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타의적이진 않지만)떠밀리듯 이일 저일을 맡기로 하고, 때문에 이것 저것을 해야 하는 고리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이래도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식신상관 계열의 사주를 가졌다면 이런 것들이 자기 살 도리로 이어질 확률이 높겠지만 그와는 멀기에 생활은 거기서 거기거나 홀쭉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내 결정은 현실적이기 보다는 마음이 닿는 곳에 정박한다.  곤혹스러운 일이다.

어지러운 날들이 계속 되는 와중에 스티븐 킹의 [11/22/63]이 나의 피로회복제가 돼주었다. 한 마디로 재밌다. 킹의 솜씨는 '대단하다'.  

장르소설, 대중소설의 재미로 괜찮다. 뭐, 주인공 제이크가 몇 세대에 걸쳐 남을만큼 독특하고 매력있는 인물이다,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다. 대충 할리우드 영화 속 인물들이나 그 역할을 했던 배우들 몇이 연상될수 있을 정도로 낯익을 수 있다.

또 시간여행이 어쩌다 사랑여행으로 치우쳐가면서 내가 딱 싫어하는 '위대한 사랑' 얘기가 계속되기도 해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뭐 이정도는 이런 장르, 소설에서는 눈 감아 줄수 있다. 이 정도는 다 이해하고 읽는 것이니까.

김훈 할아버지가 인터뷰에서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쓸 수 있는 소설이 몇 편이나 될까를 생각한다는 걸 보고 아, 늙어가는 사람에게 남은 시간에 대한 생각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이후로 가끔 내가 앞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쓰잘데기 없는 책을 읽고 있어도 괜찮나, 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 일도 생겼다. 시간이 아깝다는, 예전에 안하던 생각도 하게 됐다. 예전엔 뭐 어떤 식으로든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라는 기대로 닥치는 대로 흡수하고 보자는 양 중심적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나라면 그 '양'마저도 충분치 않았던 것 같지만.

 

다시 [11/22/63] 얘기로 돌아가자면 김용언의 글대로 이건 케네디 암살에 대한 2000년대식 재인식 그런 게 중요한 얘기가 아니다.

과거는 고집이 세다. 나비효과. 과거를 손대려 하면 할수록 다른 시간 다른 곳 다른 인간들에게 미묘한 어긋남이 생기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엉킨다. 과거에 손대면서 생긴 보이지 않는 끈들이 엉켜버리는 것이다.

'토끼굴'의 문지기 같은 그린맨(혹은 옐로우맨, 블랙맨...)의 참담함은 아찔하지 않은가.

자꾸 과거에 손대려 할수록 텅비어버리는 허수아비.

이럴 땐 과거가 고집이 세다는 게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과거가 저항해 올 때 순수히 받아들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잖은가. 무기력하게 패배적이라고? 어쩔 수 없잖아.

그럼 앞만 보고 갈 수는 있는가? 과거는 고집이 세다니깐 그러네.... .

 

내가 좋아했던 인물은, 미미여사. 제이크가 운명적 사랑 새디를 만난 조디의 한 고등학교의 사서이자 교장의 연인.

사서이면서 40여 년간 교사로 일했던 미미는 날카로운 관찰력과 통찰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지혜로운 여자이자 배짱 두둑한 여인이다. 아주 짧게 등장했다가 사라지지만 나는 이런 인물이 좋다.  

글 잘 쓰는 대가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대사들은 가끔 질투가 느껴질 정도고, 그런 것들이 킹의 소설을 끝까지 붙들고 있게 한다. 가끔 실망스러운 부분이 나올 지라도.

 

킹이 시간여행계의 걸작이라고 언급한 잭 피니의 [Time and Again]도 보고 싶다.

잭 피니는 [바디스내쳐]의 작가다.

 

킹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장 문학적으로 좋았던 작품은 [Different Seasons]였다. 물론 다 읽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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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4-20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킹의 매력에 빠지셨군요. 옛날에 문학 묌 갔다가 박사 과정 밟는 어떤 이와 싸운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셰익스피어 전공자였는데 저보고 누굴 좋아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킹'이라고 했더니 웃는 겁니다.
그래서 티격태겨했는데... 이 글보다가 갑자기 생각났씁니다. 아, 이거 어디다 썼는데 ㅎㅎㅎ 잠시만요...




http://blog.aladin.co.kr/749915104/6247488.

킹은 정말 무시무시한 작가이비다.

포스트잇 2013-04-22 11:34   좋아요 0 | URL
제껀데도, 잘 들여다보지 않는지라... 오늘에야 곰곰발님의 댓글을 보네요^^,
쓰셨던 페이퍼도 오늘에야 봤네요,
그와같은 전투를 벌여본지가 까마득하네요. 전투력이 상실되어서리...
(그건 그렇고, 심야버스는 왜 이제야 나왔답니까? 한창일 때는 정말 매일같이 만나서 술마시고 얘기하고 저런 싸움도 하고 그랬는데 말입니다~ 한밤중에 길에 택시비로 뿌린 돈이 얼만지.. 잠은 꼭 집에서 자는 버릇이 있어서. 젊을 때야 심야버스도 괜찮을 것 같고, 안그렇습니까? 헤헤)


[스탠 바이 미]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영화로만 봤던 건데(아, 이것도 까마득하군요).... 열두살의 크리스같은 녀석을 만들어낸다는 건 대단한 일 아닙니까?
영화 <굿윌헌팅>의 벤 애플렉은 아마 크리스의 청년 버전이겠더군요. 이제야 알아봤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만큼이나 좋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