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14
필리파 피어스 지음, 수잔 아인칙 그림,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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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해 이렇게 잘 정의 내려 준 책이 또 있을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그 시간들은 실제로는 거대한 '시간'의 일부지만요."(p224)

정말 머릿속에 꼭 기록해 두고 싶은 구절이다.

사실, 나는 처음에 이 동화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이 동화의 비밀의 열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끝까지 읽고 난 후 나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았다. 그렇게 알면서도 읽는 내내 엿보이는 아이의 마음과 눈에 보이는 듯 쓰여진 묘사가 나를 책 속에 빠져들게 했다. 정말 내 인생에 좋은 동화책으로 꼽힐 몇 권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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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반레 지음, 하재홍 옮김 / 실천문학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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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문학이든 진정성이 있어야 하며, 작가의 해설이나 등장인물의 대사에 의해서가 아닌 작품 자체로서 메시지가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충분한 진정성을 가지고 있으며 쓰여져야 할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독자를 끌어들이기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시대를 조명한 훌륭한 소설임에 틀림없으나, 계몽 소설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전쟁, 그리고 사람' 이라는 주제가 내 관심을 끌었고, 나는 이 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주제 의식이 너무 강하다 보니 문학적인 즐거움, 그러니까 내 가슴이 울고,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즐거움은 누릴 수가 없었다.

또한 베트남 특유의 이성관은 작품으로의 몰입을 막는 요소 중 하나였다.  남녀, 나아가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약간은 다르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고 믿는데, 이 작품에서의 관계들은 인위적이고 남성적이며 신파적이어서 내가 빠져들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실제로 겪어 보지 않고는 모를 전쟁에 대한 생생한 묘사였다. 오늘날 지구 위 어느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생각하면서 이 책에서와 같은 비극이 그 곳에서도 일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매우 착잡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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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엄마 학원 반달문고 11
김녹두 지음, 김용연 그림 / 문학동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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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표지부터 재미있다. 내용도 군더더기 없이 재미있다. 그리고 잔잔한 감동이 마음을 울린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이 책을 읽을 만한 나이는 아직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을 두었다가 때가 되면 꼭 보여 주고 싶다. 나도 두고두고 보면서 아이들의 마음이 이렇지! 하면서 아이들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을 잃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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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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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한 작가를 상대로 한 인터뷰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간다. 그러면서 그 작가가 오늘날 어떻게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 그리고 잘려나간 듯 알 수 없던 유년 시절이 서서히 밝혀진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그의 과거는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 사람의 그것이었지만, 작가 자신으로서는 자신이 만들어 낸 완벽한 세계 속에서 그 이상 완벽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의 눈으로 바라본 어린 시절 세계의 묘사는 읽고 있는 나에게 애잔하고 고혹적인 영상을 불러일으켰고, 책을 읽은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그 영상, 소녀가 짙푸른 연못 속에서 하얀 다리를 저으며 물에 젖은 눈으로 소년, 아니 나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그 소녀와 소년의 사랑이 비록 세상의 잣대로는 미친 짓이고 진정한 사랑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름답다고 느꼈으며 문학이 나에게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는 두려움을 느끼며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소녀에게 했던 행동을 후회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 또 다른 소녀, 어른의 모습으로 신랄한 비판을 쏟아붓는 기자의 모습을 한 소녀에게 숨은 본성을 이끌어냄으로써 나로서는 말로 정의내릴 수 없는 인간의 부조리함을 느끼게 했다.

작가의 죽음으로, 물론 그는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했지만 그건 그의 생각이고, 한 편의 사랑은 마무리되었고, 그토록 비난했던 작가의 행동을 따라하게 된 기자에게서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고 있다고 본다면 무리일까? 인생은 그렇게 한 마디로 딱 끊을 수 없는 무언가를 늘 남기고, 정의할 수 없는 그런 거 같다.

아멜리 노통의 톡톡 튀는 재치 있는 글 솜씨와 그녀만의 독특한 가치관, 그러나 결코 정상적인 가치관을 벗어나지 않는(내 생각이구, 노통은 이런 내 말을 만약에, 만약에 들어서 기분나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녀만의 매력이 돋보인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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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화욜에 모처럼 다녀온 문화 행동, 샤갈의 그림 전시회를 다녀왔다!

그러나 그의 그림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맘에 들었다.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인생에 대해 따뜻한 시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은 나의 가슴도 푸근히 뎁혀 주었다.

우선 전시회 소개부터 싣는다.

색채의 마술사 샤갈 ‘서울 나들이’
[세계일보 2004-08-09 13:09]
꿈과 환상의 세계를 현란한 색채와 독특한 형상으로 그려낸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화가 마크 샤갈(1887-1985)의 전생애에 걸친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색채의 마술사 샤갈’전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도시 위에서(1914-1918)’ ‘꿈(1927)’ ‘비텝스크 위의 누드(1933)’등 샤갈의 주요한 유화 작품들을 포함, 프랑스, 러시아 미술관에서 공수된 약 120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유화 작품이 47점이며 나머지는 과슈, 종이에 잉크등을 사용한 드로잉, 판화들이다. 모처럼 한국에 온 샤갈의 원화를 만나볼 수 있는 자리이다.

전시장 파스텔톤의 화사한 벽에 걸린 이 작품들은 모스크바 트레티아코프 국립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 프랑스 니스 국립샤갈성서미술관, 스위스 샤갈재단, 파리 시립미술관, 프랑스 리용 미술관 대여품들이거나 개인이 소장한 작품들로 전체 작품가격은 보험가 기준으로 약 1,100억원에 이른다.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소장품인 ‘도시위에서’는 이 작품 한점의 가격이 보험가 기준 약 110억원으로 현존 샤갈 작품중에서 최고가를 자랑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파리시립미술관 소장품 ‘꿈’도 약 105억원, ‘유대인극장’ 연작 패널화들이 각 65억원 정도. 전시는 ‘연인’ ‘상상’ ‘파리’ ‘서커스’ ‘성서이야기’ ‘호메루스의 오디세이’ ‘지중해의 세계’ 등 7개의 주제로 나뉘어 구성된다.

이밖에 도시 위에 등을 돌린 여성의 누드가 그려진 ‘비텝스크 위의 누드’(1933)는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 소식을 접하고 우울한 시대상을 그린 작품이다. ‘땅거미 질 무렵’(1928-1943)은 샤갈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눈내리는 풍경을 묘사했다. ‘오디세이 판화집’의 판화 43점은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샤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는 파리 퐁피두센터에 샤갈 전시관을 조성한 것을 계기로 지난해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샤갈 회고전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샤갈전에 이은 순회전으로, 이탈리아 토리노 근대미술관 전시를 마치고 서울로 온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는 10월15일까지. 그 후에는 부산시립미술관으로 옮겨가 11월 13일부터 내년 1월16일까지 전시되며 내년 2월에는 모스크바 전시가 예정돼 있다. 관람료는 성인 1만원(02-2124-8941)

 

그리고 다음은 샤갈의 생애 요약(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샤갈 [Chagall, Marc, 1887.7.7~1985.3.28]

요약
프랑스의 화가.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러시아 비테프스크
주요수상 베네치아 비엔날레전 판화상(1948)
주요저서 《나의 인생 Ma Vie》(1965)
주요작품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바이올린 연주자》 《서커스》
본문

러시아의 비테프스크 출생.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콜드파리 최대의 화가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7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미술학교에 다닌 후, 1910년 파리로 나와 A.모딜리아니와 F.레제 등을 배출한 아틀리에 '라 뤼슈'에서 그림공부를 하며 큐비즘기법을 익혔다. 1911년 앙데팡당전()에 첫 출품, 괴이하고 환상적이며 특이한 화풍으로 전위파화가와 시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1911년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성공한 후 그해 결혼을 위해 일시 귀국하였으나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잇달아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모국에 머물면서 미술단체의 요직을 맡았다. 고향에 미술학교를 열고, 1919년 모스크바의 국립유대극장의 벽화장식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맞지 않아 1922년 베를린, 1923년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이때부터는 유화 외에도 화상() 폴라즈의 의뢰에 따라 많은 판화를 제작하여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작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환상적인 작풍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가 점차 격화되자 1941년 도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지냈다. 1947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50년부터는 남프랑스의 방스에 영주의 터전을 잡았다.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전()에서 판화상을 받았으며, 유화·판화·벽화(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벽화, 파리오페라극장의 천장화 등)·스테인드 글라스·조각·도기() 제작을 비롯하여 무대 장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초기 작풍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슬라브의 환상감과 유대인 특유의 신비성을 융합시킨 독자적인 개성을 강하게 풍겼다.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루었고,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풀어주는 매력이 있다. 작품으로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바이올린 연주자》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 《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 《서커스》 등과, 자서전에 《나의 인생 Ma Vie》(1965)이 있다.

 

그리고 다음은 어느 자상한 소개.... 출처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7.7~1985.3.28)

러시아 출신 유대계 프랑스 화가. 러시아의 비텝스크 출생.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콜 드 파리 최대의 화가이다. 1887년 비데부스크는 모든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러시아의 정신과 유태인의 전통이 함께 섞인 곳이었다.  8세의 어린 나이였을 때 그는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가문에는 화가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펜이라고 하는 비테부스크 출신의 화가가 그를 자신의 화실에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그후 1907년에 샤갈은 성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왕실미술장려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는 L.박스트의 미술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유럽근대미술에 관한 지식을 배웠다. 그가 발견한 것은 색과 선의 변형에 대한 자율적인 가치였다. 그의 예술은 이미 그의 개성에 의해서 특정지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자인 벨라의 초상화들뿐만 아니라 출생,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주제들을 그렸다. 두마의 대리인이었던 한 친구가 그의 파리 여행 자금을 조탈키로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910년 파리의 독특한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빛은 그가 이미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던 자유의 빛과 같은 것이었다.  그가 정착하게 된 뤼세의 그랑 쇼미에르에 있는 몽파르나스의 화실에서 그느 활기에 넘친 범세계적인 그리고 보헤미안적인 삶을 발견했다. 그는 이곳에서 모딜리아니, 수틴, 들로네, 라 프로스네 그리고 입체라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서구 예술의 새로운 형태의 창조에 그들과 동참했다. 블레즈 쌍드라르와 아폴리네르 주변에 몸여들었던 시인들은 그를 즉시 그 그룹의 일원으로 삼았으며, 그의 그림들 속에 소생시킨 이상한 세계에 매혹 되었다. 또한 샤갈은 아라공이 말한 것 처럼 (세상의 관절들을 깨뜨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는가? (이것 봐! 허공에 외롭게 매달려 있는 것이 바로 내머리 같군.)하고 쌩드라르는 썼다.

 

 

그는 친구들의그림에다 이상한 제목을 붙여 주곤 했다. 예를 들자면 (러시아에게), (나귀들에게) 그리고 (지인들에게), (이세상 밖의 어딘가에서), (시인 혹은 세 시반)등등이었다. 아폴리네르의 시의 대부분 예를 들자면 (유럽 혹은 로츠타크를 통해서)라는 시는 샤갈의 개성에 의해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이들 화가와 시인들을 결합시켰던 것은 리얼리즘은 죽었다라는 그들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속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특히 초현실주의의 지도자였던 앙드레 보르통은 샤갈의 영감 속에 깃들어 있는 (신비적인)면을 불신했다. 아포리네에르의 친구인 월든에 의해 베를린의 (데어 슈트롬)화랑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그 전시회는 상당한 충격을 가져왔으며 당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의 독일 표현과 운동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이 시기에 시작한 그림들 가령, (1918년의 풍경) 혹은 (일곱 손가락의 자서전ㆍP 26) 같은 것들은 입체파 예술가의 영향들을 보여주고 잇ㄴ다. 그러나 입체파 화가들은 기하학적 세계 속에 형상들을 가두고 잇는 반면에 샤갈은 그의 내적 세계관을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해 실재를 자유롭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가 그의 그림들에다 산만하게 표현햇던 여러 대상들-시계, 그리스도 수난상, 샹들리에, 동물 우화집들-은 부수적인 요소들에 대한 약간의 유우머였을 따름이었다. 샤갈보다 더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다른 화가들을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는 자신이 초현실주의에 열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입체파에 몰두하는 것을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단지 그 자신의 상상력과 자기 자신에만 충실하였다. (나는 오만한 입체파 화가들 옆에서 조요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바라 보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삼각 데이블 위에 잇는 충분한 배들을 배불리 먹도록 했다. 나의 예술은 불합리하고, 자유 분방한 대변자이며, 나의 그림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우울한 정신이다. 그리고 나는 사실적인 자연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입체파에 의해서 압도당함으로써 그들은 나를 슬프고 답답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과학 기술과 형식주의 숭배에 대한 찬가를 부르는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나의 광기가 환영을 받게 해다오. 또한 그것이 나의 속죄의 준비가 되게하고, 형식이 아닌 내용의 혁명이 되게 해 다오.) 샤갈은 형식주의라는 것을, (벌거벗은 그리스도 옆에서 화려하게 옷을 입고 잇는 로마교황)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여 생각하기까지 했다.

 

샤갈의 자유는 끝내 그를 고독하게 만들고 말았다. 왜냐하면 샤갈은 관습을 기피한 것처럼 어느 집단, 학파 혹은 이념적인 체계 따위에 소속되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들에게 삶을 말해 주고 있으며, 그의 삶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삶의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고 파헤쳐 주고 있다. 1910년 파리로 나와 A.모딜리아니와 F.레제 등을 배출한 아틀리에 ‘라 뤼슈’에서 그림공부를 하며 큐비즘기법을 익혔다. 11년 앙데팡당전(展)에 첫 출품, 괴이하고 환상적이며 특이한 화풍으로 전위파화가와 시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11년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성공한 후 그 해 결혼을 위해 일시 귀국하였으나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잇달아 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에 돌아왔을 때, 전쟁이 발발해서 샤갈은 군대에 동원되었다. (위장 전술에 그는 영향을 주었다.) 혁명은 러시아의 유태인에게는 곧 해방이요 샤갈에게는 자유였다.  그의 자유 의지는 고향으로 돌아온 후 환희에 가득찬 영감을 갖게 한다. 비테브스크로 돌아온 그는 같은 처지의 망명객이었던 문예 이론가 루나찰스키의 친분에 힘입어 드디어는 미술위원의 자격으로 미술학교를 이끈다. 고향의 품에서 자유로움과 환상에 가득찬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다.  

마크 샤갈

 

마치 서커스단이 공연 전에 거리를 도는 모습 같기도 하고,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의 모습 같기도 한 이 환상적이며 몽환적인 광경은 자유로움을 갈망하던 샤갈의 자유 의지를 담고 있다.  그는 즉시 현대 미술의 모든 경향을 대표하는 학교를 만들려고 리지츠키와 포그니 그리고 말레비치를 찾아갔다. 그들의 협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리고 샤걀의 주창도 언제나 그 지방 관계자들에 의해 호의적인 눈으로 보여지질 않았다. (나는 나의 학교에 기능인들과 나보다도 더 그들의 재주를 알고 있었던 화가들을 받아들였다.) 라고 샤갈은 말했다.화려한 색채와 분방한 환상으로 옛날이야기나 하는 시인과 같이 볼 수 있는 세계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작품을 제작하여 후일의 쉬르·레알리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그의 상념은 그 당시 폴란드에서 일고 있던 유태교 내부의 경건주의적 범신론적 운동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으로 모든 존재에는 신의 사랑, 신의 형적(形跡)이 내재한다는 것에서 온 것 같다. 따라서 어떠한 단순한 것이라도 신비적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이 생생한 현실로 되어 신비적인 것이 모든 생의 단편 속에도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낭만적 기분이 고양되어 민중예술화하고, 일상생활과 초현실적 세계가 혼돈되어 신세계의 詩的 몽상으로 화하였다. 이러한 소박한 이미지의 강한 힘과 자신의 단순화한 데생과 장식적 화면 구성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사실 샤갈을 색채화가다. 색채에서 초속성(超俗性)을 탈취하지 않고 지극히 독창적 채색법을 개척하여 발전시켰다. 또 그의 형체는 색채의 효과를 노리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나 초기 큐비즘과 접촉하므로 차차 조형적 형체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그렇게 그는 예술작품의 창조에 있어서 지적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지적 합리적이라 하여도 큐비즘과 같이 물질주의로 흘러 절망적 극한에까지 진행시키지 않고 기적, 부조리를 통하여 강박관념과 白日夢과 색채가 넘쳐흐르는 환상으로 되돌아갔다.

또한 샤갈은 색채의 묘미를 살리고, 형체의 진미를 상실하지 않고 날으는 사람을 그리는가 하 면, 얼굴이 뒤집어진 사람도 그렸다. 그 당시 프랑스의 전위화가들은 주제를 없애자는데 있었다. 다시 말하면 주제는 오직 소재에 지나지 않고, 형체와 색채만으로 회화를 감상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주제로 그림을 보려고 하는 대중과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큐비즘은 지적 합리성에서 굳어진 기하학적 구성으로 흘러 인간생 활과 멀어갔으나, 샤갈은 비근(卑近)한 것, 친숙한 것, 사랑과 증오, 자비와 공포와 같은 인간 감 정에서 흐르고 있는 모든 것을 화면에 실었다. 그것은 정서의 흐름이요, 시의 자장가였다. 따라서 샤갈의 예술은 독일 표현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쉬 르·레알리즘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의 비테프스크 출생.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콜 드 파리 최대의 화가이다.우리는 계획을 세우도록 위임받았고, 혹은 또 자치 단체의 아틀리에에서 재주를 경쟁했다. 우리는 삶에 더 밀착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썻다. 우리는 집들과 전차 선로들, 그릴 기차들을 장식했다.그러나 관리들은 왜 우리들이 마르크스나 레니의 초상화를 만드는 대신, 혁명을 축하하기 위하여 건물들 위에 루픈 소들을 그렸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샤갈은 이런 비난들을 유머로 대했다. 그는 모임으 한가우나데서 식탁에 두 손을 짚고 두다리를 허공에 치켜들고 물구나무 서고 있는 곡예사로서 레닌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민중들은 그들의 나날의 직장으로 나가고 있는 동안 혁명가들은 그들의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샤갈은 그의 직장을 그만두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모스크바에서는 골키가 그에게 유태인 극장을 장식하도록 일을 맡겼다. 샤갈은 이미 극장을 위해서 일을 한 경험이 있었으며 고골과 싱의 연극의 배경을 설계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스타니라프수키의 (양식 연극)을 놓고 감독의 신념과 큰 차이를 갖게 되었다.  그가 집단적으로 연출을 만들어 내는 감독, 기획, 배우라고 하는 3자의 공동 제작을 조화있게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유태인 그장에 잇는 마이어홀트씨와 더불어서 였다. 그것은 마법적인 분위기를 창조하는 문제였다. 그 속에서 빛과 색채와 같은 가면적인 요소들은 대사나 배우들과 똑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장면의 관례라든가 원근버의 효과 또는 역사적 및 전설적인 효과는 삭제되었다. 연극은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생기가 돌았다.관객의 참여를 늘리기 위해서 샤갈은 극장의 벽을 장식했다. 거대한 프레스코 벽화들은 입체파 수법에 의해 음악, 춤 그리고 문학을 암시했다. 그러나 극장계는-음악가들, 극작가들, 곡예사들, 배우들-도안들이 역학적인 사선과 곡선으로 만들어진 배경과 대조하여 뚜렷이 눈에 띄는 아주 생기 있는 구성에 의해 표현되었다.

 샤갈의 음악, 춤 그리고 연극에대한 사랑은 그의 생애를 통해 음악의 주선율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분야들에 대한 그의 영항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1922년, 샤갈은 베를린에서 전시회를 열기 위한 출국 비자를 얻었다. 그곳에서 그는 부인 벨라와 딸 아이다와 함께 정착했다. 그가 판화로 표현햇던 그의 자서전 (나의 생애)를 쓴 것도 베를린에서였다. 지적인 또는 물질적 수준의 두 가지 면에서 독일은 인쇄물을 출판하기 위한 이상적이니 곳이었다. 샤락은 슈트르크 제작소에서 동판술, 즉 조각침으로 동판을 만드는 법과 목판에 대한 다른 기술들을 배웠다. 샤갈은 또 독일 표현파에 대한 작품, 특히 그로크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라리에 있던 볼라르는 샤갈의 조각의 자연스럽고 미묘한 특성들에 매혹되어 함께 작품활동을 하자고 그를 초청했다. 이리하여 오랫동안의 많은 합작이 시작되었고, 1939년에서 1940년의 전쟁 동안에 볼라르의 죽음으로 인해 끝이 나고 말았다. 볼라르는 처음에 고고르이 (죽은 열령들)들 도해하도록 미술가에게 부탁을 했다. 그 결과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옛러시아의 정신을 재생시키려고 애쓰고 있었을 때에 , 그가 만들고 있었던 작품과 주제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샤갈은 고골의 구상,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배치를 되살리기 위하여 가늘고 꾸불꾸불한 선을 사용했다.

 라 퐁텐의 우화들을 도해하기 위해 샤갈은 자연으로부터 직접 얻어 온 수많은 수와슈 수채화 채료들을 썼다. (나는 전에 비테프스크에서 보았던 것고나는 전혀 다른 새로운 주제들, 남부 프랑스의 꽃들, 사보이 농부들, 살찐 도물들에 몰두했다. 혁명과 배고픔과 그리고 가나을 겪은 후 나는 내 욕망을 자유로이 배불리게 할 수 있었다.

 

샤갈의 우화적인 세계에 있어서 인간과 동물들 사이의 경계선은 뚜렷하지가 못하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의 세계를 공감할 때 우리가 느낄 수 잇는 기묘함과 경이를 설명해 주고 잇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맞지 않아 22년 베를린, 23년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이 때부터는 유화 외에도 화상(畵商) 폴라즈의 의뢰에 따라 많은 판화를 제작하여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작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환상적인 작풍으로 쉬르레알리슴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가 점차 격화되자 41년 도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지냈다.  10년 파리로 가서 14년까지 머물렀다. 그 사이에 A.모딜리아니·C.수틴·J.들로네 등을 알게 되었고, 시인 B.상드라르·G.아폴리네르 등과도 친분을 맺었다. 또 11년의 앵데팡당전에 첫 출품을 하고, 14년에는 베를린 데어슈투름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지기 위해 독일을 방문,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그대로 러시아에 머물렀다.15년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은 샤갈 작품의 중요한 영감(靈感)의 원천이 되었다. 22년 베를린, 이듬해에는 파리로 돌아가서 화상 A.볼라르의 의뢰로 N.고골리의 《죽은 혼》의 삽화에 손을 대는 등 차츰 파리의 유력한 화가로서 주목을 받는 동시에, 그 환상적인 작풍은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다. 41년 뉴욕근대미술관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보냈고, 발레 의상과 무대장치를 담당하였다. 47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50년부터는 남프랑스의 방스에 영주의 터전을 잡았다.

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전(展)에서 판화상을 받았으며, 유화·판화·벽화(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벽화, 파리오페라극장의 천장화 등)·스테인드 글라스·조각·도기(陶器) 제작을 비롯하여 무대 장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초기 작풍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슬라브의 환상감과 유대인 특유의 신비성을 융합시킨 독자적인 개성을 강하게 풍겼다.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루었고,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풀어주는 매력이 있다. 작품으로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바이올린 연주자》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 《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 《서커스》 등과, 자서전에 《나의 인생 Ma Vie》(1965)이 있다.  52년 V.브로드스키와 재혼, 20세기 회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개인적이며 자전적인 내용, 러시아에 대한 향수, 유대인 특유의 전통과 상징에 대한 경애 등 그의 작품의 기조(基調)는 초기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파리에서의 색채의 발견, 입체파의 영향, 상드라르나 아폴리네르 등 전위시인과의 접촉은 그의 예술에 새로운 자양분이 되었다. 색채와 형태에서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이미지를 시적으로 구성하였다. 입체파의 경향은 곧 색채가 넘쳐흐르는 보다 자유로운 스타일로 전환되었고, 그 뒤 그의 환상적 우의표현(寓意表現)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샤갈미술관에 《성서의 메시지(1969∼73)》 작품군이 있다.

샤갈이 재생시키려고 했던 빛과 그림자의 영역들을 표현하는데 필요햇던 기술적인 숙달을 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판화 분야에 있어서는 샤갈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성서)였다. 그가 예술가로서의 그 자신을 남김없이 표현하고 잇는 것은 105개의 에칭들의 시리즈 속에 있다. (성서)는 성지 팔레스타인의 여행과 오랜 세월 동안의 작품 활동의 노력에 대한 결실이었다. 포함된 작품의 양은 각 판의 기술적인 분쇄로 보아 명백하다. 우리는 샤갈이 어떻게 계속적으로 그의 주제들을 간소화하고 세련되게 하여 주제에 추가시킴으로써 재생했는지를 알 수 잇다. 그는 심지어 렘브란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라고 말했다. 샤갈의 판화 작품은 매우 중요하다. 아마 그것은 그의 그림보다도 훨씬 더 많은 예술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잇기 때문일 것이다. 조각침으로 동판을 만드는 기법에 있어서 타관 정확성은 그의 판화 예술을 분명히 표현하고 잇는 그이 상상력, 시학 그리고 섬세한 풍자성의 예민함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의 메시지)을 위하여 그후 샤갈이 채택했던 많은 주제들은 이미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샤갈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의 스타일과 영감에 의한 착상은 완전히 변했다. 그는 극적인 세계상을 묘사했다. 예를 들자면 그의 걸작 중의 하나인 (천사의 타락) 이라든지 혹은 (그리스도 수난상) 같은 작품들이었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 동안 샤갈은 미국으로 피난를 했다. 1944년 그는 이곳에서 부인 벨라를 잃었다. 이때가 그의 생애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샤갈은 지나간 과거와 미래를 함께 부각시키는 커다란 그림들 속에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벨라에 대한 사랑)을 종합하려고 노력했다. 그후, 샤갈의 색채는 그의 작품 속에서 점점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개성을 상실한 인간과 사물들은 산만한 서정시적인 또는 밝은 진동 속에서 융합되었다. 1942년에 샤갈은 뉴욕 발레 극장을 위해 (알레코)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제작하도록 위임 받았다. 안무가, 레오니드 마씬느)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푸슈킨의 시 (집시들)을 곁들여 이 작품을 준비했다. 이 어려운 시인의 비극적 이야기는 샤갈을 깊이 감동시켰다. 그는 녹음된 음악을 들으면서 원문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는 비범하게 암시적인 장레식 환상들이 있는 무대 막에 4개의 커다란 그림들을 그렸다. 우리는 두 개의  거대한 붉은 태양의 더어리 밑에 색채가 활활 타오늘는 밀밭과 도시의 붉은 색조 위에 어두운 하늘 속으로 뛰고 잇는 야생마(두번째 막)을 본다. 이러한 모습들은 언제까지난 기억에 남게된다. 의상들은 특히 반 인간, 반 동물의 잡종인 창조물들은 환상과 창안으로 가득 찬 선형적으로 샤갈적인 것이다. 얼마 후 샤갈은 1950년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에 대한 무대 장치들을 디자인했다. 이 발레는 1915년에 러시아 발레단에 의해 처음으로 공연되엇다는 것을 주목하나든 것은 흥미 잇는 일이다. 이 작품에서 샤갈은 특색을 주역에 두었다. 3막은 마치 마술과 마법의 음침한 분위기에 뒤덮인 것처럼 보인다. 막이 올라가자 벨라를 앎은 젊은 여인을 데리고 검푸른 밤 속으로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가 나타난다. 그녀의 머리의 위치가 이상하게 뒤로 젖혀져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젊은 여인을 위에서 보아야 할지 혹은 아래서부터 보아야 할지 서명하기 어렵다. (그 작품들을 설명 없이 또는 어떤 것을 모방함이 없이 나는 (불새)와 (알펙)이 가지고 잇는 정신을 통찰할 수 있기를 원했다.)라고 샤갈은 말했다. 그리고 똔 (나는 아무것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묘사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색채를 원하고 있을 뿐이다.)

1959년 샤갈은 시카고 오페라 단에 (다프니스와 크로우)를 위한 무대 장치를 제작 위임을 받았을 때 그는 이와 같은 방향으로 더욱 전진했다. 라벨의 음악에 대한 시각적인 등가물을 발견하다는 것은 도전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샤갈은 그의 남부 유럽에 대한 사랑과 일종의 식물적인 정신 착란을 만들어냄으로써 이것을 해결했다. 무대 장치들은 영적인 분위기와 음악의 진동 자체가 된 듯한 빛으로 가득히 차고 넘쳤다.  1947년, 샤갈이 프랑스로 완전히 돌아와서 프로방스 지방의 방스에 정착했을 때, 그이 생애의 새로운 시가 시작되엇다. 그는 발렌타인 브로드스키 (바바)와 결혼을 했다. 그는 행복했고 그의 작품도 이 무렵은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었다. 이 시기부터 소란스런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가 그의 작품 속에 분명하게 등장하게 된다. 태양은 도처에서 찬란한 얼굴을 드러내고, 아름다운 부인들은 마치 꽃다발 속이나 과일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금빛 눈들을 가진 숫양과 수닭- 성적인 상징들- 은 그의 그림들 속에 항상 어는 곳에서나 등장하고, 색채는 형태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더욱더 중요하게 된다.

 

(대지는 너의 손가락 끝들을 태운다.)는 이 지방에서 그는 도자기에 대해서도 눈을 떴다. 방스는 피카소가 살았던 도공자들의 마을인 발로리의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샤갈은 소품들(1950년 마에트에서 전시되었다.)을 장식하였으며, 또한 작고 매혹적인 십상을 본떠서 만들었다. 색채를 크게 중요시한 샤갈은 불에 대한 기법들과 웃칠 물감에의해 표현되는 가능성에 재빨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색채와 내용은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전람회에 대한 포스터와 관련이 있는, 석판화 인쇄 업자인 물로를 샤갈이 만난 것도 마에트에서였다. 물로의 세작소에서 그는 (성서)와 (아프티스와 크로우)의 주제에 기초를 둔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 샤갈은 죄없는 풍자적 세계상을 묘사했다. 이것은 그가 보라르를 위해서 제작했던 (성서)에 관한 최초의 연작물과는 아주 달랐다. (성서)에 관한 연작물의 주제는 인간이 신을 만나게 됐을 때 느끼게 될 두려움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멸의 작품들을 완성하기 위해 샤갈은 가장 솜씨 좋은 장인들, 유리 제조가들, 모자이키스트들, 직공들 그리고 도공들의

마크 샤갈

 

도움을 찾았다. 처음, 그는 다시 고원의 교회를 위해서 도자기 작업을 했다. 그리고 나서 메츠대성당(Metz Cathedral) (앙드레 마르크 (Andre Marc)에 의해 완성되었다.)의 색유리 작업, 예루살렘에 잇는 새로운 하다샤 메디칼 센터의 유태교회당의 열 두 창문들(1962), 미국의 포캔티코 힐즈 (Pocantico Hills)에 있는 연합 교회의 창문들(1970), 그리고 라임즈의 창문 작업을 했다. 샤갈은 색유리를 통한 빛의 움직임에 의해서 이들 거대한 건축상의 공간들을 활기 있게 하는 데 탁월했다. 에루살렘에 잇는 크네세트를 위한 샤갈의 벽걸이 장식 융단들은 파리의 고블랭에서 짜여졌다. 이와 같은 거대하고 오히려 엄숙한 작품들은 (출애급기)와 (다윗의 노래들)을 암시하고 있다. 1968년 니스 시는, 샤갈에게 새 법학부의 거대한 벽을 장식하도록 위임했다. 그리하여 샤갈은 (오뒤세이아)의 주제에 기초를 둔 모자이크를 위해 실물 크기의 밑그림을 디자인했다. 그는 또 니스에 있는 시미즈의 언덕 위의 (성서의 메시지)를 위한 또다른 거대한 모자이크를 만들었다. 예언자, 엘리야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우화적인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불길 같은 전차 위에 올라 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는 동안 앙드레 말로는 샤갈에게 파리 오페라좌의 천장을 다시 칠하도록 부탁했다. 그의 나이 75세임에도 불구하고 샤갈은 상당히 큰 일을 맡는 데에 동의했다. 이 거대한 건물의 공통점이 전혀 없는 엄청난 요소들을 결합하는 것이 필요했다. 샤갈은 채색된 양과 가변성이 있는 형태에 의해서 생기를 불어 넣은 거대한 구성을 착상했다. 비록 그가 만들었던 작품이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조화의 감각을 확립하는데 성고하고 있다.

 1967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위해 샤갈은 모짜르트의 (마법의 피리)를 위한 커튼을 만들었다. 여기에 있어서 샤갈은 함께 융합된 소리와 색채가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총체적인 광경을 생각하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의 음조를 진실되게 표현하기 위해서 샤갈은 막과 의상들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었다. 이전에는 좀처럼 미술가들이 모차르트의 음악과 색채 사이의 일치를 그토록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한 일은 없었다. 샤갈은 이 분야에 있어서 개척자로서 생각되어져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 샤갈의 마음에 가장 가까웠던 계획은 (성서의 메시지)의 제가이었다. 한 채의 작은 건물이 나스 위쪽에 있는 시미즈 언덕 위에 세워졌다. 성서의 주요한 주제들 즉 (출애급기), (창세기) 그리고 (아가서)등을 다루고 잇는 일군의 그림들이 모아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것은 (어떤 확실한 존재를 느끼기 위하여) 이곳 평화의 안식처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색유리 창문들과 모자이크가 완성되었고, (성서의 메시지)는 1973년 업무가 시작되었다. 샤갈은 성경에서 그의 영감의 대부분을 끌어왔지만 그를 진정한 종교 화가라고 일컬을 수는 없다. 또한 여기에서 샤갈을 한정적인 범주 속에 적용시키기도 어렵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의 종교관에는 도발적인 면이 약간 잇기도 하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은 운동과 감각의 절대적인 자유를 가지고 발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샤갈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그림들 속에서 발견하고 있는 인물들을 닮은 비극적 인간들로서 배우와 어릿광대 그리고 곡예사들을 나는 언제나 생각해 왔다. (성서와 서커스에 대한  두가지 주제는 그의 작품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확실한 주기 가운데서 발전하고 있다. 서커스에 대한 샤갈의 매혹은 그가 유년 시절에 보았던 집시의 광경에 까지 거슬러올라가게 된다.그러나 그는 또한 (씰크 디베) (Cirque d'Hiver)에 볼라드와 함께 가기를 좋아했다. 프라텔리니 그록 그리고 쇼콜라와 같은 위대한 미술가들에 의해 창조된 연극들의 에술적인 중요성에 대해 오늘날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서커스에는 마술적인 무언가가 있다.)라고 샤갈은 말한다. 그리고 또 (서커스는 그 자체가 하나으 세계이다. 기쁨과 오락을 찾는 인간의 추구와 관련이 있는 가장 격렬한 외침은 자주 최고의 시의 형태를 취한다.)라고 말한다. 서커스(테리아드에 의해 위임 받았다.)에 관한 연작물에서 나온 이상한 조각은 한손에 법전을 들고 있는 모세상이 서커스 무대 한군데에 나타나 있다. 또 한편 그의 허리띠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매달리고 있으며 또한 시계와 그리스도의 수난상도 매달려 있다. 이 작품의 요점은 성서적 세계와 그리스도의 수난상도 매달려 있다. 이 작품의 요점은 성서적 세계에 대한 샤갈의 통찰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동시에 인간적이며 그리고 인습적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광대들과 성인 들처럼 예언가들은 우리들 세계의 기존 가치들의 끊임없는 변화에 참여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중력은 그들을 억누르지 않는단 말인가.. 어딘가 딴 곳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만일 세상이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것은 우리들인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부끄럼없이 사랑이란 말을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변화 시킬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의 참다운 정신은 사랑에 있다.)라고 샤갈은 선언한다. 우리가 모아 온 것 처럼 샤갈의 작품은 현대 에술의 주류 밖에 위치하고 잇다. 샤갈의 자품은 하나의 이야기를 말해 주고 잇으며, 그의 그림은 하나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이 중요한 것이 되고 있지 않는 시인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이 중요한 것이 되고 있지 않는 시인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의 그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는 동물들과 인간들이 같은 차원에 존재하고 잇다. 사실상 이과 같은 분명한 단순성이 모든 인습적인 장벽을 뒤엎고 말았던 것이다. 샤갈은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특징짓고 잇는 또다른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이 확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의 관점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샤갈은 어떻게 능숙하게 가장 현대적인 문제들을 채탱하는 방법과 또한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그 자신의 해답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가를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한 시대의 아들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매일 매일 조금씩 더 젊어지고 있다.)라고 샤갈은 말하고 있다.시간이 흐름에 따라 샤갈의 역할은 점점 더 분명하게 눈에 띄고 있다. 마르크 샤갈은 마치 이상한 마술사가 또 다른 세계의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나타났던 것처럼 금세기를 특징 지우고 있었던 격변기에 등장했다. 그는 1887년 비테부스크에서 출생했다. 이 고장은 그의 모든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러시아의 정신과 유태인의 전통이 함께 뒤석여 끓어오르고 있었던 곳이었다. 샤갈은 그의 고향과 소박하고 열정적인 국민들을 그리면서 그의 생애를 보냈다. 마르크 샤갈의 시에는 이런 것이 있다.

나는 당신의 대지의 아들

나는 가까스로 걷고 있노라

당신은 내 두 손을 화필과 물감으로 가득히 채웠노라

그러나 나는 당신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알지 못한다.

나는 하늘과 대지와 나느이 가슴을

또는 불타는 도시들을 혹은 또 도망가는 민중들을

눈물로 얼룩진 나의 눈을 그려야만 하는가

아니면 나는 도망가야 하는가, 도망간다면 누구에게로,

여기 대지아래 생명을 낳은그 죽음을 나누어준 그 사람

아마도 그 사람은 나의 그림이 빛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리라.

 

 마르크 샤갈의 시 1940-1945

 

    작가 연보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 1887년 7월 7일, 백러시아 비테부스크 근처의 한촌 유태인 집안에서 출생. 부친은 농산물 하치장에서 일했고, 모친은 무학이었으나 지기 싫어하는 감수성이 강한 미녀. 샤갈은 8명의 누이와 1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과는 어렸을 때 사별.
  • 1895년(8세) 유태인 국민 학교에 입학.
  • 1900년(13세) 왕립 중학교에 입학. 노상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몽상형. 기하와 데상을 빼곤, 다른 학과는 겨우 나가제를 면할 정도.
  • 1906년(19세) 왕립 중학교를 졸업, 숙부의 지원을 받아 비테부스크의 화각 에프터 펜의 아트리에에 들어감.
  • 1907년(20세) 페테르스부르크로 나가 공예 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실패, 왕립 미술 학교에 입학.
  • 1908년(21세) 새로 설립된 바크스트의 미술 학교로 전학. 바크스트에게 배우면서 세잔, 고갱 등의 작품을 알게됨.
  • 1909년(22세) 게속해서 바크스트의 교육을 받음. 일시 미테부스크에 귀향, 나중에 부인이 되는 벨라 로젠펠드를 만남.
  • 1910년(23세) 비나베르의 후원으로 8월 파리에 도착. 공동 아틀리에(벌들의 집)에 입소, 이곳에서 산도랄르스, 쟈코브, 아폴리네르, 드로네, 레제, 모딜리아니 등 후일을 약속 받은 젊은 화가들과 친구가 된다.
  • 1911년(24세) 최초로 앙데팡당전에 출품.
  • 1913년(26세) (서커스)제작 착수.
  • 1914년(27세)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발덴을 알게 되고, 바라덴이 주재하는 잡지 (폭풍) 화랑에서 첫 개인저을 가졌는데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전후의 표현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 1915년(28세) 3월, 모스크바에서 첫 개인전. 7월, 비테부크스에서 벨라와 결혼한 후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사.
  • 1916년(29세) 무남 독녀가 된 장녀 이다 출생. 이다는 이후 출중한 샤갈 연구가이며 평론가인 마이아와 결혼한다.
  • 1917년(30세) 10월, 러시아 혁명 발생. 일가 비테부스크로 귀향.
  • 1918년(31세) 25세 때 사귄 르나챨스키가 교육 문화 담당 인민 위원이 되고, 그에 의해 샤갈은 비테부스크 지구의 미술 우원으로 임명된다. 샤갈은 이곳에 미술 학교를 세우고, 교수로 리시스키, 말레비치를 초빙.
  • 1919년(32세) 말레비치와 싸우고 미술 학교를 그만둠.
  • 1922년(35세) 모스크바에서 개인전. 고국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심, 베를린을 방문.
  • 1923년(36세) 9월, 파리에 도착. 화상 보라르가 고골리의 (죽은 혼) 삽화를 의뢰. 이 책은 1948년에야 출판된다.
  • 1924년(37세) 파리에서 첫 회고전.
  • 1926년(39세) 남 프랑스 지방을 여행. 뉴욕에서 첫 개인전.
  • 1929년(42세) (나의 생애)프랑스어 판을 기획. 31년도에 출간. 치과 의사를 통해 피카소와 첫 상면.
  • 1930년(43세) 페라 카바 체재.
  • 1931년(44세) 보라르로부터 성화의 삽화를 부탁 받고, 팔레스티나, 시리아, 이집트 등지를 여행.
  • 1932년(45세) 네덜란드에 여행, 렘브란트의 작품을 감상.
  • 1933년(46세) 바젤 미술관에서 대회고전. 게벨스의 명령으로 미술관에 있던 샤갈의 작품이 소각됨.
  • 1934년(47세) 스페인 여행, 엘 그레코의 작품을 감상.
  • 1935년(48세) 폴란드 여행. 정치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샤갈 자신의 마음의 불안을 나타낸 (그리스도의처형 )을 주제로 한 작품에 착수.
  • 1936년(49세) 위기 의식에 공감한 피카소와 농도 짙은 교유.
  • 1937년(50세) 프랑스 국적 취득. 이탈리아 여행.
  • 1938년(51세) (하얀)제작
  • 1943년(56세) (황혼), (곡예사) 등 제작.
  • 1944년(57세) 9월 2일, 부인 벨라 사망.
  • 1946년(59세) 뉴욕 근대 미술관과 사키고 미술 연구소에서 샤갈 회고전.
  • 1947년(60세)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에서 회고전. 이 회고전은 암스테르담과 런던에 순회 전시.
  • 1951년(64세) 이스라엘에 2주 동안 여행, 이후부터 조각 작품도 제작.
  • 1952년(65세) 7월, 발렌티나 브로스키와 재혼.(다프니스 와 쿠로에) 연작을 위해 그리이스 여행.
  • 1953년(66세) 연작 (파리) 착수.
  • 1954년(67세) 런던에 잠시 머물렀다가 그리이스에 두 번째 여행. 석판화 (닾프니스와 쿠로에) 시리즈에 착수.
  • 1955년(68세) (성서의사자) 연작에 착수, 1966년에 완성된다.
  • 1956년(69세) 서커스를 테마로 한 석판화 제작.
  • 1957년(70세) 이스라엘을 세 번째 방문. 테리아드 시에서 (성서) 출판.
  • 1958년(71세) 시카고 대학에서 강연. 발레 (다프니스와 쿠로에) 장치와 의장을 맡음. 메츠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를 위한 초벌 그림 습작.
  • 1959년(72세) 파리, 뮌헨, 함부르크에서 회고전.
  • 1960년(73세) 메츠 대성당 회랑의 두 번째 문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 코펜하겐에서 에라스무스상 수상.
  • 1961년(74세) 예루살렘 유태 교회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
  • 1962년(75세) 위 스테인드 글라스 완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네 번쩨 이스라엘 방문. 메츠 대성당 후진의 첫 번째 창 스테인드 글라스 완성.
  • 1963년(76세) 파리 오페라 극장의 천장화를 완성. 5월 워싱턴 방문. 동경, 경도서 대회고전.
  • 1964년(77세) 뉴욕에 여행, 함마슐드, J.D. 록펠러를 기념하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 파리 오페라 극장 천장화 완성식을 거행.
  • 1965년(78세) 뉴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벽화 제작. (출애급기)를 위한 24점의 석판화 제작.
  • 1967년(80세) 샤갈 타난생 80주년을 기녕하는 대회고전이 취리히와 게른에서 열림.
  • 1968년(81세) 워싱턴 여행. 니이스 대학을 위한 모자이크, 메츠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 뉴욕의 마티스 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 1969년(82세) 니이스에 세워질 국립(샤갈의 성서의 사자 미술관)착공. 73년도에 낙성. 6월 이스라엘 국회의사당 타피스리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 방문. 취리히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초벌 그림에 착수.
  • 1982년(95세) 7월 7일 샤갈 미술관이 잇는 니이스에서 95회 생일을 축하하는 (95회 생일전) 개최

좋은 경험이긴 했다. 뽀시시한 그의 그림은 그의 밝은 가치관을 드러내 주는 듯하다. 나는 예술가 중에서도 그렇게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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