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지옥일 때
이명수 지음, 고원태 그림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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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렁 마음이 내려앉았다. 아이가 작성한 문장 완성 검사지를 우연히 보게 된 날이었다. 몇 개의 미완성된 문장에 대한 답변이 이토록 선명하게 심리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나온 엄마의 회색빛 시간들에 푹 적셔진 아이. 짧고 무심한 문장이 바늘인 듯 마음을 찔렀다.

직장일과 육아와 끊임없이 밀려드는 가사에 날마다 피곤했지만,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핸드폰 주소록을 아무리 뒤져도 선뜻 버튼을 누를 수 없던 외로움이었다. 주변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던 엄마를 아이는 어떤 눈망울로 바라보고 있던 걸까.프롤로그에서 문장 완성 검사에 얽힌 일화를 보며 그 때를 떠올렸다. 지나왔다기보다는 견뎌왔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간들. 책 제목과 자연스레 겹쳐지던 시기였다.

 

내 마음이 지옥일 때라니! 매일 매일이 아득한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한 제목인가. 정열적인 붉은 표지가 책을 만든 이의 심장인 듯 그 안에 담겨있을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제목만으로 위안이 되는 책이 있다. 이런 부류의 책을 읽기 전에는 긴장감이 앞선다. 간혹 제목만 번드르르하고 저자 혼자 떠들고 끝나버리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괜히 읽었다 마음에 더욱 커다란 구멍이 뚫린 적도 있었기에. 기대만큼의 내용이 담겨있는 책은 비교적 드물었다. 내용이 제목을 탄탄하게 뒷받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별 기대감 없이 첫 장을 펼쳤다.

 

짧은 문장 하나가 많은 내용을 포함할 때가 있다. ‘나는 가진 게 많다.’(p5)라는 첫 문장은 작은 충격이었다. ‘첫 문장의 중요성을 다룬 내가 사랑한 첫 문장(윤성근, 2015.7.)이 생각났다. 이토록 자신감 있게 가진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매력적인 첫 문장에 앞으로 나올 내용들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99칸의 방을 가졌어도 100칸을 채우고 싶어 1칸을 욕심 부리는 마음이 일반적이건만, 그가 가졌다는 무언가가 단순히 물질의 많고 적음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시간들을 지나와야 이런 마음에 이를 수 있을까.

 

이 책에는 82편의 시가 16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담겨있다. 주제별로는 5편 내외의 시가 소개된다. 저자는 시가 뿜어내는 치유적 공기에 매료됐다.’(p8)라 말한다. 그런 말을 하는 저자를 보며, 시를 해석하며 저자가 뿜어내는 치유력 또한 상당하다고 느낀다. 시를 음미하며, 저자의 생각을 음미하며, 부드럽고 포근한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시간 사이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토닥토닥, 토닥토닥. 소박하고 따스한 문장에 때론 울컥해하면서.

 

무엇보다 매력적이던 내용은 등장하는 많은 문장들이 하나같이 내 자신을 긍정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당신은 원래 스스로의 다리로 걸었던 사람이다.’(p72~73), ‘자기 몸과 마음이 기운 쪽으로만 움직이면 절대 안전해요.’(p75, <영웅>, 이원),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건/ 지금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나를 보호하고 다독여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야.’(p77)

종종 등장하는 옳다라는 문장은 사소한 망설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누군가의 꼭 한 사람이 되어주는 일은 언제나 옳다.’(p53~54), ‘내가 그렇게 선택한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필요해서다. 그러므로 모든 나의 끌림은 늘 옳다.’(p54)

 

힘들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소리 지르지 못하는 깊은 물이/ 어쩌면 더 처절한 비명인지도 몰라.’(p216, <아름다운 비명>, 박선희) 이불을 꿰맨 후 뒤집어서 구석에 접혀있던 귀퉁이를 빼듯이 마음 한 구석에 고여 있던 아픔이 후련하게 빠져나갔다. '얼었다 녹았다 겨울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p30, <겨울 풍경>, 박남준)란 문장도, 시 <살다가 보면>(p38, 이근배)도 위로가 되었다. 시인의 주는 공감의 힘이었다.

나희덕 시인의 <산속에서>를 읽고는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p84)이란 문장에서 시가 지닌 치유의 힘을 생각했다. ‘치유란 동굴 속에 숨은 사람을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그의 옆에서 어둠을 함께 감내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그가 동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된다.’(p311) 시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관통한 느낌을 문장으로 옮겨 담으며 나도 그래, 나도 그런 적 있어라 말하고 있었다.

 

<업어준다는 것>(p56~57, 박서영)은 다른 이들의 영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토닥일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에필로그제목 역시 인상적이었다. ‘함께, 충분히 기다려줄 것!’(p310) 다른 이를 대하는 자세일 수도 있고 스스로에게 거울처럼 되뇌어도 충분한 문장이다. 딸아이가 생각났다. 어쩌면 아이는 엄마와 함께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엄마를 충분히 기다려준 것은 아니었을까. 배려심이 깊고 어느 순간 단단한 심지를 지니게 된 아이. 아이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훌쩍 자라버린 22세의 딸. 내게 가장 힘이 되어 준 문장은 그토록 어려운 시간들을 함께 걸어와 준 나의 아이였다.

 

책표지를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강렬하게 보였던 색채가 주던 첫인상이 살짝 달라져있다. 따스하고 은은하다. 언젠가 시골에 가서 샀던 스카프가 연상된다. 천연 염료로 염색한 부드러운 거즈 같은 헝겊. 반짝이지 않아도 소박하고도 결 고운 느낌에 목에 두르면 은은한 따스함이 전해져오는 느낌에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캐롤 키드의 <When I Dream>처럼 그런 따스함이 뭉클한 책이다, 이 책은.

 

 

오타

p123, 웃다가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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