽지 못했거나 허술하게 읽었던 도서도 함께 구입하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데미안>,<노인과 바다>등 다시 읽고 새로운 느낌을 받고 싶어서요. 좋은 책에 대한 생각이 저와 일치하시네요. <뇌내혁명>도 구입해서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사려가 깊다거나 작가님보다 글을 잘 쓴다하신 표현은 과찬이십니다. 이 공간에서 독서의 고수, 생각의 고수님들의 글을 접하다보니 제 생각이 습자지처럼 얇아서 깊이를 논하기 어려운 지경이고, 제 글 역시 비루하고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거든요. 더욱 많이 생각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라는 질책으로 담아두겠습니다.ㅎㅎ(민망해하면서도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나비종은 따라쟁이~~)

박균호 2017-03-05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나비종 2017-03-05 13: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박균호님두요.^^*
 
지율스님의 산막일지
지율 지음 / 사계절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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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손 한 번 내밀어보세요. ? 넷째 손가락이 검지보다 길면 남성 호르몬이 더 많은 거래요. 그래?

옆에 있던 20대의 동료도 손을 내민다. 그녀의 손과 나의 손을 번갈아 보자니 길이보다 질감에 눈길이 간다. 매끈하고 뽀샤시한 손가락과는 대조적으로 주름지고 푸석한 손. 왠지 모를 부끄럼에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는다.

책 속의 사진에는 할매와 할배들의 손이 자주 등장한다. 내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쭈글쭈글 주름지고,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거칠고,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3D 화면을 보듯 굴곡이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책은 열 가구밖에 살지 않는 오지 마을에서 3년 동안 머문 지율 스님이 할배, 할매들과 더불어 살아온 일상을 기록한 농사일지이다. 열두 달 동안 이어지는 소농들의 투박하고 소박한 삶이 흑백 사진처럼 담백하다. 천천히 글을 따라가다 보면 계절의 변화도 느껴지고 농사짓는 풍경이 24절기와 절묘하게 연결되어 멈추지 않는 시계바늘처럼 그려진다. 살아 숨 쉬는 땅과 꿈틀거리는 생명의 존재가 보인다. 그 속에서 자연이 품고 있는 인간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글보다 사진이 더 많은 말을 거는 책이다.

흑백과 컬러가 번갈아 있지만, 컬러라고 해도 주로 두 가지 색상이다. 가늘게 굽이치는 초록, 부드럽게 뭉글거리는 황토, 자주 등장하는 동물의 몸조차 땅 색깔을 닮아있다. 가을 단풍처럼 찬란한 빨강, 노랑이거나 화창한 하늘처럼 푸른색도 있건만 렌즈가 향하는 곳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다. 스님을 따라 덩달아 시선의 끝을 아래로 향해 본다.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모델은 할배와 할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들의 손과 발과 웃음이다. 흙을 밟고 있는 맨 발, 바람을 어루만지는 맨 손, 모를 심는 투박한 손, 갈라터진 발뒤꿈치. 그 모습을 보면서 때때로 울컥한다. 단순히 안쓰럽다는 느낌과는 미묘하게 다른 뭉클함이다. 왜 이럴까 가슴을 쓸어내리다 중간 즈음에서 발견한 문장에서 답을 찾는다.

당신들의 일생은 심고 가꾸고 낳고 기르고 거두고 나누는 일이었으리라.’(p164~165)

왜소하고 굽은 등으로 땅을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생명을 두 손으로, 두 발로 정성스레 지키고 계시는 분들. 수줍은 소녀처럼 소박한 호영이 어머님의 웃음이나 호탕한 대장부처럼 껄껄 웃음꽃이 활짝 핀 동네 어르신들의 얼굴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땅과 같이 낮아져 등 굽은 그분들을 그렇게 내몰고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p111)

절로 고개가 수그러드는 삶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어떤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걸까. 나 역시 방관자로 머무는 입장에서 마음이 편치 않다.

세상은 한없이 높아지고 넓어지고 빨라지지만, 할매들은 그렇게 육십 년을 살아오셨고 남은 시간을 그렇게 살아가실 뿐이다.’(p211)

늙어가는 시골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 분들이 돌아가시면 다음에는 누가 이 땅을 지켜낼까. 땅을 지켜낼 손들이 얼마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조금만 더 우리 이웃의 삶과 우리 주위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들에 관심을 가진다면 법과 제도가 지키려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소중한 것을 지켜갈 수 있지 않을까?’(p163)

손의 아름다움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손으로 무엇을 만지고 무엇을 지키고 있느냐 에서 오는 것이었다. 땅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는 손은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함이다.

오늘 하루 내 손이 만진 것을 떠올려본다. 앞으로 만지게 될 무언가를 생각한다. 무엇을 만지고 지켜야할까. 적어도 한갓 종이나 쇳덩어리여서는 안 될 것이다. 내 발길이 닿고 마음이 머무는 곳에 있을 무언가를 소중하게 지키고 싶다. 못생기게만 보였던 내 손에서도 나이 들어갈수록 깊어질 주름 사이로 아름다움이 배어나올 수 있도록.

 

 

p167, 4째 줄, 문장 끝 따옴표 누락됨

p200, 40미터는 족히 되는 초록색 꽃뱀~ : 보통의 꽃뱀은 50~120cm정도라는데, 40미터는 다소 많이 길어 보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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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2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자마자 양손을 펴서 살펴봤어요. 왼손은 검지가 길고, 오른손은 약지와 검지 길이가 비슷해요.. ^^;;

나비종 2017-02-22 09:01   좋아요 0 | URL
오홋! 저와 반대이시군요. 저는 양손 다 약지가 깁니다만. .ㅎㅎ
이거 통계치라 완전히 믿을 건 못 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펴서 오밀조밀 살펴보게 되더라구요^^;

yureka01 2017-02-22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진 때문에라도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습니다^^..

나비종 2017-02-22 09:27   좋아요 0 | URL
MSG 첨가하지 않은 잔잔한 다큐같은 책입니다.^^
 
나의 친애하는 적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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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를 처음 접했을 때를 기억한다. 너무 가까워도 흐릿하고 멀어도 흐릿한 상이 초점이 맞는 순간 커다란 윤곽으로 다가왔던, 햇살 좋은 날 먹지 위에서 조심스레 왔다 갔다 하다 찬란한 빛이 한 점으로 모였을 때 작은 불꽃으로 타올랐던 뜨거운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틈날 때마다 한동안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물체와 돋보기 사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느 한 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거리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돋보기를 떠올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어쩌면 알맞은 초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며.  

몇 권 되지 않지만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한마디로 조화라 표현할 수 있는. 방송에서 보여 지는 모습은 냉철하고 이성적이지만, 글에서는 감성적인 면이 엿보인다. 그의 글은 이성과 감성의 극단으로부터 정확히 중간 지점인 무게 중심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좋다. 너무 뜨겁지도 않은 감성에 너무 차갑지도 않은 이성이 적절히 버무려진 글이 나의 마음을 적당한 따뜻함으로 어루만지는 듯해서.

 

크게 3부로 구성된 에세이이다. 1부는 주로 저자에 대한, 2부는 저자 주변 사람들이나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한, 3부는 요즘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글들이 있다. ‘, , 우리의 구성이랄까.

1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는 저자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많이 생각했고, 많이 움직였다.

특히 청소에 대한 글은 공감한 만큼이나 나의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했다. ‘정리의 묘는 얼마나 잘 감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p49)’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내팽개쳤던 집안의 물건들을 며칠 동안 하나하나 정리했다. 버리기 아까워서 망설이고 깊숙이 보관해왔던 물건들을 드디어 버렸다. 나에게 필요한 물건인가, 필요하지 않은가. 일단 기준이 정해지니 행동은 과감하고 신속해졌다. 관련된 시도 6편을 지었다. ‘살림, 청소, , 설거지, , 무소유란 제목으로 만들어진 시를 쓰며 어지럽던 마음을 정갈하게 정돈했다. ‘청소란 그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게 만든다.(p50)’단지 주변을 정리했을 뿐인데,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상쾌한 느낌이 나를 둘러쌌다. 여유 있는 공간 사이사이로 뽀송뽀송한 바람이 들락거리는 듯 기분이 좋았다. 내 공간을 이해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나 잘 알 수 있었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저자를 조금 더 알게 된 만큼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에 대해 쓴 글에 많이 공감했다. ‘한 권의 책을 만나 읽어 내려가며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빈 공간을 나만의 단서들로 채워나가는 이 과정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흡사 웹상의 하이퍼링크처럼 머릿속에서 단어와 단서들이 꼬리를 이어 나만의 사유를 만들어가는 자극은 독서 이외에서 얻어내기 어려운 경험이다.(p105)’ ‘하이퍼링크라니!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그의 글들을 한 편 한 편 읽어가면서 나의 경우를 떠올렸으니 매번 하이퍼링크 되며 나를 돌아보았던 거다. 3개의 주제 아래 쓰인 글들이 거의 비슷한 분량이었는데도 1부를 읽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던 이유이다.

2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다는 다소 생소했다. 평소 영화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기에, 그가 언급한 영화 속 인물들이 내게는 생경했다.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접할 수 있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극적인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이나 사건에 휘말린다. 하지만 영화 같은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요즘을 생각한다면, 세상 어딘가에는 영화 속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까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건 그냥 내려놓으면 됩니다.(p189)’ ‘어쩌면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필요한 건 망각이나 체념이 아니라 이해하는 태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p191~192)’ 이 말은 상황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 혼자만 마음속으로 껄끄러워하는 몇몇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입장에 잠시 서보았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3끓는점은 스피디한 영화를 보는 듯했다. 빠른 속도로 책장이 넘어갔다. 요즘 핫한 이슈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속 시원한 사이다 전개로 펼친 글들이 이어졌다. 영화 <베테랑>을 보고 났을 때의 느낌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현대사에 대한 글귀는 신선한 관점이었다. ‘과거는 대개 창피한 것이다. 그것을 사실 그대로 돌아볼 수 있는 정직함만이 늘 위대하다.(p284)’막혔던 수학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갑자기 발견한 기분이었다. ‘끓는점이란 제목은 참으로 적절했다. 끓는점에 도달한 수증기가 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투명한 기포로 끓어오르는 한 문장 한 문장이 후련했다.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바라보는 대상마다 다를 그 포인트가 궁금해졌다. 마음 편하게 상대를 대할 수 있는, 내가 바라보는 상대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일 수 있는, 이어진 관계 속에서도 각각 자유로울 수 있는, 아마도 작가가 말한 나의 친애하는 적과의 거리는 그 정도일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어떤 사건이든, 세상이든, 삶이든.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나를 중심으로 내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적절한 초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새로운 용기가 생겼다. 이제는 나도 내 자신을 벗어나 조금 더 멀리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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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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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인 듯 꽃인 듯 날개인 듯 펼쳐지는 무늬를 좋아했다. 반으로 접어 가까이 하기 전까지는 어떤 무늬가 만들어질지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스릴감이 있다. 이윽고 나타난 화면은 와! 라는 감탄사를 이끌어낼 정도로 화려하다. 어릴 적 미술 시간에 좋아했던 기법이다. ‘데칼코마니가 좋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별 것 아닌 소박한 무늬가 별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거울처럼 빛내주는 효과 때문이다. 그림에서 배어나오던 공감과 따뜻한 분위기가 마냥 좋았던 걸까.

 

이 책은여자, 존재, 사랑, 이라는 4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책 안에 담긴 문장들에서 수많은 공감을 느낀다. 그것은 작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나의 이야기이자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였다. 담담하고 당당하고 솔직하게 그려낸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와 데칼코마니가 되어 활짝 펼쳐졌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p7) 감정과 느낌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문장은 치열한 고통에 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쾌한 사이다가 된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p12)라는 문장은 부드러운 연고가 되어 예전에 말라붙어 흔적으로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솔솔 어루만진다.

삶은 행복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날들로 이루어지는 것’(p10)이라는 문장을 읽고는 박음질을 하듯 매순간을 살아가고 싶어진다.

 

여자라는 본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1.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가는 영혼의 고민과 울컥함을 이토록 세세하게 묘사한 책이 또 있을까. 이제껏 읽어본 여성의 삶에 대한 글 중 가장 속 시원하게 서술된 책이다.

스스로에게, 세상을 향해 수없이 던졌던 물음들에 저자는 모든 물음은 질문자의 입장과 욕망을 내포하는 법이다.’(p35)라며 냉철한 시선을 던진다.

결혼 후, 많은 여성들에게이 가져다주는 일상적인 스트레스는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무게감을 지닌다. ‘밥에 묶인 삶, 늘 떠남의 욕망에 시달린다.’(p56), ‘나에게 밥은 (중략) 그 밥을 대체 누가 차리느냐의 문제다’(p67) 남이 차려주는 밥이 가장 맛있어진 나는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친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p44~45)는 울컥했던 문장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심코 가해지는 폭력을 생각한다.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은 가장 가까워야할 대상과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닌듯하여 씁쓸하다.

중간이나 끝 부분에 삽입된 시의 구절도 좋았다. 1부에서 가장 좋았던 시는 정일근의 <그 후>이다.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 단지 그것뿐이다뭐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낌으로 확 와 닿은 행이다.

 

은유라는 작가의 글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글로 만난 존재의 실체가 실재의 모습과 얼마나 근접해 있을지 모르지만, 책 한 권을 통해 개인적인 느낌으로만 감히 판단하건데, 그녀는 존재의 삶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물음을 던진 이이다. 존재라는 물음을 담고 있는 2. 한 문장, 한 문장에서 정갈하게 구워진 도자기의 시간이 오롯이 느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덮쳐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소낙비를 맞고 나면 우산이 필요 없다.’(p123), ‘나는 삶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닌 나의 하루를 모셔야 했다.’(p126) 나의 하루를 모신다는 서술이 지금 이 순간에 서있기까지 통과해온 시간들을 생각나게 한다. 바늘 끝으로 콕콕 찌르는 듯 마음이 따끔따끔하다.

질문을 하는 자에겐 가볍고, 질문을 받는 자에겐 한 없이 무거운 질문이 있다. ‘그 때 왜 그랬니?’무심코 상대의 마음을 아프고도 답답하게 하는 말이다. 누구나 그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을 길을 가는 것이므로. 저자의 한 문장에서 위안을 얻는다. ‘아무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므로.’(p140)

관계에 대한 생각이 신선하다.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어울리는 색과 취향이 있듯이 삶의 체형에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p130)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멀리 하게 된 인연들이 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간혹 마음이 묵직했는데 이 말을 곱씹어보니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 같다.

결혼을 했든 안했든,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든 여자든 관계에 대한 갈증이 일 때가 있다. ‘역할이 아니라 영혼이 만나 마주하니 좋았다.’(p162) 그런 사람 한 사람쯤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에 살짝 자책감이 들곤 했는데, 이 문장에서 많은 위안을 얻는다. 외적인 모든 조건을 떠난 영혼을 만나 마주하는 좋은 느낌. 언젠가 그런 영혼을 만날 수 있을까.

나를 옭아맨 테두리를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가슴 뛰는 두근거림으로 급하게 만남의 장소로 향하던 몇몇 순간이 기억난다. ‘누구를 만나고 싶은 자가 아니라 어디로 떠나고 싶은 자가 달린다.’(p163) 생각해보니 그랬다. 만날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보다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장면이 있었다.

 

3부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다룬다. 꽤 오랜 동안 삶의 목적이 사랑이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때 했던 수많은 고민들을 회상해본다. 책에서 다룬 이야기들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아쉽게도 뭔가 채워지지 못한 느낌이 있다. 다른 3개의 주제에 비해 내 마음과 접점으로 만나 크게 울리는 내용은 찾기 어려웠다.

 

일이라는 가치를 말한 4부에서는 경계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를 배운다. ‘돈의 쓰임이 곧 삶의 자세이다.’(p237)라는 문장을 읽고 나서 소비 생활이 조금 더 과감해진다.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선물을 할까 말까, 책을 구입할까 말까 망설였을 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지침서가 되었다.

난 그것을 늙음의 징조로 본다. 살지 않고 삶을 판단하는 것.’(p242) ‘사회적 약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무리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몸으로 겪었다.’(p280)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문장이다. 젊거나 어리다고해서, 이만큼 살아왔다고 해서 그 어떤 삶도 쉽게 단정 짓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일이다.

4부에서는 삶의 깊이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시도 만났다. 이영광의 <헌책들>(p244~245)과 김수영의 <구름의 파수병>(p271~272)이 기억이 남는다. 그들의 시를 읽고 나니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겸허해진다.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을 곰곰이 생각한다.

작가는어떻게 할까는 누구와 할까의 문제로 풀면 낫더라는 것.’(p295)을 배웠다고 했다. ‘누구와의 범위를 좀 더 넓혀본다. 책을 통해서 얽힌 문제들을 풀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이 책을 통해 평소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답을 많이 얻었으니까. 내 삶에 대한 답은 물론 내게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답을 조금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한 권의 책은 끊임없이 치열하게 세상과 싸우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보여주는 삶은 점점 투명해져서 나의 삶도 투명한 공감으로 울린다. 책 표지의 그림이 마음에 남는다. 스스로 혹은 타인의 뒷모습도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뒷모습을 보이고 앉아있는 이는 속옷만을 입고 있다. 속옷만 입고 있을 수 있는 장소는 자신의 민낯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의 민낯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투명한 풍선은 약해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에 묘사된 연약한 속살에 단단한 씨를 숨기고 있는 앵두처럼 단단한 무언가가 담겨있을 것 같다.

세상에는 무수한 삶이 있다. 이 말은 세상에는 무수한 아픔이 있다는 뜻이다. 알고 싶은. 그러나 알 수 없는. 그래서 보고도 모르는.’(p174)

내 삶을, 내가 바라보는 주변의 삶을 투명하게 만들고 싶어진다. 물기어린 삶들이 만들어내는 흐릿한 유리창을 조용히 닦아 투명하게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다. 내 글을 읽고 데칼코마니를 떠올리는 누군가의 삶을 상상해본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오타

p5 7번째 줄 : 부끄러운 일었다. 일이었다.

p83 밑에서 7번째 줄, p161 마지막 줄 : 베시시 배시시

p105 마지막 줄 : 젊은들이 젊은이들이 또는 젊음들이

p213 밑에서 2번째 줄 : D, E. F EF 사이에 쉼표가 와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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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8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무수한 아픔 전부를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 것이고, 절대로 나타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두운 면을 보면서 살아가는 일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니까요. 그래서 ‘보고도 모르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냥 ‘알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살아가는 자세가 좋은 것 같아요. ^^

나비종 2017-01-08 18:2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알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고통받는 마음들에게는 많은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caesar 2017-01-15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오타를 바로잡아주셨으니 제가 발견한 오타도 한 줄 추가하고 싶어요.
121페이지 7 번째 줄 : 누렇게 곰팡이 쓴 말들과 → 누렇게 곰팡이 슨 말들과

나비종 2017-01-15 14:23   좋아요 1 | URL
헉! 나름 오타에 대해서는 매의 눈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정한 고수가 계셨군요ㅎㅎ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aesar 2017-01-15 14:27   좋아요 0 | URL
고수라는 말씀은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저도 오타에 민감한 터라, 먼저 발견해 주신 것이 감사해서 저도 숟가락을 얹어봤습니다.ㅎㅎ

나비종 2017-01-15 14:36   좋아요 1 | URL
어릴 적부터 숨은그림찾기를 즐겨하며 내공을 키워왔고, 아 다르고 어 다름을 깨우친 후로는 오타의 빈도 수가 남친의 고유 덕목 중 하나로 자리잡아왔습니다만ㅋㅋ
오타에 민감한 분을 글로 만나니 너무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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