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동 266번지의 '양극화 대물림'

<현장> 98세대 3백여명 주민들, 심각한 의료양극화 겪어

<사례1> 희귀병으로 인한 가정 경제 파탄

포이동 266번지에서 태어난 형준이는 심작판막증에 간 문정맥 혈관기형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4살짜리 아이다. 형준이는 2004년 ‘1종 의료보호’ 대상자가 됐지만 정기적인 지혈주사, 혈관 투시조영, MRI 등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과일장사로 한달에 60만원을 버는 형준이 아버지는 이미 아들의 수술비용으로 신용불량자가 된지 오래이고 형준이는 민간차원의 지원 없이는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사례2> 가난과 질병으로 인한 3대에 걸친 의료비부담의 대물림

김모 할머니는 포이동 판자촌에서 20년동안 손자, 손녀와 살아가고 있다. 결혼한 아들과 며느리가 도망쳐 버린 이후 할머니는 홀로 손자와 손녀를 키워오다 현재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

손자(23)는 중학교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중학교 시절 유망한 양궁선수였던 손녀(21)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힘든 병수발을 계속하고 있다.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권자이지만 남매가 성인이 됨에 따라 언제 배제될 지 모르는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강남의 판자촌, 타워팰리스 아래 위치해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포이동 266번지의 빈곤은 '현재진행형'이다. 79년 강제이주 이후 어렵게 살아온 주민들의 삶은 이어지는 빈곤의 대물림으로 인해 심각한 사회양극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빈곤은 소득의 격차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건강권을 파괴했고 현재에 이르러 이 지역의 의료양극화는 가계를 파탄시키고 그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포이동 주민들을 통해 본 서울시의 의료양극화

사람연대와 건강세상네트워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행동하는 의시화, 희망사회당 서울시당 등 5개 단체는 9일 오후 3시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함춘회관 3층 대강당에서 ‘포이동 266번지를 중심으로 본 서울의 양극화’를 주제로 보고대회를 가졌다.

보고대회에서 공개된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에 대한 의료실태보고서는 우리 사회에서 양극화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불투명하게 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의료보고실태보고서는 지난 2006년 4월부터 5월까지 두 달에 걸쳐 현장 무료진료 봉사와 동시에 진행된 설문조사를 토대로 작성됐다.

포이동과 서울시, 강남구 주민을 비교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외래 및 입원 이용률이 타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은 반면 건강검진, 암검진을 비롯한 건강검진 수검율은 현저히 낮았다.

포이동 주민의 가구단위 외래 이용율은 최근 2주 기간을 기준으로 36.4%에 달했다. 이는 강남구 19.3%, 서울시 18.9%에 두 배에 달하는 수치.

반면 지난 2년간 신체검사 또는 건강검진 수검율은 남녀 모두 강남구(남 63.2%, 여 53.1%), 서울시(남 53.1%, 여 43.3%)에 비해 현저히 낮은 비율(남 31.6%, 여 30.4%)을 기록했다.

보고서를 발표한 김창보 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국장은 “건강진단 수검율이 낮으면서 외래 이용율이 월등히 높다는 것은 포이동 주민들이 예방을 목적으로 의료이용을 하지 못하고 각종 질병을 앓으며 질병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포이동 주민들은 불안정한 주거상황과 그로 인한 저소득으로 인해 질병이나 손상이 잦고 그때그때 일회적으로 의료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포이동 주민 3명 중 2명 “의료비 부담 때문에 병 키운다”

포이동 주민들은 지난 2년간의 위암, 자궁암, 혈압검사 등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검사받는 항목에서도 10%이상 떨어지는 수치를 기록했다.

이같은 의료이용실태는 건강보장의 미흡이 원인으로 실제 포이동주민들의 건강보험 미가입율은 10.5%로 서울시(0.7%), 강남구(0.6%)에 10배에 달하는 높은 수치를 보였다.

김 국장은 “포이동 주민들은 기초의료수급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며 “10.5%라는 미가입율 수치는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밖에도 신체의 손상으로 주요활동을 전혀 못하거나 다소 제한이 있는 주민들은 20.8%, 이로 인해 1년간 하루 이상 입원한 경험자는 27.3%에 달했다. 또 의료비 부담으로 의료이용을 못했거나 병을 키운 경험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도 각각 67.4%, 72.7%로 주민들 3명 중 2명이 저소득으로 인한 의료차별을 경험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겪는 소득수준에 따른 양극화가 교육, 의료, 주거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김 국장은 “포이동 주민들의 사례는 우리 사회의 건강보장이 저소득층의 안전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며 “차상위계층에 대한 지원학대, 의료급여 수급자 확대를 통해 의료보장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국장은 “건강권이 보장되지 못하면 치료비 부담으로 인한 빈곤과 불건강의 대물림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저소득층 자녀의 불평등 해소를 위한 공공정책 수립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금민 사회비판아카데미 이사장은 “빈곤은 사회적 산물이며 빈곤이 존재하는 사회에는 이를 생산하고 확대하는 기구가 작동하고 있다”며 “국가가 탈빈곤을 위한 포괄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때만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포이동의 70, 80년대 주민수난사 해결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해오고 있는 사람연대는 대책위원회를 구성, 향후 주민등록 회복을 강남구에 요청하고 수용되지 않을 경우 정식 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다.

시민단체 “포이동 주민들에게 자행된 국가의 인권유린 진상규명 운동 벌일 것”

현재까지 강남구는 포이동 주민들에게 강제퇴거방침을 내리고 이들의 주민등록 전환을 10년 넘게 거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자녀교육 등의 기초생활에서 상당한 불편을 겪고 있다.

이밖에도 지금은 정부 측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70년대 말 자활근로대의 진상규명 조사를 위해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접수 등을 통해 ‘국가에 의한 강제이주와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할 예정이다.

포이동 주민들은 지난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빈민 강제이주 프로그램이었던 ‘자활근로대’에 포함돼 포이동 266번지로 강제이주 당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지만 강남구청은 이들에게 강제퇴거 명령을 내리고 불법점유에 따른 수십억원의 토지변상금을 부과한 상황이다.

시민단체들은 국가권력에 의한 포이동 주민들의 강제이주가 증명될 경우 명예회복과 함께 현재 강남구청 주민들에게 부과한 ‘불법점유에 따른 수십억원의 토지변상금’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 최병성 기자 (1895cbs@views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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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30년대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스페인내전을 그린 어네스트 헤밍웨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인공인 로버트 조던은 전선에서 사랑을 꽃피운 연인 마리아를 떠나보낸 뒤, 교량폭파라는 마지막 임무를 사수하며 죽어간다.

1970년대 인류의 양심을 시험하던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의 한 여의사는 어느날 밤 의약품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가다가 100명이 넘는 미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야전병원을 지키기 위해 혼자서 총을 쏘며 맞서다 죽어갔다. 그가 병원을 사수하는 동안 부상당한 그의 동료들은 피신해 목숨을 구했고, 이제 그의 죽음을 그의 일기를 통해 기억한다.

“훗날 당신이 사회주의의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햇살 아래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 위해 피흘린 사람들의 희생을 기억해 달라.”

23살에 전선에 뛰어들어 27살에 미군의 공격을 막다 숨져간 여의사의 일기가 36년 만에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고 있다.

혁명의 열정, 전쟁의 비극에 대한 성찰, 고뇌를 솔직히 다룬 북베트남 공산군의 야전병원 외과의사 당투이짬의 일기가 지난해 <당투이짬의 일기>로 출간돼 30만부가 넘게 팔렸다.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미국을 흠모하는 베트남 젊은이들에게 혁명과 전쟁의 생생한 감정이 35년 전 숨진 한 여전사를 통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등 미국의 언론들도 30일 이 일기를 보도하는 등 미국에서도 당투이짬의 열기가 전해지고 있다.

“바로 어제 중상을 입은 21살 병사는 내가 도울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애타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렇지만 나는 도와주지 못했고, 그가 무기력한 내 손 안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눈물만 흘렸다.”

일기는 젊은 독자들에게 역사의 한 시대에 휩쓸려 전투에 나선 베트콩 전사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이며, ‘인간의 얼굴을 한 이데올로기’에 떨쳐일어났을 뿐임을 보여준다는 반응을 얻고 있다.

미군의 공격 와중에 앞부분이 사라진 채 남아 있는 이 일기의 첫 부분에서 짬은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사방에서 적군의 총성이 들리는 가운데 이미 이런 광경에 익숙해진 나는 배낭을 매고 달리고, 숨는다. 전장에서 이미 2년을 보냈고 이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1969년 11월26일)라고 썼다. 죽기 이틀 전에는 엄마를 부르며 “내가 이렇게 외로울 때 제발 나에게 와서 내 손을 잡아줘요. 나를 사랑해주고, 내 앞길에 놓인 어려운 길을 지나갈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줘요”라고 호소한다.

전사의 일기는 정치적인 구호나 영웅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감정과 나약함, 젊은 여성의 사랑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전선에서 헤어진 첫사랑을 부르며 “M, 어디 있어? 우리가 정말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거야? 내 사랑. 왜 나는 내 심장이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라고 절절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을 엄격한 전사로 단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드러난다.

그가 숨진 곳에서 이 일기를 수거한 당시 22살의 미군 정보장교 프레드 화이트허스트는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불태우려 했으나, “이것만은 태우지 말라”는 남베트남인 통역병의 만류로 30년 동안 간직해 왔다. 지난해 그가 미국 텍사스공대에 기증한 이 일기는 결국 당투이짬의 가족에게 되돌아갔다.

지난해 이 글들이 처음으로 신문에 연재됐을 때 베트남인들은 연재된 일기를 오려내 돌려보고 서로 읽어주기도 했다. 당투이짬이 숨진 꽝찌성에는 그의 이름을 딴 병원이 지어졌으며, 하노이 외곽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안경환 영산대 베트남학과 교수가 한국어로 번역을 마치고 7월 이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안 교수는 “지난해 베트남의 10대 뉴스로 꼽히기도 한 당투이짬의 일기는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애국심과 전쟁의 잔혹함, 휴머니즘을 느끼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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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음녀가 있는 풍경(2) - 이택광
'그림으로 읽는 근대 3'

 

월간말 editor@digitalmal.com

 

이택광 | 문화평론가

우리는 매음녀를 공공연하게 사랑도 없이 돈에 몸을 파는 여자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런 규정에 하나 보태야 할 사항이 있다. 매음녀는 그렇게 무수한 익명의 개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일시적 관계 이외에 다르게 삶을 연명해 나갈 방도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프랑스 시인 앙리 뚜로의 말이다. 이 말에 이어 뚜로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떤 가혹하고 포악한 형벌로도 이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를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이런 주장을 오늘날 누군가 한다면 분명히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이다. 언뜻 보면 뚜로는 매음녀를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로 찬미하면서 성매매 행위를 인정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성매매 문제로 남성중심주의와 한판 일전을 불사해온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뚜로의 말은 에누리 없이 마초의 발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꼴이다. 그러나 뚜로가 이 문제의 발언이 담긴 책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를 출간할 1904년 당시는 페미니즘이 그렇게 주요한 이슈로 부각될 무렵이 아니었으니, 뚜로의 발언에서 이를 문제 삼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 아닐까 싶다.

내 생각은 이렇다. 뚜로의 말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불행한 운명에 처한 존재에 대한 옹호로 읽는다면, 이 말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뚜로는 매음녀를 ‘타락한 악녀’로 보는 일반적 상식에 대항해서, 매음녀는 성매매 이외에 다른 생계 수단이 없는 존재이기에 기존의 도덕기준으로 가혹한 처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요량으로 이 글을 썼던 게다. 나는 이렇게 성매매를 둘러싸고 인터넷이나 기타 여러 매체에서 진행되는 논쟁에서 이런 선의에 기반해 각자의 말들을 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 김영민의 말처럼, 진정한 대화는 어떻게 잘 말하는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잘 듣는가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의 연원

나는 이런 뚜로의 말이야말로 당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파리지앵들의 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엇인가?
한국처럼 반쪽 날개로만 위태롭게 날아온 나라에서 이 말은 곧 ‘불온세력’이나 ‘좌경용공세력’이라는 말과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요주의대상의 기표이다. 어느 학술대회에서 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을 맑스가 만들어내었다고 주장하시는 한 교수님 덕분에 조금 즐거웠던 적도 있었지만, 여하튼 아직까지도 프롤레타리아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에서 무엇인가 장벽을 느끼게 만드는 말인 게다.

어원적으로 보자면,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라틴어 proletarius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로마제국 시절에 가난한 하층계급 시민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글자 그대로 드러나는 뜻을 헤아려보면, 이 말은 “먹여 살릴 능력도 없는 주제에 애새끼들만 줄줄이 까놓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로마의 귀족이나 상류계급이 하류계급을 벌레 취급하면서 내뱉던 욕인 셈이다. 이런 말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 놀부가 흥부한테 하던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맑스에 이르면, 이런 일반적 의미에서 ‘가난뱅이’를 비하해서 지칭하던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이 전혀 다른 뜻으로 거듭난다. 여기에 우리 맑스 할아버지의 탁월성이 있는 게다. 기존의 언어사용법을 뒤바꿔버림으로써 습관적으로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게 맑스의 특기였다. 내가 맑스를 탁월한 문화비평가로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문화비평이란 것은 이렇게 기존의 문화적 습속을 멋있게 뒤집어 놓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습관에 찌든 삶을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지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이런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의 용법을 전복시켜 사회의 양지를 갉아먹는 곰팡이 정도로 취급당하던 이들에게 돌연 ‘해방자’라는 후광을 선사해 버렸다. 프롤레타리아를 향해 비웃음이나 날리던 부르주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사항이 하나 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를 가난뱅이와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는 거다. 맑스의 용어사용법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노동력을 팔아서 수입을 얻는 산업 임금노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을 재산 없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무산자’ 또는 ‘무산계급’이라고 번역해온 관습 때문에 대개 가난한 사람이라고 이 말의 의미를 새기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원래 뜻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자본주의의 특성상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절대 다수는 가난할 수밖에 없지만, 고도의 기술을 연마한 숙련공이나 한때 한국에서 이른바 노동귀족이라고 왈가왈부되었던 대기업 노조원들이야말로 맑스가 사용한 말뜻 그대로 프롤레타리아에 해당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맑스 할아버지의 뜻은 헤아리지 않고, 상대적으로 임금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당신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고 면박을 주는 것은 완전히 코미디일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앞서 뚜로가 말하고 있는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는 맑스의 용어법과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한다.

자, 이제 한번 생각을 가다듬어 보자.
지금까지 내가 늘어놓은 맑스의 계급론과 뚜로의 매음녀 찬미, 그리고 마네의 그림들은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겉으로 본다면, 별반 특기할 만한 관련성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맑스가 매음녀를 찬미한 적도 없고, 마네가 맑스의 초상을 그린 적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직접적 관련성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내가 이렇게 나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맑스와 마네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동시대의 파리를 고스란히 함께 경험했다. 맑스가 유명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완성한 1852년에서 7년이 지난 뒤, 마네는 「압생트 취객」이라는 그림을 그려서 처음으로 프랑스 살롱에 출품한다. 맑스가 문학적 수사학을 총동원해서 훗날 구조주의자 레비-스트로스가 격찬했던 고전적 팸플릿을 쓰기 시작했던 1851년은 루이 보나파르트가 그의 숙부이기도 했던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을 민주적으로 선출해준 공화정을 뒤엎고 제정을 다시 부활시켰던 해이기도 하다. 맑스의 팸플릿은 이런 역사적 상황 뒤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시리도록 냉정한 문학적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압권이다.


프랑스판 새마을운동이 남긴 것


이런 맑스의 진술은 마네의 그림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정책을 일종의 신화 만들기로 본다. 그러니까, 자신을 나폴레옹의 재림으로 대중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깜짝쇼를 펼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게다. 이런 깜짝쇼는 최소한 나폴레옹에게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었던 역사적 진정성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좀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바야흐로 19세기에 도래한 셈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깜짝쇼의 일환으로 루이 보나파르트 황제가 착수했던 일은 파리의 ‘근대화(물론 당시로 보면 현대화이기도 했지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근대화라는 말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은 박대당하고, 새것은 대접받는다. 이런 루이 보나파르트의 뜻을 받들어 파리를 완전히 ‘새마을’로 만들어버리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사람이 조르주 오스망이다.

이런 오스망의 과감한 근대화 사업 때문에 파리는 올망졸망한 다른 유럽의 대도시와 달리 그 규모 면에서 오늘날 각국의 여행객들로부터 경탄을 한 몸에 받는 처지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밝은 면에 가려진 그늘은 생각보다 깊다. 파리의 근대화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던 것은, 한국의 경우에도 역사적으로 확인되듯이, 도시빈민들이나 노동자들이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배낭 하나 메고 가서 사진을 찍어대던 개선문이나 에펠탑 주변은 이렇게 창졸간에 집과 세간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아야 했던 19세기 파리 노동자들의 설움이 배어 있는 공간인 셈이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근대화라는 명분을 달긴 했지만, 오스망이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 끊임없는 폭동의 진원지였던 노동계급의 거주지역을 부르주아의 거주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버리는 것이었다.

파리 중심가에 위치한 광대한 도로와 광장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고안된 공간배치이다. 요즘 알 만한 사람들의 입에 전설처럼 오르내리는 독일의 문예학자 발터 벤야민의 『파사주 기획』은 이런 오스망의 근대화 기획과 그에 따른 문화 충격에 대한 소상한 보고서이다. 벤야민은 이런 파리의 근대화를 ‘오스망화’라고 정의하면서, 이것이 예술형식을 기술에 종속시키는 일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런 방식은 언제나 문화적 키취만을 양산해낼 뿐이다.


“넝마주이를 그리다니!”

이쯤에서 우리는 마네의 그림들을 향해 쏟아졌던 살롱의 비난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마네가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은 「압생트 취객」을 한번 들여다보자. 이 그림은 장-앙트와네 와토의 「범부」라는 그림의 구도를 그대로 빌려온 작품이다. 와토가 「범부」를 통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술 먹지 말라는 훈계다.

언뜻 살피면, 마네 역시 「압생트 취객」을 통해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기분 좋게 취한 저 취객은 당시 루브르 일대를 배회하던 넝마주이였다. 압생트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명했던 독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판매금지 처분을 내릴 정도로 사회문제를 일으키던 술이었다. 알코올중독은 19세기 파리의 주요 이슈이기도 했는데, 유명한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압생트와 같은 독주에 의지해서 삶을 파탄지경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노동계급의 처지를 묘사하고자 소설 『목로주좀을 썼노라고 진술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마네는 과연 이렇게 알코올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압생트 취객」이란 그림을 그린 것일까?


전통적 구도를 빌려와서, 근대적 풍경을 화폭에 옮겨놓음으로써 습관적 기법을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수법은 이른바 근대성을 재현하기 위한 마네의 묘수였다. 그 근대성이란 물건은 앞서 언급했듯이, 루이 보나파르트와 조르주 오스망이 만들어놓은 그 근대화 정책의 산물이었다. 이런 마네의 전략은 맑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우리가 확인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맑스가 습관적 용어들을 그 용법만을 뒤틀어버림으로써 전혀 다른 의미맥락으로 확장하듯이, 마네 또한 구태의연한 아카데미의 인습적 재현체계를 살짝 비틀어버림으로써 유사한 효과를 얻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네가 그린 취객이나 매음녀를 맑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네와 맑스는 공히 현란한 문화적 키취 속에 감추어져 있는 노동계급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지만, 그 노동계급에 대한 태도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네의 취객이나 매음녀는 맑스가 혁명의 주역으로 보았던 임금노동자라기보다, 오히려 당시 상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고 지칭되었던 가난뱅이나 떠돌이 노동자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게다.


그림에 각인된 계급성

이런 맥락에서 그림 그리기에도 바쁜 화가 마네에게 혁명까지 요구하는 것은 좀 과한 짓이 아닌가 싶다. 당시 화가로서 마네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네의 출신배경은 굳이 이렇게 살롱 비평가들로부터 온갖 욕을 먹어가면서 19세기 파리의 밑바닥 인생들을 그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전도양양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괴테와 마찬가지로 마네 역시 자기 계급의 탕아였던 것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압생트 취객」은 이런 마네의 반항심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상층 중간계급 출신인 마네가 술에 취해 도심을 배회하는 한 넝마주이의 초상화를 그려준다는 것은 당시 미술계의 분위기로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유명한 소설 『위대한 유산』에서 주인공 핍은 사진술이 나오기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까닭에 자신은 부모님의 얼굴을 모른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을 잘 음미해 보면, 19세기라는 시대가 어떤 시대였을지 충분히 상상이 갈 거다.

사진이라는 신기술 혁명의 산물이 대중적으로 유통되기 전까지 자기 조상의 얼굴을 알 수 있는 계급은 귀족이나 몇몇 부르주아에 한정되었다. 디킨스의 소설이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하나의 문화형식에 기재되어 있는 계급성이다.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런 기술과 문화 변동의 관계에 감추어져 있는 계급성의 문제이다. 185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진술이 대중화된 것을 감안한다면, 마네의 「압생트 취객」이 가진 선구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게다. 마네는 사진술의 혜택으로부터도 밀려나있던 넝마주이나 매음녀를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초상을 담아내던 화폭에 그렸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행위 자체가 살롱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네가 천착한 ‘근대의 그늘’


   
속내를 알고 보면, 이 그림은 더 재미있는 내용을 감추고 있다. 「압생트 취객」의 넝마주이는 마네가 그린 「늙은 악사」라는 그림에도 똑같이 출현하고 있다. 이 넝마주이의 이름은 콜라르데였는데, 보들레르는 이런 넝마주이의 존재를 일컬어 ‘거리의 철학자’라고 1857년에 출간된 『악의 꽃』에서 묘파하기도 했다. 따라서 마네의 그림은 여러 모로 보들레르가 말하는 바, 근대성으로 인해 그늘로 밀려나버린 삶에 대한 관심으로 볼 수가 있다. 마네가 산업 자본주의에 항의하는 방식은 이렇게 맑스와 달랐지만, 종국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었던 셈이다. 모더니즘이 스탈린주의에 반대해서 등장한 신좌파들에 의해 재해석되고 새롭게 평가되었던 까닭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애써 대립시키면서, 전자를 후자에 비해 더욱 해방적인 양식으로 간주하고자 했던 서구 신좌파의 시도는 맑스가 해방자로 간주했던 프롤레타리아, 다시 말해서 산업 임금노동계급에 대한 회의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마네의 그림들은 이런 주류 맑스주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던 다양한 계급들의 군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늙은 악사」에서 마네가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은 오스망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살 곳을 잃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처지에 놓인 보헤미안들이다. 나중에 이런 보헤미안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1871년 파리코뮌의 해방구를 이루어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마네의 그림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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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끼사스 > [펌] 오에 겐자부로가 발신하는 것

출처: 신교수 칼럼 2004년4월18일자 (http://www.e-nihongo.com/bbs/gnuboard.php?bo_table=sincolumn&page=1&wr_id=22)

‘노벨상 작가’ 오에겐자부로가 발신하는 것/독자가 발신하는 것
-‘대일본제국’ vs ‘마을=국가=소우주’를 시야에 넣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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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오에 문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관심있는 독자로서 그의 소설을 접해왔다. 몇 년 전 금융통화위기가 아시아를 강타했을 때,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출판사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전집’을 발간하던 중 부도를 낸 ‘사건’이 있었다. 가까스로 회생한 뒤 출간한 첫 책이 필자(펌자 註: 신인섭 건국대학교 일어교육과 교수)가 번역한 오에의 ꡔ동시대 게임ꡕ이었다. 한국의 독서계와 오에 문학의 거리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관심있는 독자들이라면 오에의 노벨상 수상(1994)이 결정되었을 때, 한국의 신문들이 내놓은 오에 문학에 대한 알쏭달쏭한 논평들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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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속의 오에, 그리고 ‘일본인’

일본근대문학을 전공하는 필자는 “오에 겐자부로는 어떠한 인물인가?”라는 질문에 한국의 독서인들이 어떠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인가 하는 점을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벨상 작가’,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오에에 관한 정보가 의외로 적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손에 의해 쓰여진 오에에 관한 연구서가 전무하다시피 한 것도 일본문학연구자로서 마음이 어두워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오에 문학의 독자가 형성되지 못한 것은 오에 문학의 성격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독서 대중 역시 오에 겐자부로가 고명한 작가라는 것은 알면서도 그가  어떤 작품을 썼고, 어떤 작가인지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부터 서점에는 오에와 관련된 서적들이 진열되었고, 신문, 잡지에서 특집호가 기획되었다. 많은 비평가들의 찬사가 쏟아져 ‘서양’ 문학에 뒤지지 않는 ‘일본’ 작가 ‘Oe-Kenzaburo’가 탄생하였다. 초판 발행 이후 팔리지 않았던 그의 소설들이 ‘세계’ 수준을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 노벨상 작가의 책을 샀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읽으려고 샀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앞부분을 읽다가 그만두었다, 등등의 담론이 일본인 독서층에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전하는 일본의 매스컴은 타고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아시아에서 3번째로 수상하는 오에의 노벨 문학상을 ‘서양’, ‘아시아’,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 관계로서 그 윤곽을 잡고 있었다. 노벨상 작가로서의 오에는 “일본인으로서 일본을 뛰어넘는 세계 수준의 작가”라는 사고틀에 의해 단단히 중심화되고, 오에의 텍스트가 제기하는 담론 자체의 갈등은 노벨상 담론 속에 함몰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필자는 생각한다.  
오에는 ‘대일본제국’과, 그에 저항하는 일본 내에 속해 있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 ‘마을=국가=소우주’를 구성하는 공동체간의 갈등이라는 독특한 발상을 소설화하고 있다(ꡔ동시대 게임ꡕ). 또 다른 소설에서 성적 에너지의 범람(치한 행위)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일본 청년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일본은 어두운 공간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ꡔ성적 인간ꡕ). 또 다른 소설에서는 전쟁 때 피난 온 감화원의 소년들을 마을 사람들이 전염병 속에 방치한 끝에 반항하는 소년을 죽이려고 달려든다는 폐쇄적 공간을 그렸다(ꡔ나쁜 싹은 어릴 때 제거하라ꡕ). 즉 오에가 발신하는 것은 ‘일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의 불안정성이었지만, 일본의 평균적 독자들은 일본이라는 것을 안정성(seamless)으로 수용(혹은 발신)해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독서 대중이 환호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속의 오에’와 ‘일본인’을 부자연스럽게 결합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와 같은 텍스트의 발신과 독자의 발신 사이에 놓인 해석 공간의 매력(혹은 마력)에 대해 <노벨상/오에/일본>의 균열을 시야에 넣으면서 접근하기로 한다.  
그림  )2000/8/23에 발매된 오에 겐자부로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초상을 새긴 기념 우표. (전통 의상을 입은 가와바타와  연미복의 오에가 노벨상을 통해 통합되는 점이 흥미롭다.)


2. 오에 겐자부로의 정치적 입장

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 일본의 시코쿠(四國) 지방에 속하는 에히메현(愛媛縣)의 산촌에서 출생하였다. 열 살 되던 해에 일본의 패전을 맞이한 그는 당시 자신이 체험했던 가치관의 혼란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즉 군국주의적 신념으로부터 전후 민주주의의 가치관으로의 변환에 따른 정신적 공황이 어린 시절 자신을 강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작가 스스로 규정한 ‘오에 문학의 에너지’는 문학적 담론의 ‘정설’로 자리잡게 된다. 조금 전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10살 무렵의 가치관의 혼란에 대하여 나중에 성인이 된 오에가 서술하는 것은 10세 무렵의 ‘자신’이라는 텍스트를 ‘분석’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10살의 오에 소년의 감정과 동일시하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무튼 오에는 도쿄(東京)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여 ꡔ죽은 자의 사치ꡕ(1957)로 학생 작가로서 문단에서 인정을 받고 그 다음 해 ꡔ사육(飼育)ꡕ으로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수상하였다. 초기의 오에는 인간 정신의 폐쇄된 상태를 목가적으로 그렸다는 평을 받는다. 소외당한 일본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절망적인 초조감을 그린 ꡔ우리들의 시대ꡕ(1959), ꡔ늦게 온 청년ꡕ(1962), ꡔ우짖는 소리(叫び聲)ꡕ(1962), ꡔ성적 인간(性的人間)ꡕ(1963), 등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하여 그는 순수문학 영역에서 작가적 위치를 확고히 했다.  
한편 오에가 사르트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은 오에 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서두를 장식하는 강력한 담론 중의 하나이다. 그의 졸업 논문의 테마가 사르트르였다는 점 역시 영향론적 측면에서 회자되지만, 무엇보다도 ꡔ죽은 자의 사치ꡕ 등에서 보이는 존재의 감각적 표현은 사르트르의 초기 작품과 매우 흡사하다.
오에가 대학생이었던 50년대의 일본은 맑스주의와 프랑스 실존주의의 양대 조류가 유행했던 시기였다. 그들은 정치운동에 참여하던가 혹은 허무주의적 분위기 속에 몰입하던가 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오에의 작가로서의 정치적 선택에서 사르트르와의 유사성이 눈에 띤다. 사르트르는 시대의 상황에서 정치․사회적인 사건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힐 것을 천명하고, 지속적이고 정력적으로 발언을 했다. 프랑스 식민지에 대한 사르트르의 윤리의식과 같은 것을 오에에게서 읽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와 같은 오에 겐자부로의 정치적 태도가 한국인에게 공감을 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예를 들면, 오에는 바로 얼마 전인 2001년 3월16일, 우리가 일본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항을 이루는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하여 ‘일본’의 태도를 비판하고, 검정에서 통과시키지 말라고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솔제니친 석방탄원서에서 서명하고(1974년), 김지하 시인 탄압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보이며(1975), 피차별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오키나와 문제와 베트남 전쟁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또 원폭 문제에 대한 르포르타쥬,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 자세,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발한 ‘애매한 일본’ 비판 등등, 오에의 정치적 입장은 일본에 대해서 감정적인 응어리가 있는 한국인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오에에 대한 평가 중에서 자주 눈에 띄는 ‘일본의 양심’이라는 말은 평균적인 일본의 지식인들과 구별되는 ‘특수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위치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오에 겐자부로의 정치적 입장은 큰 틀에서 보면 일본에 대한 안티테제를 축으로 형성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노벨상 작가에게 수여해 온 일본 정부의 훈장을 거부한 예는 유명하다. 오에는 “예술원의 존재는 우리나라 문화에 바람직한 영향을 주지 못한다. 폐지해야만 한다. 문학자가 국가에 포섭되는 형태가 아니라, 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형태에서 (작품을=인용자) 써야만 한다”면서 “나는 전후민주주의의 세대. 문화훈장 따위의 국가 관련의 상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근대 작가들 중에서 신화화된 인물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가 일본정부가 주는 박사학위 수여를 거부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신화의 확대재생산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오에의 경우 나쓰메 소세키처럼 신화화될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신화화된다면 오에 문학의 의의 자체가 진부해지겠지만) 그가 거부한 훈장은 거부의 변에서 밝힌 것처럼 작가로서의 오에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일본’이라는 국가와 거리를 두겠다는 발언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스․미디어는 오에를 ‘일본’을 뛰어넘은 세계적인 작가이면서 동시에 일본인 작가라는 관점에서 그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앞의 기념 우표를 예를 들어도, 노벨상 수상작가로서 오에는 ‘애매한 일본’을 비판해도 결국 ‘일본인’ 노벨상 수상 작가로서 통합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주장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매개로 끌어내는 ‘아름다움’은 ‘애매한 일본’에 대한 비판 정신, 윤리성과 결합하여  훌륭한 ‘일본인’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연장 선상에서 ‘노벨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탄생한다.
오에가 연설, 강연,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본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재료가 되고, 노벨상이라는 이미지 속에 포용된다. 그 결과로 오에의 정치적 입장은 ‘안전한’ 영역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오에가 일본을 비판하는 행위는 일본의 양심을 더욱 부각시키고, 비판받는 부분의 비양심을 은폐하는 아이러니를 초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노벨상 작가를 포섭하는 국가적 동인은 강력한 것이다. 오에가 훈장 서훈이나 에히메현에서 주는 상을 거절했지만, 정작 노벨상의 유혹에는 이길 수 없었던 것 같다.
노벨상 작가로서 중심화되는 오에.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 일면 날카로운 반면에 ‘지나치게 담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는 지식인이지만, 그 양심에 따라 행동을 다함으로써 책임도 완결된다는 식으로 ‘사건’과 자신과의 일정한 거리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행동파의 이미지로 각인된 진보적인 작가 가이코 다케시(開高健, 1930-89)와 비교할 때, 오에가 추구한 사회적 실천은 ‘비판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식의 ‘탈속’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노벨상의 이미지는 이렇게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의 발신과 동시대의 독자가 발하는 메시지 사이에서 충돌하고 서로 흡수하면서 아주 강력한 노벨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3. ‘흑인’ 병사이어야만 하는가?

산촌 마을에 어느 날 흑인 병사가 비행기 추락과 함께 떨어져 포로가 된다. 전쟁과 아무런 관계가 없던 산촌 마을이 갑자기 흑인 포로를 두고 술렁거리고, 고립된 산간 마을에서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게된 소년과 그의 아버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오에가 전후작가로서 혜성같이 등장하는 ꡔ사육(飼育)ꡕ(1958)이라는 중편 소설의 내용이다. 오에는 ꡔ사육ꡕ으로 문단 작가의 등용문인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하였다. 일반적으로 아쿠다가와 상 수상 작가는 순수 문학 진영에서 작가 활동이 보장되는 프리미엄(지명도)을 획득하게 된다. 이야기가 약간 탈선하지만, 재일 교포 작가 유미리와 근래에 들어서 오키나와 출신 작가들에게 아쿠타가와 상이 수여되는 것은 일본의 문단사의 대단한 변모라고 할 만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ꡔ사육ꡕ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국가와 개인과의 격리된 감정이다. 이와 같은 감정은 ꡔ동시대 게임ꡕ의 ‘대일본제국’ 대 ‘마을=국가=소우주’의 도식으로 크게 선회하게 되지만, 오에가 그린 텍스트 공간은 불안정성 그 자체인 것이다.
전후의 시공간, 그것은 국가와 개인의 격리된 감정을 맛보고, 그 위에 일본인들이 새롭게 일본인으로서 자기 규정을 해나가던 시기였다. 일본은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통해 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으로서 새롭게 명명할 수 있었다. 대동아의 맹주로부터 아시아 경제의 맹주로.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미국이 되기 위해 백인 콤플렉스를 매개로 한 ‘일본’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ꡔ사육ꡕ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국가가 개인을 얼마나 소외시키는지, 그리고 개인은 타자를 얼마나 소외시키는지 적절하게 제시한 작품으로, 국가와 개인과의 격리된 감정을 공통 함수로 지니고 있던 당시 지식인 사회에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왜 산간 마을에 추락한 미국 병사가 백인이 아닌 흑인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오랫동안 지녀왔다.
“우리는 깜둥이를 둘도 없는 훌륭한 가축, 천재적인 동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었다.”(ꡔ사육ꡕ)라는 서술이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처럼, 이 소설은 ‘깜둥이’라는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흑인병사로 인해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빠지게 되지만, 흑인병사를 적군으로서의 미국인이 아닌, 단순한 동물로 간주함으로써 주인공인 나의 ‘아이덴티티’의 규정도 따라서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인공인 나는 ‘일본’에 속해 있는 산촌에 사는 소년이다. 하지만 읍내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는 사람으로 ‘국가’에 소속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나’에게 흑인은 적군이 아니라  색깔이 다른 인종적인 차이 이외에는 아무런 변별성도 자져다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흑인병사와 인간적인 감정을 교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서 이 작품을 읽어도 여전히 남는 의문은, 그런데, 백인 병사가 포로로 잡혔어도 동물처럼 ‘사육’하였을까? 그리고 ‘사육’당하는 백인 병사의 이미지가 당시 일본 사회에 용납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작품 분석의 차원에서는 백인이 아닌 흑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일본의) 굴절된 욕망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더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미국을 거울로 자기규정하는 방식에 대해 야유하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위기에 직면한 흑인 병사의 폭력적 에너지--흑인 병사는 자신에게 솔직한 감정을 보여준 소년을 붙잡아 인질로 잡고 결국 마을 사람들의 공격에 의해 머리가 박살난다. 그때 소년의 손도 잘려 나가게 된다-- 에 담긴 야만성으로부터 개운하지 못한 느낌을 오늘날 오에를 다시 읽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4. ‘대일본제국’ vs ‘마을=국가=소우주’

ꡔ동시대 게임ꡕ(1979)에서 ‘대일본제국’과 50일 전쟁을 벌이는 ‘마을=국가=소우주’의 이야기는 오에의 사상의 한 핵을 보여주고 있다. ‘대일본제국’이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군국주의를 야유하기 위한 표현일 것이다. 반면에 ‘마을=국가=소우주’라고 불리는 시코쿠의 작은 산간 마을은 천황제 혹은 대일본제국에 부정하기 위한 에너지로 가득 찬 공간이다. 그 마을에서 내려오는 신화와 전승은 ‘마을=국가=소우주’가 얼마만큼이나 ‘일본국’이라는 개념 정의를 거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소학교(초등학교)에 다니던 서술자가 천황에 대한 경외심을 거부하고 ‘마을=국가=소우주’의 창건신인 ‘파괴자’를 숭배하는 에피소드는 제국주의 파쇼화에 대한 결별의 메시지인 셈이다.  
ꡔ동시대 게임ꡕ은 서술자, 즉 ‘마을=국가=소우주’의 신화와 역사를 쓰는 ‘나’는 여러 갈래의 신화 전승을 쌍둥이 누이동생에게 6통의 편지 형식으로 서술하는데, 그 4번째 편지가 대일본제국이라는 군국주의 일본과 일본 안에 있으면서도 일본의 지배로부터 멀어져 있는 산간 벽지의 마을이 자존심을 걸고 격돌한다는 ‘무훈 혁혁한 오십일 전쟁’인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기로 한다.
시코쿠의 산간 마을인 ‘마을=국가=소우주’는 역사적으로 국가 권력에 대항적인 의식을 지닌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예전에 마을=국가=소우주에는 한 명의 새로운 아이가 탄생하면, 또 한 명의 영아 출산을 기다렸다가 한 쌍을 만들어 둘을 하나의 호적에 등록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두 명 중의 한 명은 국가 권력과 무관하게 ‘마을=국가=소우주’의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하게 하는 이중제 호적의 술책이 국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 하면, 두 명 중의 한 명은 납세, 병역 등 국민으로서 국가로부터 부과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남은 한편은 반대로 국민으로서 자기 규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 안에 국가에 포함되지 않은 영역을 매개로 마을=국가=소우주라는 명명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노출되어 ‘대일본제국’의 군대가 치안출동을 한다. 이때 ‘마을=국가=소우주’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일본제국’을 맞아 싸워 승전을 거두지만, 그들의 삶과 정신적 배경인 산림을 불태우려는 적 지휘관(무명 대위)의 계책에 항복을 하고 만다. 그리고 무명 대위가 연 군사재판에서 호적 등본에 기재된 두 명 중 한 명은 모두 학살당하고, 그로 인해 ‘마을=국가=소우주’의 저항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양민 학살에 가담한 군인들이 모두 다른 지역에 전속되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려는 ‘대일본제국’의 전략에 의해, 군사작전에 참가한 군인들은 모두 아시아의 전쟁 지역에 보내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소멸된다. 제국주의 정부가 대규모 양민의 반란을 표면화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명 대위는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 대위라 명명되는데, 그 역시 양민을 학살한 뒤 자살해 버린다.  
‘마을=국가=소우주’라는 독특한 명칭으로 서술되는 시코쿠(四國)의 산간 마을이 파쇼화로 치닫던 대일본제국과 50일간 전쟁을 하면서 저항하다가 결국 패하고 만다는 이야기는 매우 함축적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조직화된 전쟁범죄, 베트남전, 나아가서 텍스트가 발표된 이후의 사건들인 걸프전 등에 대한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무명 대위로 상징되는 호명되지 않는 군인들의 모습이야말로, 전쟁과 개인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6. 결-가족 이야기 혹은 공생의 테마로

오에 문학이 발신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나 전쟁과 개인의 문제, 허무적인 주체의 갈등적 공간으로서의 일본에 관한 문제화는 일본의 독서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와 같은 테마를 다룬 소설들이 어렵기도 했지만 독자가 수신하고 싶어하는(즉 독자가 발신하는) 것은 ‘구원’ 혹은 공생의 테마였기 때문이다. 노벨상의 수상 이유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 자신, ‘글을 쓰는 것은 악마를 물리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이 만든 상상의 세계 속에 개인적인 것을 파헤침으로써 인간에게 공통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뇌에 장애가 있는 아이의 아버지가 된 후의 작품에 특히 농후하다. 동 씨의 ꡔ만연원년(万延元年)의 풋볼ꡕ(1964)은 대표적 작품으로, 지식, 열정, 꿈, 야심, 갖가지 인간의 태도 등이 서로가 융합하는 혼란한 세계에서의 인간관계를 그렸다. (왕립 아카데미 발표의 수상 이유 중에서)

오에가 뇌에 장애가 있는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은 ꡔ개인적 체험ꡕ(1964) 이후 그의 소설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오에의 가족을 소재로 하는 소설들은 장애아인 아들 히카리(光)와의 공생을 모티브로 한 인간애를 그리고 있어, 독자들에게 훈훈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가족소설을 사소설로 읽어내는 일본적 독서 방식으로는 오에의 문제의식을 개인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작용을 할 것이고, 그것은 오에와 오에의 가정을 신화화하는데 이용될 우려가 크다.  
오에 히카리의 인간 승리를 작가 오에의 승리이자, 일본인의 승리를 만드는 장면을 우리는 노벨상 수상 직후 히카리의 부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작곡가 히카리에 대한 관심과 조명은 오에 없이는, 나아가서 노벨상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오에의 강연회와 그에 대한 뉴스에는 늘 ‘노벨상’의 관사가 따른다. 오에의 발신과 독자의 발신이 만나는 지점, 그곳이야말로 ‘노벨상’이라는 ‘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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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cedes Sosa - Acustico en Vivo
메르세데스 소사 (Mercedes Sosa)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2, 3년 전인가.  내한공연 일정이 잡혀 있던 메르세데스 소사가 한국에 오지 못한다고 하니 무척 서운했던 기억이 있다. 건강상의 이유였다. 이로써 우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세기의 명가수의 라이브 공연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해에 때마침 그녀의 라이브 앨범 ‘Acustico En Vivo’가 국내에 소개되어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 음반은 2001년 11월 16일과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공연 실황을 담은 것으로, 이것은 그녀가 1982년 아르헨티나 귀국 공연 실황과 1980년 유럽 라이브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이는 실황 음반이다.

우선 가장 인상적인 것은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이다. 곡이 끝날 때마다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성이 들려오고, 소사도 그런 관객들과 교감을 나누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특히 두 번째 CD 마지막 부분에서 소사의 이름을 외치며 앙코르를 요구하는 관객들의 목소리를 대할 때는 자연스레 소사의 위대함, 그녀가 아르헨티나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가수였는지를 새삼 되새겨보게 만든다.

수록곡은 타이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쿠스틱 노래들로 짜여 있다. 누에바 칸시온 류의 노래에서부터 최근 히트곡까지를 망라하며 소사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칠레 출신의 가수 빅토르 하라가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곡을 붙인 ‘Poema No.15’, ‘galopa murieta’를 비롯해 ‘태양 아래’, ‘어린 시절’, ‘단지 삶에 대해서’, ‘내게 힘이 되어주는 노래’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35년에 태어나 평생을 세계의 양심으로 활동해온 소사의 정수가 담겨 있는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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