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낭만적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소설이라는 건 낭만을 덧입혔다.

모스크바 외곽에 살면서 매일 '척추질환 및 바이러스성 뇌염 연구소'로 출근했던 레오니드 치프킨이 일정 시간을 바쳐가며 썼던 그의 마지막 소설이다.

문학청년이었고 영화를 좋아했던 그였지만 직업은 의사이자 연구자였다.

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 시기를 살면서 유대인으로서 불행한 개인사를 지녔다.

해외 출국이나 이민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시절, 먼저 아들내외가 이민을 갔고 그로 인해 치프킨 부부는 곤혹스러워진다.

한번 허용됐던 출국 때 소설 사본을 빼돌려 미국인 부부에게 맡긴다.

이것이 해외에서 그의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하는 길이 됐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치프킨은 해직되고 해외에서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한 후 일주일 째인 어느날 아침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한다.

 

이 소설은 화자인 나(치프킨)가 아내와 함께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면서부터, 1867년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바덴바덴으로 향하던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여정을 함께 떠올리며 시작한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채무에 허덕이고, 유형지에서 살아돌아온 후유증으로 우울증과 발작을 앓기도 하는 어쩌면 익히 알고 있는 상태였다. 안나의 헌신으로 겨우 버텨가던 중이었다.

독일 바덴바덴의 여름은 그 한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치프킨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안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쏟아낸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다. 바덴바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심각한 도박증과 강박증, 열등의식, 의처증, 발작을 일으킨다.

그때마다 뒷수습을 하고 참아내며 생활을 이어가는 건 안나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막막하고 불행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날이었다.

바덴바덴을 떠날 수는 있을까, 지옥같은 곳에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공포를 느낄 정도까지 안나의 정신을 몰아가는 생활이었으니.

 

짧은 시간의 단 한번 출국 허가를 받아봤던 치프킨으로서는 바덴바덴, 바젤, 파리... 등으로 이어지는 도스토예프스키 부부의 여정을 따라가며 쓴 묘사는 순전히 상상과 몽상, 몽환이 섞이며, 안나의 일기를 토대로 한 사실과 허구가 공존한다.

안타까움과 절망과 그럼에도 느껴지는 두 사람의 사랑이라는 관계가 담담하게 묘사되고 서술된다. 무겁다.  

객관적인 묘사 위주의 문장을 구사하는 게 어찌보면 답답하고 참담한 일들, 감정의 연속으로 점철된 이 소설을 그나마 읽을 수 있게 했던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 전 작품에 대한 치프킨의 분석과 자신만의 관점을 갖지 않았다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게끔 자극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스위스 바젤에 있는 사원의 박물관에서 본 한스 홀바인의 젊은 시절 그림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그림과 관련된 장면은 이 소설에서 내겐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 부부는 마침내 바덴바덴을 떠나 바젤에 도착했고 그곳 박물관에서 이 그림을 보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치프킨은 본다.

십자가에서 내려져 무덤에 안치된 그리스도의 모습. 앙상하게 마른 몸. 이미 검게 된 얼굴과 부패가 시작된 듯한 발.. 등

그야말로 시체다운 시체의 모습으로서 그리스도를 그린 것.

치프킨은 이 그림이 소설 [백치]의 모티프가 됐다고 쓴다.

 

이 그림은 신앙을 잃게 만든다. (203)

 

이것이 아마도 [백치]의 중심 생각이었을 것이다는 것.

실제로 [백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1869년에 출간한 소설인데 약 2년간 집필된 것으로 알려졌다.

바덴바덴으로의 여행과 맞물려 있다.

 

[백치]에 나오는 로고진의 집 문 바로 위에 걸려 있던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것이 고로호바야 거리에 있는 로고진의 집 문 바로 위에 수평으로 길게 걸려 있게 되는 그 그림이었다. 그렇다.

이 그림은 바로 그곳에 걸려 있어야만 했다. 미슈킨 공작도 스위스에서 이 그림을 보게 되는데, 이 인물은 지금 의자 위에 서서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도스토예프스키는 박물관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이 그림을 본다. 박물관 직원의 제제를 받지만 한동안 그렇게 서서 그림에 빠져있다]과 똑같은 생각, 즉 '이런 그림은 신앙까지 빼앗을 수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도스토예프스키가 로고진의 형상을 떠올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작고 타오르는 눈빛을 지닌 상인 로고진은 오만하되 이미 무너져가고 있는 한 여자에 대한 욕망으로 타오르는 인물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영원한 여주인공인 이 여자는 그의 감각을 병적으로 자극했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 욕망은 결코 만족되지 않았다. 미슈킨 공작이라는 인물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아직 떠오르지 않은 때였다. 절반은 그리스도이며 절반은 돈 키호테인 이 슬픈 모습의 기사는 지금 의자 위에 있는 사람처럼 간질병 때문에 고통받는다. (202)

 

 [백치]도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터라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치프킨은 죽음에 깊이 경도된 듯하다고 그의 아들은 말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 장면이다.

폐출혈로 계속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도스토예프스키.

그 옆을 지키는 안나.

아마도 페미니즘에서 안나를 본다면 많은 얘기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이 향후 러시아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작가이고 사랑한다면 이렇게 살 수도 있는 모양이다.

 

러시아 문학의 깊이와 매혹을 경험하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수전 손택의 권유가 아주 허황된 말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특히 [백치]는 조만간 읽을 것이라는 목록에 집어 넣어뒀으니까.

열린책들 판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읽는다면 얼떨결에 읽었던 과거 어느 때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지.

이번엔 좀더 많은 걸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인물들에 대해서도.

두번 째 읽는 [백치]는 어떨까.

 

 

 

 

 

 

 

 

 

 

 

 

 

 

 

 

그리고 치프킨의 러시아의 시인 츠베타예바의 시를 좋아했다는데,

 

어디서든 떠나는다는 것은 곧 하나의 죽음과 같네 (198)

 

를 인용했다.

바덴바덴의 악다구니같은 짧은 체류를 드디어 벗어나 떠나는 때에 느끼는 회한을 치프킨은 츠베타예바의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살아왔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과 같은 정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

평생 KGB와 소련 정부를 두려워해서 떠나고 싶어했던 치프킨이었지만 이민 허락은 끝내 내려지지 않고

고향이 아닌 곳에서 결국 삶을 마감했다.

절묘한 표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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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7-2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덴베단 좋죠 ? 저도 수전 손택에 이 소설을 극찬하는 것을 읽었습ㄴ디ㅏ. 하도 칭찬을 하길래 이 소설을 읽었는데 정말 칭찬할 만하더군요. 꽤 재미있게 읽었습ㄴ디ㅏ.

포스트잇 2015-07-27 14:48   좋아요 0 | URL
아주 재밌게 읽었다..고는 하기 어려워요ㅎㅎ 읽다가 딴데로 새기도 했으니까요.사실 수전 손택의 극찬이 쉽게 이해되는건 아닙니다. 안나라는 인물에 이입하게 되던데요..답답함의 연속이었습니다..작가가 굉장한 거리를 두고 썼구나, 생각했네요..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저 그림과 백치 때문인듯요ㅎㅎ

다락방 2015-07-2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나의 입장, 안나가 가진 생각이 궁금해서 이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 포스트잇님. 저도 꼭 읽어보도록 할게요. 불끈!

포스트잇 2015-07-27 15:52   좋아요 0 | URL
네,꼭 읽어보시고 재밌는 글 올려주세요^^다락방님 덕분에 내팽개쳐두지 않고 다시 꺼내 읽었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