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애하는 적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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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를 처음 접했을 때를 기억한다. 너무 가까워도 흐릿하고 멀어도 흐릿한 상이 초점이 맞는 순간 커다란 윤곽으로 다가왔던, 햇살 좋은 날 먹지 위에서 조심스레 왔다 갔다 하다 찬란한 빛이 한 점으로 모였을 때 작은 불꽃으로 타올랐던 뜨거운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틈날 때마다 한동안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물체와 돋보기 사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느 한 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거리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돋보기를 떠올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어쩌면 알맞은 초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며.  

몇 권 되지 않지만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한마디로 조화라 표현할 수 있는. 방송에서 보여 지는 모습은 냉철하고 이성적이지만, 글에서는 감성적인 면이 엿보인다. 그의 글은 이성과 감성의 극단으로부터 정확히 중간 지점인 무게 중심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좋다. 너무 뜨겁지도 않은 감성에 너무 차갑지도 않은 이성이 적절히 버무려진 글이 나의 마음을 적당한 따뜻함으로 어루만지는 듯해서.

 

크게 3부로 구성된 에세이이다. 1부는 주로 저자에 대한, 2부는 저자 주변 사람들이나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한, 3부는 요즘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글들이 있다. ‘, , 우리의 구성이랄까.

1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는 저자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많이 생각했고, 많이 움직였다.

특히 청소에 대한 글은 공감한 만큼이나 나의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했다. ‘정리의 묘는 얼마나 잘 감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p49)’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내팽개쳤던 집안의 물건들을 며칠 동안 하나하나 정리했다. 버리기 아까워서 망설이고 깊숙이 보관해왔던 물건들을 드디어 버렸다. 나에게 필요한 물건인가, 필요하지 않은가. 일단 기준이 정해지니 행동은 과감하고 신속해졌다. 관련된 시도 6편을 지었다. ‘살림, 청소, , 설거지, , 무소유란 제목으로 만들어진 시를 쓰며 어지럽던 마음을 정갈하게 정돈했다. ‘청소란 그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게 만든다.(p50)’단지 주변을 정리했을 뿐인데,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상쾌한 느낌이 나를 둘러쌌다. 여유 있는 공간 사이사이로 뽀송뽀송한 바람이 들락거리는 듯 기분이 좋았다. 내 공간을 이해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나 잘 알 수 있었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저자를 조금 더 알게 된 만큼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에 대해 쓴 글에 많이 공감했다. ‘한 권의 책을 만나 읽어 내려가며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빈 공간을 나만의 단서들로 채워나가는 이 과정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흡사 웹상의 하이퍼링크처럼 머릿속에서 단어와 단서들이 꼬리를 이어 나만의 사유를 만들어가는 자극은 독서 이외에서 얻어내기 어려운 경험이다.(p105)’ ‘하이퍼링크라니!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그의 글들을 한 편 한 편 읽어가면서 나의 경우를 떠올렸으니 매번 하이퍼링크 되며 나를 돌아보았던 거다. 3개의 주제 아래 쓰인 글들이 거의 비슷한 분량이었는데도 1부를 읽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던 이유이다.

2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다는 다소 생소했다. 평소 영화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기에, 그가 언급한 영화 속 인물들이 내게는 생경했다.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접할 수 있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극적인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이나 사건에 휘말린다. 하지만 영화 같은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요즘을 생각한다면, 세상 어딘가에는 영화 속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까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건 그냥 내려놓으면 됩니다.(p189)’ ‘어쩌면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필요한 건 망각이나 체념이 아니라 이해하는 태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p191~192)’ 이 말은 상황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 혼자만 마음속으로 껄끄러워하는 몇몇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입장에 잠시 서보았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3끓는점은 스피디한 영화를 보는 듯했다. 빠른 속도로 책장이 넘어갔다. 요즘 핫한 이슈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속 시원한 사이다 전개로 펼친 글들이 이어졌다. 영화 <베테랑>을 보고 났을 때의 느낌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현대사에 대한 글귀는 신선한 관점이었다. ‘과거는 대개 창피한 것이다. 그것을 사실 그대로 돌아볼 수 있는 정직함만이 늘 위대하다.(p284)’막혔던 수학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갑자기 발견한 기분이었다. ‘끓는점이란 제목은 참으로 적절했다. 끓는점에 도달한 수증기가 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투명한 기포로 끓어오르는 한 문장 한 문장이 후련했다.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바라보는 대상마다 다를 그 포인트가 궁금해졌다. 마음 편하게 상대를 대할 수 있는, 내가 바라보는 상대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일 수 있는, 이어진 관계 속에서도 각각 자유로울 수 있는, 아마도 작가가 말한 나의 친애하는 적과의 거리는 그 정도일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어떤 사건이든, 세상이든, 삶이든.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나를 중심으로 내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적절한 초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새로운 용기가 생겼다. 이제는 나도 내 자신을 벗어나 조금 더 멀리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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