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계절도 더 나아가지 않고 딱 이쯤에서 멈춘다면. 여리여리한 연초록 잎들의 나무들을 보노라면 곧 짙어져 탁해질 한여름의 우람한 나무들은 생각하기 싫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서 청춘과 젊음의 싱그러움을 발산하다가, 우렁우렁해지다가 쪼그라들어간다. 그리고 다 내놓고 '나머지는 침묵'이다.

'어쩔 수 없는 건 결국 어쩔 수 없다'고 한 김훈의 문장이 쓸쓸한데, 늙고 죽는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생각 앞에서 깊어지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참혹할 것 같다. 이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찌해볼 수 있는 일로 바꾸려는 욕심들이 곧 탐욕으로 바뀔 날들을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리사 프라이스의 [스타터스]는 돈만 있으면 200세라도 어린 몸을 '렌탈'해서 젊음을 누릴 수 있는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단기 임대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영구렌탈'을 노리는 기업과 그와 결탁한 정치인도 있다. 자본과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무한탐욕을 만날 때 벌어질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상을 설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얘기일 것 같아서 냉큼 읽었다. 소재나 작가의 상상력도 높이 사줄만 한데 <트와일라잇> 같은 류로 분류할 수 있겠다. 간혹 허술한 대목들이 나오지만 주인공이 10대이니 치밀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뭐, 그 정도로 이해해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또한 영화화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염원이 곳곳에 보이는 엔터테이너적 소설이라서 깊은 완성도를 바라지도 않는다면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10대인데다 삼각 로맨스는 기본이다.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게 렌탈되어 그 기간 동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채 몸을 돌려받는다면 어떨까. 렌탈된 동안 이식된 칩에 문제가 생겨 수시로(정말 편의대로) 원주인 스타터스와 렌탈엔더가 텔레파시로 소통하듯 얘기할 지경까지 이르면 어떤가? 게다가 렌탈한 자가 내 몸을 이용해 누군가를 암살하려(아, 물론 그와 같은 반사회적 행동은 칩에서 제거되어 있지만 세상이 어디 법전에 있는대로만 움직이던가? 칩을 변형하거나 수정하는 '테크니션'도 이미 시장을 형성하고 있지 않겠는가?) 한다면 어쩔 것인가? 재밌는 상상인데, 흔하디 흔하게 보는 할리우드 영화를 상상하면 전개가 어찌 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좀 경악한 건 마지막 부분인데, '올드맨'과 관련된 부분이다. 주인공 캘리의 로맨스와도 관련 있는 인물인데, ... 이 무슨 매저키스트적인 판타지라는 말인가. 여자들이 흔히 갖는다는 나쁜남자에 대한 판타지에다가, 또 흔히 여자들이 갖기 쉬운 약점, 악한 남자일지라도 자신이라면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비운의 주인공 코스프레 판타지를 느끼게 한다. 오, 약한 자여 그대는 여자이니.

 

 

 

 

 

 

 

 

 

 

 

 

 

 

 

 

세대간에 착취 수준을 넘어 그야말로 전쟁에 이르는 미래가 진짜로 올까? 베르베르의 단편 [황혼의 반란]은 [스타터스]와 반대로 연고없는 노인들을 체포하여 죽이는, 미래에 있을 법한 일을 생각해 본 것 같다.

엔더들은 젊은이들이 젊음을 '낭비'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신들이 그 몸을 렌탈할 이유를 찾고,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일도 안하고 밥만 축내고 재정을 축낸다'고 소거를 생각한다면, 그 세상은 '디 엔드'일 것이다. 아, 이 좋은 봄날, 어쩌다 흉흉한 상상을 하게 됐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2-04-2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되게 궁금했거든요. 나름 생각하기로는 sf 적이며 스릴러이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이..[트와일라잇]과 비슷한 부류라구요? 저는 [트와일라잇]을 좋아했지만, 그런 비슷한 류는 별로인데..
그래서 에잇 읽지말자 했다가 마지막에 포스트잇님께서 경악하셨다는 그 부분이 막 궁금해져서 다시 읽어볼까 싶네요. ㅎㅎ

포스트잇 2012-04-24 12:09   좋아요 0 | URL
저도 '되게 궁금'해서 읽었어요.궁금함을 참지 못해서.. 영화화를 원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악은 그냥 제가 느낀거라서,나이든 사람들은 금방 눈치챌 것 같습니다만... . 점심 전이신가요? 맛있는 점심 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