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사태가 끝난 뒤에야 도착해 한탄하거나 감탄하거나 하는 나는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비로소, 

2000년대 중반 우리 시단에 '나'라는 자의식 강한 고백류의 시가 진부해지고, 서정과 정념으로 '소통'하고자 한 시와는 다른 흐름이 있었음을 배운다. 이미 10여 년 전 일인데, 지금도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환상과 초현실적인 언어감각으로 시를 쓰는 일군의 시인들을 신형철은 뉴웨이브 시로 묶는다. 

중심의 부재, 진리에 대한 무감각 또는 조롱, 심층이 아니라 표층에서 건져올려진 새로움, 모색. 

새로운 감각. 익숙해진 것들과의 결별. 신선한 자극. 이런 것들에 목말라 했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들. 

난해함과 이해부득의 곤경을 뚫고 도달하는 어떤 감각. 


기꺼이 이제서야 2000년대 중반의 시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고, 다시 랭보, 이상을 더듬거려봐야 할 것만 같고, 한참이나 지나 때늦게 다시 돌아온 그들을 나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독서일 것 같다. 





















이상의 [오감도] 15편 전편을 볼 수 있는 시집이 흔치 않은 것 같다. 

15편 전편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나풀나풀 스웨터를 벗는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상추를 사고 깻잎을 사고 나는 스웨터를 벗고 원피스를 벗고 피어오르는 솜털들을 벗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닦고 있던 거울에 매달려 낮잠을 잔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검은 페인트로 정원수를 칠하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심이 까만 연필을 밤새 깎는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흑연가루에 목이 메어 눈에서 구름을 뚝뚝 흘린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배꼽을 어루만지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붉은 신호등을 어깨에 매달고 달려간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산부인과에 다녀오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연탄불을 피워 가스에 질식된다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구급차에 실려가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의사를 사랑하고 애인은 고기를 사고 나는 자궁을 꿰매고 애인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고기를 사고 나는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구두를 닦고 애인은 스무 해째 고기를 사고 나는 애인이 있는 정육점을 지나 스무 해째 훨훨훨 공중으로 하관되는 엘리베이터를 오르고 애인은 정육점에 배달된 나의 엘리베이터를 끄르고.


                                   - 이민하, 「애인은 고기를 사고」, 『음악처럼 스캔들처럼』(2008, 문학과 지성사) - 



흥미로운 시였다. 신형철은 " '애인'의 완강한 동일성과 '나'의 끝없는 전락이 대립"되면서 형성되는 긴장을 지적했다. 

2005년에 발표된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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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0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은대요. 애인은 고기를 사고..

신형철은 뉴웨이브라 하고 권혁웅은 미래파라 하고...
전 감성이 둔한지 확 와닿지는 않습니다만... 몇몇 작가는 좋습니디ㅏ. 황병승의 시는 이상하게 좋더군요..
이민하 시집 한 권 사서 읽어야 겠습니다...

포스트잇 2016-08-05 14:11   좋아요 0 | URL
좋죠? ㅎ 시집에서 몇편이라도 건진다면 되는거죠..곰곰발님의 시 해설도 좋습니다^^ 조만간 몇편 쓰실거라 기대해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